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Mar 14. 2024

800원 폐지로 뭐 하세요?

어제를 딛고 오늘을 살아야 할 이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폐지 줍는 노인의 일상
밥 먹고 살기 위해
밥을 거른다
ㅡ 사사영상 <GPS와 리어카> 중  ㅡ



어제, 92세의 독거어르신 할머니를 뵙고 왔다.

그녀의 딸은 내내 할머니를 방치하며 살아온 듯했다. 할머니의 딸은 결혼하고 이내 이혼해서 겨우 겨우 먹고 살아야 할 만큼 가난해서라고 했다, 할머니는. 6년 전엔가 내가 할머니와 독거어르신 결연을 시작하자 따님은 드문 드문 이나마 방문이 늘어났다. 가끔 할머니에게 용돈이나 음식도 해오는 등 그간 변화는 있어왔다. 몇 년 전 할머니 수술문제로 따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다. 나는, 직장 일 때문에 모든 폰번호가 저장되면 바로 카톡 친구로 추가된다.

그때 누군가는 들키고 싶지 않은 그들만의 평화를 읽고 말았다. 그 따님의 카톡프로필엔 할머니의 사진은 전혀 없었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그녀의 20대 아들과 딸의 수려한 외모 그리고 미소 띤 가족사진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평화에서 아린 양가감정이 일었다.

할머니는 몇 개월 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구르셔서 식욕이 많이 떨어지셨다. 여러 상황으로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에, 갈비뼈가 위를 눌러서인지 지금은 죽 정도만 겨우 드신다. 어제도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매생이죽과 전복죽을 2개로 분리 포장해서 드리고 왔다. 저번에 뵈었을 때보다 숨 쉬기가 더 어려우신 듯했다. 문득 할머니의 딸은 이 계절에 어떤 마음일까 생각에 잠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최소한 2000만 원 전세보증금은 상속될 것이다.

가빠 오르는 호흡, 언제 머질지 모르는 숨. 갑자기 나의 호흡이 가빠 오르는 것 같았다. 그 어느 해 봄, 그 계절에 멈추었던 어느 가장의 숨소리가 거칠게 파고드는 듯했다.  

ㅡ 청년 클레어, 카프카의 < 변신 > & (부제) 숨겨져야 할 사람들, 숨겨져야 할 내면들 중 ㅡ





2024년이 시작되었고 벌써 세 달째 접어들었다.

봄 햇살이 좋다가도, 어느 날은 전날 내린 서릿발 같은 눈송이와 꽃샘추위에 옷깃을 부여잡곤 한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위세에 끝까지 고약한 성질을 부리는 겨울. 변덕스러운 날씨가 반복되던 몇 주 전 어느 날, 혼자 사시는 독거 어르신이신 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올해로 93세를 지나는 할머니는 작년 늦봄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만 넘어지셨다. 관절염과 몸살로 수개월간 병원비가 늘어가던 중이었다. 그즈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예전에 만들어 놓은 수공예 물품이 생각났다 한다. 집에 묵혀 두느니 그거라도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려 했다 한다.


그러나 이 좋은 일회성 아니 하루벌이 사업 아이템은, 90도 굽은 할머니의 허리처럼 삶의 허들 앞에서 다시 한번 무너졌다. 심각하게 굽은 허리로, 수공예품을 등에 지고 에스컬레이터를 타다, 그만 무게가 앞으로 쏠렸던 것이다. 할머니가 에스컬레이터 말단에서 고꾸라지자, 주변의 시민부터 역무원까지 상당히 놀라 모였었다 한다. 한바탕 인생의 큰 소란을 수치와 모멸감, 두려움 가운데 견디었을 할머니의 고단한 오후. 다행히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거이다 내려 넘어지신 거라, 머리를 크게 다치거나 장기가 손상되진 않으셨다. 하지만 갈비뼈에 금이 갔다. 부랴부랴 병원에 갔지만, 당시엔 컨디션이 안 좋아 마취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수술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한다.


그 일이 있고, 어느덧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갔다. 어김없이 새로운 해는 떴고, 할머니가 90번 넘게 맞았던 그 봄은 기필코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사이에도 코로나에 감염되고 독감, 치매 초기증상, 집 앞에서 두 번의 또 다른 넘어짐으로 생사를 여러 번 오가셨다. 이번엔 정말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나 내내 마음을 졸이곤 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삶엔 지뢰처럼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 나비(고양이 이름)만이 그러한 할머니의 위태로운 삶을 제대로 읽어내는 생명체가 아닐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매일을 살아내는 이들, 할머니의 삶은 잊히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잊히고 묻힌 채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몇 주 전 그날 할머니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늘 그 시간대엔 집에 계시는, 할머니가 안 계셨다. 아차 싶었다. 현관문도 잠겨있지 않았다. 그래 뉴케어를 침대맡에 두고 나오는데, 마음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아니 새장에 갇혀 아픈 몸으로 발버둥 치던 새 한 마리를 하늘로 돌려보낸 것만 같았다.


오늘은 진짜 병원응급실에 가셨나, 핸드폰을 꺼내 할머니 번호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발신음에도 답은 없었다. 지쳐 끊겨버린 휴대폰, 그 유일한 연결끈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묘한 감정으로 할머니 집 앞 가파른 계단을 내려 골목길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 멀리 왠지 익숙한 듯 또 낯선 한분이 90도 굽은 등으로 폐지를 썰매 끌듯 질질 끌고 오시는 게 아닌가. 시력이 안 좋은 나는, 몇 걸음 더 걸어간 후에야 독거어르신 할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다. 큰 걸음으로 달려가듯 다가가 말을 건넸다.


"할머니! 몸도 안 좋으신데..."


울컥한 마음 하나, 걱정 섞인 낮은 역정 하나, 그런 마음이 교대로 튀어나왔다. 내가 들것을 빼앗으려 하자 만류하신다. 그리고 묻지 않은 해명을 더듬더듬 읊어 가셨다.


"가게 갔다가 앞에 이게(폐지) 있지 뭐야. 욕심이 나서. 그냥 올 수 있어야지"

"저번에도 뭐 판다고 지하철 오르내리다 다치셨잖아요. 이거 팔려다 다치면 병원비가 더 나올 텐데, .."

"그냥 잘하면 돼야."

"이거 팔면 얼마인데요?"

"800원"

"...."

"이거 아래 두면 사람들이 또 다 가져가. 내가 몇 번 오르내리면 다 옮길 수 있어"

"할머니, 그러다 다치셔요. 여기 계단도 가파르잖아요.."

"아니, 그거야 운동한다 생각하고. 집에만 있으니깐. 뒷집 노인도 맨날 집에서 누워만 있다가 더 살 수 있는 사람이 갔대(죽었)잖아."

"아.. 그래요.. (할머니가) 운동 삼아 하시는 거면..."





어쩜 할머니가 뱉고 싶었던 말은, 800원을 벌어야 한다가 아니었나 보다. 더 살고 싶다, 이 땅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고 싶다, 이 말이 아니었을까. 할머니에게도, 내일이 준비돼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마음에서 뜨거운 불구덩이가 울컥 올라왔다. 인간의 생존 아니 실존에 대해서 이토록 일필휘지로 갈겨놓은 한마디가 어디 있을까. 나는 더 이상 할머니를 만류할 수 없었다. 만류하지 않았다.


가파른 계단을, 내가 말릴 겨를도 없이 쏜살같이 올라가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본다. 그 뒤를 따라 좀전 자유로운 새를 떠올렸던, 새장 같은 할머니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작년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진 후, 갈비뼈에 눌려서인지 그나마 좋던 식욕은 지금껏 회복이 안 되고 있다. 내가 매달 개인적으로 사서 배달드리는, 뉴케어 한두 박스와 단백질우유 한 박스가 할머니의 주식이 되어가던 차였다.


"뉴케어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어요. 수개월 동안 밥 잘 못 먹고 이것만 먹었는데, 기력이 이리 좋아졌어요"


그날 할머니는 저번에도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셨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배달앱으로 매생이죽, 전복죽을 주문했고 30분도 안돼 도착했다. 침대 가까이 포장된 죽 꾸러미를 들여다 드렸다.


때로 사람들은 말한다.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말이다. 생을 잡고 있어 반복해야 하는 삶의 누추함과 그 초라함의 발각. 어쩜 살아내는 것 이상으로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밑바닥 민낯이 주는 비참한 수치심과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절망감이 아닐까.






처음 할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의 삶은 마치 뾰족한 바늘 끝 같았다. 매일 찌르고 찔리는 삶의 고통 그리고 그것을 매일밤 홍역처럼 앓고 견디는 삶. 40대부터 앓아 왔다던 불면증과 우울증 때문에 밤에 편하게 자는 날이 거의 없다 했다. 십수 년 전 오토바이에 치인 다리는 관절염으로 비화되어 이젠 통증으로 부화돼 불면증을 가중시켰다. 90도 가까이 굽은 허리는 크고 작은 삶의 불편을 남겨 주었다.


악다구니.

젊은 시절엔 말 없고 수줍었을, 한 처녀는 반백년 지나는 동안 강인한 악다구니로 삶을 버텨왔다.


고통과 생명.

생명을 주었으면 고통을 주지 말던가, 고통을 주었으면 생명을 소진시키던가. 고통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는 아니 연명하는 숱한 사람들의 고성이 하늘을 뒤흔든다.


그러나 인생은 사노라면 어제와 다른 초콜릿이 만져진다 했던가. 다행히 할머니는 나를 만나고 2년이 채 지나기 전 불면증이 많이 호전되어 수면제를 끊으셨다. 그리고 매번 방문할 때마다, 주문처럼 반복하던 '죽고 싶어'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생이지만 할머니는 고귀한 생명을 지켜내기로 한 것이다. 비단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믿음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구십 해를 견뎌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예를 갖춘 존엄한 예우라 여겼으리라.


시간이 되어 방을 나서기 전, 지갑에서 파란색 지폐를 꺼내 건네보지만 이내 할머니의 만류로 도로 넣었다. 다만 생의 존엄과 존중에 대한 경의에 가까운 눈빛을 달게 그 방안에 남겨 둔 채로, 아쉬운 걸음으로 터벅터벅 나왔다.


몇 주 전 할머니가 생을 부둥켜 안으며 살아내려 나왔다 고꾸라졌던 단대오거리 전철역. 나는 그 에스컬레이터를 조심스레 올라탔다. 한 손으로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꼬옥 잡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내동그라졌을 그 어느 위치를, 그 어느 날의 한 시간을, 가슴 에이듯 드나드는 찬바람을 움켜 잡으며 응시했다.


인생이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인가.


누구에나 닥칠 수 있는 존엄의 위협,

그 칼날 같은 외다리에 서서,

인생의 숱한 난제와 역설을 담은 할머니의 인생 책에 잠시 손을 얹고 눈을 감아본다.

지그시 감은 눈그늘 밑으로 할머니가 잠시마나 누렸을 아늑한 오후를 그려 본다.  









# 아래는 참고 영상들로, 현재와 미래 나와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세상 같아요. 시청 권장 영상입니다. 

다음 회에서는 <청년빈곤>에 대해서도 글로 찾아뵐게요.


한국, OECD국가 중 노인 빈곤율 1위, 노인 자살률 1위.

한국의 가난한 노인은 폐지를 줍습니다.
"늙으면 폐지나 주워야지."
우스갯소리 신세 한탄에 등장할 정도로 가난한 노인의 폐지수집 노동은 우리 사회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노인들이 왜 폐지를 줍는지, 또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무관심으로 인해 열악한 노동 환경에 방치된 노인들.

ㅡ 중략 ㅡ

전국의 폐지수집 노인은 몇 명일까요. 일부 정치인은 200만 명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6만 명이라는 추정도 나옵니다. 200만과 6만 명의 차이. 이제까지 폐지수집 노인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입니다. 정확한 인구를 모르니, 관련 대책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폐지 수집 노동의 사회적 가치? 폐지 수집 노동은 단순히 가난한 노인의 생계 수단에만 그칠까요? 제작진이 만난 노인들은 모두 자부심을 갖고 일했습니다.

[출처] 시사기확 창 <GPS와 리어카> 중



 

https://youtu.be/yzjKrSXsS_E?si=TLQRUwxLrm14t7lX


https://youtu.be/cvE8PIvRI2k?si=QUTf-uPc0PfNg3tX


https://youtu.be/TCQt41Nl4MA?si=5jBwIPBmpneQ8C1J


https://youtu.be/_kkDwtEKyIM?si=ist2-peQ73vt_fzo




매거진의 이전글 19,742원짜리 아파트(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