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Feb 12. 2024

내가 가장 평안할 때(10) 마이크 주의

마이크를 잡는다는 것은 투명 의자에 앉아 세상 평가를 받는다는 의미다

본글은 한참 전에 초안을 써두었던 것인데요, 조심스레 공유합니다






강단. 하늘을 의식하고 성경을 따라 말해야 할 시간. 깊은 경외로 단도리 되어야 하는 자리.


때론 자기 사사로움을 털어내며, 타자를 겨냥한 질시와 경쟁, 디스로 그 시간을 낭비한다. 나의 역사지식, 정치 식견,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전략한 강단. 흡사 사당화(나를 세우고 나의 감정과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는 일종의 자기 우상화이며 그 끝은 민심의 이반으로 드러난다.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다.





어느 날, 이웃 동네 봉사모임(은유적 가칭)-나는 적을 둔적이 없는-의 크리스마스 행사 영상을 보다가 눈이 머무는 대목이 있었다. 그날 진행된 좋은 행사에 (현장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 속상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청년들이 최근 들어 행사에 더 오지 않는다고 하며, 청년들의 불참을 아쉬워하는 것도 같았다. 그 봉사모임은 죄 고백적인 솔직한 공동체 문화로 나름 입소문이 던 터였다. 이에 대해서 주변 봉사모임들 간에는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그것은 각 봉사모임들의 경험적 한계 때문인 것 같았다.


가령 1970년대~2000년대 대학가를 풍미했던 정통 기독교에 입각한 대학생선교단체들은 대부분 크고 작게 죄 고백적 공동체문화가 있었다. 한국의 이른바 명문대의 표식인 SKY대 포함 전국 대부분 대학과 심지어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들에도, 크고 작은 기독교 대학생 선교단체가 크게 부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캠퍼스의 야릇한 유혹과 잔재미, 학벌 위주 성공 지상주의로부터 오히려 지성인들을 흡입하는 출구가 되곤 했었었다. 간증도 그랬다. 거짓과 위선, 언행불일치가 팽배한 기성세대와 기득권에 심각한 염증을 느꼈던 청년들은, 건강하고 진실한 공동체에서 그제야 숨통이 튀인다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 간증도 성경말씀에 대한 경외심에 기초했기에, 힘이 있었고 세상지식과 구별되는 능력과 근본적인 변화의 역사가 있었다.


동시에 막장인생을 산 사람들을 위해서 특화된 공동체가 세상 어딘가에 필요한데, 그러한 특수한 공동체를 세우려 한다면, 그때도 죄 고백적 공동체성은 필수적이 아닐까 싶다. 그 전부터 다른 공동체에 비해서 유독 심각하다랄 수 있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한 특수한 모임(가령 교도소 수감자, 사창가 등등)은 크고 작게 있어 왔다. 그런 공동체는 죄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은밀히 침투한 죄들이 재발해서 공동체의 순수성에 균열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말한 봉사모임은 이러한 대학생 선교단체들의 여러 장점들을 많이 체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봉사모임이 처음인 구성원들은 그런 유래를 잘 모르는지, 알아도 묵과하는지, 그 공동체가 처음 시도하는 죄고백 공동체 문화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어 보였다.  


그런데 이처럼 죄고백을 강조하는 공동체의 약점 또한 있다. 구성원들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 진실하고 성숙해지는 측면은 장점이나, 동시에 탑리더십을 포함 리더십에 대한 로열티(충성, 신실)에 대한 강조가 과도해져 자칫 의도치 않게 제왕적 리더십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탑리더십이 책망과 조언이라는 미명 아래 영적 린치(과도한 책망, 도를 넘는 인간적인 수치 드러냄, 처벌 등등)를 자행해도, 그것을 통제하고 쓴소리 할 사람들이 주변에서 점점 없어지게 된다. 대신 예스맨이나 칭송맨만이 즐비해질 수 있다. 리더십의 의견이나 명령에 반론을 제기하면 불순종한다는 묘한 뉘앙스로 흐르기 때문이다. 이 또한 과거 일부 선교단체가 앓았던 홍역이었다. 물론 지금은 권위주의 시대를 넘어 민주화를 이끌던 분들이 종교뿐 아니라 각종 기관의 탑리더십을 담당해서인지, 이런 후유증은 두드러지게 사라졌다.


앞서 말한 봉사모임의 공동체문화가, 선교단체들에서는 일상적이나 일반 동네 봉사모임과는 결을 달리해 오해를 사는 것이 안타깝고, 멀리서나마 응원하는 마음에 몇 년 전부터 가끔 그 공동체의 유투브 영상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아,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 대목이 자꾸 보였다. 나는 타인 대해서는 종교뿐 아니라 직장과 집에서도 대놓고 비판하거나 뒷담화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고 거이 대부분 못 하게 막는 편이다. 그렇기에 이 이슈는 지금 이 지면에서 처음 내 속내를 피력하는 것이다. 


내가 우려했던 것은, 중립적이어야 하는 강단에서, 리더십들이 자꾸 정치얘기를 하고 심지어 장황하게 정치에 결부된 역사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 주제나 이슈도 잠깐씩 예시는 들 수 있기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예시를 드는 정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마이크를 든 사람들이 잘 전해야 하는, 메인인 본 주제는 생명을 는 듯했고, 다른 이슈에 과도하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았다. 마이크는 어느덧 인간적인 얘기, 사담 내지는 정치, 경제, 사회, 역사에 대한 사견을 주장하는 장으로 흐려지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말미에 본 주제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꼭 하기 때문에 모양새는 주제를 전하다는 윤곽이었다.


문득 내가 대학생 때, 제자훈련 시 우리들의 멘토와 선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책망과 오버랩이 되었다.


"큐티(기독교에서 성경말씀을 기초로 하는 묵상)할 때, 자기 (개인사에 대한) 말만 하지 말고 성경본문을 중심으로 묵상(큐티)하는 자기 훈련을 해야 해요. 심지어 자기 얘기를 하나도 안 해도 성경이 말하게 해야 해요. 내 문제에 성경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지 말고, 성경이 나를 해석하게 해야 해요. 자기 얘기만 장황하게 하다 끄트머리에 성경말씀을 액세서리처럼 인용해서는 말씀으로 인한 변화는 어렵답니다. 그것이 말씀에 대한 경외심인 거예요."





바야흐로 성경이 종이 활자로, 앱으로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런 시대 어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성경을 자주 안 읽서만은 아닐 것이다. 성경이 나를 주도하도록 경청하지 않고, 성경을 나의 사견을 관철하는데 인용하는데 있지 않을까. 학생 때, 나와 동기들이 종종 들었던 조언과 책망은 지금도 서슬 퍼런 현재진행 중인 말씀이다.


종교뿐 아니라 주요 기관들 활동에, 이른바 개념이 있고 의식 있다는 총기 어린 청년들이 이탈하는 듯하다. 일부는 이를 청년들이 세상 잔재미, 연애, 성공주의, 취업 등에 빠져 이탈한다고, 문제원인을 단편적으로 보며, 청년들만의 문제로 치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70년대~2000년대 민주화 운동, 이념서적의 편만, 연애, 데모, 무한경쟁 성공주의, X세대가 넘쳐나던 때에도, 오히려 선교단체에는 몰려드는 청년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그 현장에서 그들 청년들과 소통했던 사람으로서, 그들이 왜 각각의 공동체들에 몰려들었는지 그 절실하고 절박한 이유를 안다. 인생이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자기 인생의 고통의 이유 등등 가정, 학교, 직장 등 세상 어디에서도 속 시원하게 찾을 수 없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지친 영혼을 이끌고 왔었던 것이다.  


종교인이 지적 유희에 빠져 종교가 줄 수 있는 본연의 샘물을 주지 못 할 때가 있다. 가령 종교인들이 강단에서조차 남들이 모를 지식을 알았다는 희열에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에 심취할 수 있다. 또 정치나 경제, 사회, 세계 등 세상사를 바라보는 기발한 통찰에 필이 꽂혀 그것에 과몰입해 설파하는데 몰두할 수도 있다. 이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또 그러다, 정작 진짜 전해야 할 본류를 놓친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본질에 유희를 느끼는 리더십 아래에서 청중들은 금세 눈치를 체며 회의와 갈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런 이야기는 TV와 유튜브, 학교나 책 등에 이미 빼곡하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평소에 기분 나빴던 유명인 누군가를 킬링하거나 어필하는 시간으로, 세상에 그 무엇에 분풀이하거나 특정인을 디스 하는데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보인다. 이른바 사당화의 진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강단이 사적이다 못해 자기 우상의 공간이 될 때, 젊은이들은 발길을 돌리며 사람들은 점점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성경을 또 하늘을 경외하지 않는 강단의 말은, 연쇄반응처럼, 사람들도 그 강단 마이크의 말을 경청하지 않게 된다. 이 도미노 연쇄반응은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며 또한 역사가 익히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비단 특정 종교나 공동체 또는 거대 담론의 이야기이겠는가. 2명 이상의 친구만 만나도 인용될 수 있다. 이 경우 그 기준이 종교가 아닌 각자가 지향하는 그 무엇이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힘이 생기고 영향력이 더해진다는 것은, 특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비하고 조심해야 하는 십자가가 더해지는 것임을 늘 되새기게 된다.






@별외 추신@

브런치를 쓰면서 가끔 무언의 여론을 느낀다. 종교에 속한 분들은 내가 큐티뿐 아니라 좀 더 친기독교적으로 모든 글들을 구성하도록 과하게 희망하는 의중을 느낀다. 그러나 브런치는 종교 플랫폼이 아니다. 또한 나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종교가 없는 분들을 아우르고 있고, 무엇보다 브런치 플랫폼의 특성에 맞춰 비종교적인 글들을 좀 더 많이 쓰고 있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사적 얘기를 하게 되고, 내 선행이나 잘 한 부분이 어필되는 부분이 있는데, 내 글 전체를 종교글로 오인하여 과한 요구사항이 있는 분들이 계시는 듯했다. 가령 이 공간에서 예수님을 오롯이 전하기 원한다는 등의 니즈 말이다. 다시 한번 환기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브런치는 통상 일반글을 좀 더 많이 다루는 플랫폼으로, 오롯이 종교글을 원하시면 오프라인이나 다른 종교 채널을 참고해 주십사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한다. 


반대로 종교가 전혀 없으신 분들은 내 글 속에서 종교색을 지우기를 원하는 뉘앙스도 느낀다. 그러나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뿌리에 종교(기독교)가 있는데, 그것을 번번이 지우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의 맥락이 자연스럽지도 않거니와 그 자체가 위장된 자아를 드러내게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양 극단의 요구 중 수용한 가능한 것은 겸허히 적용하되, 과도한 청구라 느껴지는 부분은, 독자분들이 눈치껏 자기 검열을 하시길 바래 본다(^^:) 사실 내 브런치는 구독자, 라이킷, 댓글을 안 하시는 다수의 독자분들이 읽고 있는 듯하다. 조회수는 항상 라이킷의 2~5배수 전후인 것을 보면 그런 추정을 하게 된다. 특정되지 않은 독자분들도 언제나 대환영하오니 편하게 오셔서 마음껏 누리시기 바래 본다.








*사당화(私黨化) : 사사로운 목적을 위하여 모인 무리로 바뀌게 됨



# 직업상 말로써 많은 사람과 소통한다. 오늘 큐티는 새해를 맞아 이런 말에 대해서 경각심을 주는 말씀이었다. 말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심사숙고해야 함을 다짐했다.



[생생큐티] 2024년 2월 9일(금)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사사기 11장)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입다( Jephthah)

‘그는 연다’는 뜻. 길르앗 지방에서 아버지 길르앗과 기생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로서 큰 용사였으며(삿 11:1)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이스라엘의 제8대 사사가 된 사람(삿 11:29; 삼상 12:11). 그는 서자(庶子)라는 이유로 이복형제들에 의해 쫓겨나 돕 땅에 살면서 잡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삿 11:2-3). 그러다가 암몬과의 전쟁이 임박하자 길르앗 장로들의 요청에 의해 이스라엘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이스라엘의 통수권을 부여받고서 적군을 물리치게 된다(삿 11:5-33). 그 와중에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입다가 서원을 했고(삿 11:30-31), 그 약속 때문에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삿 11:34-40). 그 뒤 그는 에브라임과의 내전에서 승리하고 6년 간을 다스린 후 죽어 길르앗에 묻히게 된다(삿 12:1-7).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믿음의 영웅 대열에 함께 기록하고 있다(히 11:32).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입다 [Jephthah]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사사( 士師 , judge) : 이스라엘 지도자 여호수아 사후부터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등장 때까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이스라엘의 군사, 정치 지도자(사사기 2:16-18).   (참조글 : 사사 (naver.com))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습니다. 그리고 어수선한 사사시대에 한 명의 사사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기구했습니다.  


1절 b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 기생이라는 직업은 시대마다 또 나라마다 동일한 호칭이나 역할이나 위상, 색깔 등 다소 차이가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사회 미풍양속상 터부시 하며 결코 대놓고 자랑할 직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고래로 종교사회였기 때문에 성과 품행단정에 민감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입다가 기생의 아들이 되었는지 또 이후 첩 내지는 후실의 자식으로 남의 가정에 애물단지 같이 자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태생적으로 불후하고 석연치 않는 그가, 이스라엘 사회의 기득권층의 핵심이랄 수 있는 용사 내지는 사사로 발돋움하기까지, 파란만장 했을 그 인생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큰 용사였다는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전쟁 군인으로서 용맹과 업적 하나는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전쟁에 기여했으나 본처의 자식들이 입다를 인정하지 못 하고 멸시하고 견제하니, 입다는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며 이른바 사회의 양아치 등 알 수 있는 잡류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암몬 자손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길르앗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지역 곧 길르앗의 장로들이 와서 입다에게 우리의 (전쟁) 장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입다가 길르앗을 떠난 또 다른 이유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그것은 길르앗 장로들조차 입다를 미워하여 그의 아버지 집에 쫓아내는데 일조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설왕설래가 한참이다가, 입다는 전쟁에서 이기면 길르앗의 우두머리 자리를 주겠다는 장로들의 제안에 장관으로서 전쟁에 참여하고자 결단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입다에게서 이상한 점 하나를 들추어 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던 입다가 바로 다음 순간 어처구니 없는 서원을 합니다. 즉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에 대한 결의를 어필하려던 것이었는지, 전쟁하고 돌아오는 날 자신을 처음 영접하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물(사람을 죽여 불로 태워서 제물로 드리겠다는 의미)로 드리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는 그를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으로 인하여 항상 사리분별을 잘 하고 그가 하는 일은 다 옳게 흘러갈 것이라 추측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 곧 신약으로 치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도 전혀 엉뚱한 길에 들어설 수 있고, 치명적인 잘못을 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서는 이에 대해서 경고의 말을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즉 그가 누구든 성령이 충만하고 스피릿이 충천하여 두려울 것이 없고, 스스로 경건생활 등 모든 면에서 잘 나가고 있을 때,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늘 기생의 아들, 첩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로 고통했던 입다였습니다. 그런데 암몬 자손과의 전쟁 앞에서, 육적으론 길르앗의 실세인 장로를 포함해 온 백성의 우두머리 자리를 보장 받았고, 영적으론 하나님의 영이 강력히 임한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는 따놓은 당산 같았을 것이었습니다. 이에, 급기야 기고만장해져,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적 분별력이 제대로 있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서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입다는 영육 간의 절정의 때에 더욱 붙잡았어야 하는 ‘조심’을 놓치므로, 자기의 외동딸을 번제물로 드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죄를 세상 가운데 치욕적으로 들추어 후세인 우리에게까지 들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다면 더욱 해야 할 일은 영육 간에 자기를 돌보는 일 곧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면 마구 돌진하면 된다고, 그것을 에너지 드링크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했다는 것은 그런 돌진하는 에너지를 부여 받는 것임 동시에, 더 많은 경우 고성능 영적 청소기를 선물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 청소기를 통해서 나를 더욱 점검하고 조심하는 것, 그것이 인간인 내가 할 소임입니다. 그럴 때 전쟁의 승리와 결실은 오직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승리가 독이 되어 나를 교만하게 하거나 다른 죄의 단초를 제공하는 대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우는 일에 쓰임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문장을 주문처럼 외운다고 되지 않습니다. 그에 합당하게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6:46)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증거를 드러내려고 또 내가 힘과 능력, 지식이 많다 하여, 만용을 부리기 쉬운 인간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말씀 능력을 뽐내고, 기도응답을 과도하게 자랑하고, 경건을 대놓고 드러내므로 우월감에 잡혀있는 등등 영육의 절정기에 걸려 넘어지기 쉬운 덫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충만할수록 더욱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나를 더욱 조심하여 단속하는 것이며, 나를 둘러싼 주변이 조심하도록 기도하고 이끄는 일입니다. 제가 이 문제에 누구보다 취약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를 기억하므로 날마다 조심하므로 더욱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1 길르앗 사람 입다는 큰 용사였으니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그의 아들들을 낳았더라 그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3 이에 입다가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

4 얼마 후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니라

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오려고 돕 땅에 가서

6 입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암몬 자손과 싸우려 하니 당신은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라 하니

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하니라

8 그러므로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온 것은 우리와 함께 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하려 함이니 그리하면 당신이 우리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매

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 주시면 내가 과연 너희의 머리가 되겠느냐 하니

10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에게 이르되 여호와는 우리 사이의 증인이시니 당신의 말대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리이다 하니라

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를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아뢰니라

12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들을 보내 이르되 네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땅을 치러 내게 왔느냐 하니

13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사자들에게 대답하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내 땅을 점령했기 때문이니 이제 그것을 평화롭게 돌려 달라 하니라

14 입다가 암몬 자손의 왕에게 다시 사자들을 보내

15 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6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광야로 행하여 홍해에 이르고 가데스에 이르러서는

17 이스라엘이 사자들을 에돔 왕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청하건대 나를 네 땅 가운데로 지나게 하라 하였으나 에돔 왕이 이를 듣지 아니하였고 또 그와 같이 사람을 모압 왕에게도 보냈으나 그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가데스에 머물렀더니

18 그 후에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서 모압 땅의 해 뜨는 쪽으로 들어가 아르논 저쪽에 진 쳤고 아르논은 모압의 경계이므로 모압 지역 안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19 이스라엘이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당신의 땅으로 지나 우리의 곳에 이르게 하라 하였으나

20 시혼이 이스라엘을 믿지 아니하여 그의 지역으로 지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을 모아 야하스에 진 치고 이스라엘을 치므로

21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혼과 그의 모든 백성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시매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그 땅 주민 아모리 족속의 온 땅을 점령하되

22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족속의 온 지역을 점령하였느니라

2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아모리 족속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셨거늘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옳으냐

24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25 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26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 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29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사사기 11:1-40)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가장 평안할 때(9) 필요없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