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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Dec 04. 2023

축! 여우주연상 수상

드디어 생애 첫 연기상을 받았습니다


나는 2023년 11월 29일 생애 처음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날, 날씨가 추워지면서 감기가 왔는지 몸은 으슬으슬하고 기분도 꿀꿀했다. 내친김에 연차를 내고 재택근무 핑계로 천재네 집에 갔다. 그도 그날은 국가 OO 프로젝트 최종보고서 제출기한을 맞아, 집에서 노트북이 부서져라 열심히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점심식사 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천재와 손을 잡고 집에서 걷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날이 추워지면서 천재의 다이어트는 거실과 부엌 길을 따라 재택 산책으로 전환됐던 터다. 그의 슬럼프 기간 스트레스성 폭식으로 20kg까지 찐 살은 이제 10kg 가까이 빠졌다. 천재네 집은 서울에서 상당히  곳이다. 그의 아파트는 굉장히 넓은데 주요 수도권에 비하면 평수 대비 가격이 상당히 저렴하다. 나는 집값 비싼 서울과 안양 초입에서만 살았는데, 나이 들면 한갓진 외곽에서 살고 싶어졌다.


천재는 나랑 손 잡고 걸을 때가 참 좋다 한다.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하는 그이기에, 그날도 대놓고 말했다.  


"너랑 이렇게 손 잡고 걸으니깐 좋다."

"그렇지? 나도 좋아"


우리는 이때 대화도 많이 하고 장난도 많이 다. 내가 가끔 짓궂게 장난친 후 득의한 표정으로 박장대소하며 웃으면 천재는 종종 말한다. 패자의 반격인양 말이다.


"이히히히히"

"왜 그렇게 사악하게 웃어?ㅋㅋ"


내 개그본능은 이에 멈출쏘냐 또 맞대응한다.


"한번 사악(邪惡)의 맛을 볼래? 사(하악)~학 사(하악)~학"


나는 흡사 고양이의 하악질이나 방울뱀의 쓰읍 소리와 비슷한 동물 성대모사를 신이 나 퍼부어 댔다.


"뭐든 다 삼킬 것 같은 사학(악) 질이지? 어때? 무섭지?"


그렇게 몇 초간 사학질 내지는 하악질을 해대니깐, 천재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와, 연기를 아주 잘한다. 그럼 연말도 됐으니깐 여우주연상 줄까?"

"어, 정말? 오, 좋아! (안 그래도) 올여름에 나 생애 처음으로 연기도 했잖아. 상금도 주어야 하는 거다"


나는 사실 올해 모 모임에서 늦깎이로 연극에 캐스팅되어 연기를 해봤다. 그것도 생애 처음으로 말이다. 초등학교 학예회나 교회 문학의 밤에도 못 해본 나름 준 주연급이었다. 다행히 15분 안팎의 단막극이었지만 말이다. 봉사나 재능기부가 아니라면 직장일이 몰아치는 시즌엔 시도도 못 할 일이었다. 출퇴근 시간이나 이동시간에 대본을 외우고, 여러 번 출연진과 대사 맞추고, 리허설까지 해야 했다. 출연 개런티요? 출연료는 무료였고 게다가 간식도 내 사비로 사서 대령했다. 이제야 말하지만 4학년에 주연 배우 따내기가 쉽지 않다. 인생에 공짜는 없다.


천재도 내 생애 첫 연극 연기를 응원해 주었다. 그는 과거 학생 때 응원단장, 무대에서 색소폰 연주, 사진동아리 창설 등 공부뿐 아니라 다방면에 특출 났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연극 연기 딱 한번 해보고는 내내 연기자 행사를 했던 것이다. 나 이래 봬도 (연극) 배우 데뷔한 사람이야 라면서 말이다. 그가 보기에 나의 이런 모습이 되려 웃픈 예능이었을 테다.

 

그런데 천재는 이를 그저 지나가는 빈말로만 받지 않았나 보다.

 

"그래? 그럼 정식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하자"

"상금 진짜 줄 거야?"

"그럼 상금을 주어야지"

"나에게 믿음과 감사를 가르쳐 준 사람에게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러면서 아카데미 시상식을 준비하자 한다. 상금의 수위를 주거니 받거니 조절했다. 급기야 아주 목돈 100만 원에 낙찰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20만 원으로 시작했는데, 내가 이왕이면 더 쏘라며 졸라서 고가의 상금을 따낸 것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간소하게나마 바로 진행되었다. 시상식 통장으로 상금도 입금됐다.




사실 그 전날, 조카 진국(조카 가명)이에게 생활비 조로 또 80만 원을 송금해 준 터였다. 통장 잔고가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쩜 나의 감기는 마음의 감기가 아니었을까.


이제 30대 초반인 진국이는 올봄 사업실패로 폐업하면서 남은 부채로 자칫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다. 다행히 사업규모가 작아서 누적 부채는 크지 않았다. 올해 여름 어느 새벽, 자살충동을 암시하는 카톡을 남긴 진국이. 밝고 씩씩해서 우울감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아이라, 나는 많이 놀랐다. 운남(친오빠 가명) 오빠는 올봄 반포로 이사 가면서, 수원에 자가 아파트를 팔려고 내놨지만 안 팔려 현금이 모두 동결되어 빠듯해졌다. 오빠는 신혼 때부터 내내 영끌 부부의 하우스푸어 전형을 살았다.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 집 7남매 모두 각자의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삶이 빠듯했다.


그나마 싱글이고 나름 연봉이 두둑한 내가 여유가 있다 해두어야 했다. 그즈음 천재와 돈을 모아 성남에 전세 끼고 집을 사두었고 통장엔 현금이 조금 남아있던 터였다. 그렇게 수중의 현금과 카드론까지 동원해 4600만 원 넘게 쏟아부어, 조카의 부채를 갚아주고 월세 집까지 구해줬다. 그즈음 진국이의 엄마이자 나의 넷째 언니 역시 고관절에 괴사가 일어나, 인공관절 수술을 받느라 돈을 벌 수 없었다. 언니는, 자기 아들의 힘듦을 목도하면서도 빠듯한 엄마로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언니는 최근엔 목 디스크까지 와서 수술비 2000만 원을 진단받았다.


어릴 적 달동네 우리 가족, 내 아버지의 알코올 가정폭력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인 진국이의 엄마. 그녀의 삶은 내내 가난했고 자주 처절하게 벼랑 끝으로 내밀리곤 했다. 이 모자의 벼랑 끝 인생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코로나 때도 자영업에 종사했던 언니는 과반수 일을 못 했다. 그때도 두 모자에게 2300만 원 넘게 생활비를 지원한 것은 나였다. 그것도 빌려준 게 아니라 그냥 주었다. 빚을 아야 한다는 압박감, 어렸을 때 엄마를 보며 진절머리 나게 경험했던 , 그 고통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짐 지우기 싫었다. 코로나 기간 나의 직장일은 내내 호황이었지만 꼴통 마귀할멈의 장난처럼, 나의 통장 잔고는 이상하게도 차오르면 이내 뚝 떨어져, 몇백만 원 아래에서 그달 그달 치열하게 살아야 했다.


진국이는 올초 사업실패를 딛고 최근엔 모 자격증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저번달 11월부터는 모 직장에 팀장으로 취직했 다음 달부터는 자립이 될 테다. 그러나 넷째 언니의 디스크 수술비는 어쩌나. 아직 위중하진 않아 수술은 내년으로 미뤘다.


내 아버지가 상속처럼 남겨 준 우리 7남매 인생에 떠맡겨진 상흔들. 나는 그것에 무너지거나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일련의 사건들 앞에서 잠시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하거나 손해 봤다 생각하진 않는다. 누군들 빠듯한 삶을 일부러 자초하진 않았을 테니깐. 내가 남들보다 좀 더 돈을 잘 벌 수 있다면, 그 또한 사명이고 책무라 하 않는가.


실은 이 일련의 일들을 천재도 상당히 잘 알고 있다. 우린 서로의 사정에 대해 굉장히 솔직하고 대부분 투명하게 공유한다. 여름에 진국이로부터 자살 암시 카톡을 받고 놀라서, 제일 먼저 알린 사람 중 한 명도 천재였다. 나는, 가족들은 물론 밖에서도 의연해서 누구도 내가 지쳤는지 모를 그때. 천재 앞에서도 의연했지만 그는 이내 나를 읽어내고 말았다. 천재는 그때도 자발적으로 도움을 일부 주었다. 


내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의 루틴이 명확했던 40년 넘는 내 인생. 고등학교 때부터 새벽 5시 전 기상은 기본이었고 평균 수면시간은 5시간 이내였다. 직장인으로, 좀 더 치열한 전쟁터에 던져진 후인 십수 년 전, 그때부터는 새벽 3시~4시에 기상했다. 그때 일어나 기도하고 묵상한 후 5시부터 출근 준비를 했다. 야근한 날은 가끔 늦게 일어날 때도 있지만 말이다. 그렇게 삶은 치열했지만 어쩐지 내 삶에 나는 주연이 아닌 것만 같았다. 주연이 아닌 것은 좋다. 내 인생이란 연극에서 나는 점점 무대에서 밀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설 자리가 어디일까.


천재는, 내 인생에 내가 아니라 타인이 주연이 된듯한, 그간에   애잔하게 보는 것 같았다. 나의 처지를 아는 몇몇 사람들도 말했다. 내가 가족과 타인들을 위해서 너무 쏟아부으며 사는  아닌지, 이젠 자기 인생을 살라고 말이다. 꽃다운 나이, 20대부터 그간 멋진 남성들의 대시도 있었고 몇 번 만나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내 가족과 타인에게로 시선이 가라앉곤 했다. 나의 청춘은 써보지도 못하고 증발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후회는 전혀 없다. 나는 이 조연급 삶을 충분히 누렸고 내내 감사했으니 말이다. 청춘을 꼭 남들과 비슷하게 소비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내 낯빛을 잘 읽어내는 천재. 그와 연애를 하며, 그 역시 그런 나에 인생의 주연급 타자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하곤 했다. 조울증으로 집 밖엘 나가지 않는 그를 햇빛 가득한 세상으로 끌어내고자, 드라이브를 잘 해주면 '모범택시 상금'이라며 시세 대비 2배의 요금을 포상처럼 주었다. 그는 슬럼프기간 학습장애가 와서 영화 한 편, 책 한 권도 끝까지 봤다. 그땐 5분~10분짜리 고전 영상을 보면 1편당 1만 원씩 상금을 걸었다. 천재가 컨디션이 나아질 때까지 몇 편의 고전 영상을 봤는지는 비밀이다. 그에 상응하는 상금을 수여하다 내 집 기둥 뽑힐 뻔했다는 힌트만 남긴다. 또 불면증이 심해 수면제 의존도가 높은 천재. 수면제와 기타 의존하는 약물의 양을 줄이면 그에 대해서도 포상을 했다. 그 시절 그는 자주 우울해하며  "죽고 시퍼"를 입에 달고 살아 나를 불안하게 했다. 이제 그는 그 말을 끊은 지 한참 됐다. 그간 의존하던 약물들도 많이 줄었다. 수면제는 아예 끊었고 우울증 약만 먹는다. 올 가을, 천재의 오랜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11년간 복용했던 우울증 약도 잘하면 끊어도 되겠다 말씀하셨다.


그랬던 천재가 그날 말미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내가 가끔 상 줄게. 기대해"


그리고 입에 아빠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 잇는다.


"항상 네가 주는 상만 받다가 나도 상을 주니깐. 기분이 너무 좋다."

"기분이 좋아?"

"응, 너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게 감사해"


우리는 그날 손을 더욱 꽉 잡고 거실과 부엌을 걸었다. 그때 때마침, 정말 드라마처럼 첫눈이 왔다. 올해 첫눈이 언제 왔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가 눈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니, 첫눈이 맞을게다.

                                                                                                               

첫눈 오던 그날, 나는 삶으로 이미 로맨틱 영화의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이다. 하늘도 나의 상을 기뻐하는 듯 온 세상에 새 하얀 금빛 가루를 뿌려 주셨다.  





    
           




※저희 짝꿍 천재(가칭)는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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