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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Dec 14. 2023

별나라 외계인 여친

 연애를 책으로 배운 여자(1) 혼인서약서

올해 12월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천재와 내가 좋아하는 짬뽕밥을 먹었다. 한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고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을 틀어놓고 함께 재택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내가 검지손가락을 내밀며


"너 뭐 할 거야?'

"응?"

"ET 할 거야? 사람 할 거야? 이번엔 양보하지?"


나는 ET영화의 손가락 장면을 연신 연출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이때 천재도 마저 검지손가락을 내밀면, 한 게임이 끝나는 그런 구조다. 근데 이 날은 천재가 딴생각을 했던지 바로 리액션이 없자 채근이 들어갔다.



"뭐 할 거냐고?"


천재는 심드렁하다가는 이내 눈빛을 반짝이며 반격했다.


"그냥 신과 사람으로 하자."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이자 화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그림으로, '아담의 창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작품을 알지 않는가. 그 그림의 장면을 패러디하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장난을 이번만 서너 번째 하는지라 척하면 척하고 안다.


"오? 그거 좋다. 잉, 그런데 신(을) 하는 사람은 좀 부담스럽지 않을까."

                                                                                                          

우리는 몇 번 했던 장난임에도, 그날은 배역을 정함에 있어 부담과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래 어정쩡한 침묵은 이내 ET도 God도 아닌 사람의 일상으로 재빨리 넘어왔다.


나는 연말이 되면 이른 시기부터 크리스마스 트리를 한다. 코로나 때는 10월 말부터 다음 해 1까지 근 3개월간 했고, 작년부터는 11월에 해서 다음 해 초까지 크리스마스 트리를 둔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미다. 사실 나는 가요나 팝송을 잘 안 듣는다. 보수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라, 중.고등학교 때는 가요나 팝송을 들으면 날라리 신자인 줄 알았다. 지금은 그런 율법 때문이 아니라 요즘 가요나 팝송의 트렌트나 가사가 버거워서 꺼린다. 나마 올드 팝송이나 올드 가요는 아주 가끔 듣는다.

 

그러나 사람들과 함께 할 땐, 나는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며 그들을 더 많이 맞춰주는 편이다. 기독교 초신자인 천재, 그는 팝송을 포함 음악의 달인이기도 하다. 원래 취지대로라면 크리스마스엔 교회 성가를 틀어야 하지만 그의 취향을 맞춰 팝송풍 캐럴을 틀었던 것이다.


그날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에 맞춰 손 마이크를 하고 오버액션으로 립싱크를 하던 나.


"잉, 미워"

"왜?"

"머라이가 영어로 해서 립싱크하기가 어렵잖아"

"양키가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는데?"

"너 누구 편이야? 머라이 편이야, 내편이야?'


아빠 미소로 말한다


"너 편이야"


아빠 미소 가득하더니 한마디 덧붙인다


"세상에 머라이어 캐리랑 자기, 둘 중에서 고르라는 사람은 처음 봤다."






생각해 보건대, 고르기 어려운 것으로 치면 우리의 연애 시작 자체였을 테다. 내가 40세 넘어서까지 사실상 모태솔로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노처녀 히스테리나 꾀죄죄한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을 연상하진 마시라. 내 친조카들도 어른들 중에 해맑은 사람은, 자기들 인생에 '이모'가 처음이라고들 한다. 봉사모임에 가서 어린 학생들과 놀아줄 때도, 들보다 내가 더 웃기고 재밌다고들 한다. 애늙이 대 어른 아이 중, 나는 심성에서는 단연코 더 젊은 듯하다.


그런 나의 연애 난독증으로 천재가 고생한 얘기를 하자면,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룰 테지만 오늘은 하나만 오픈하겠다. 설마 우리가 이 나이에 전혀 스킨십이 없진 않았겠죠? 진도는 묻지 마세요. 대략 이 대목만 듣고 상상하시기 바란다. 내가 책에서 읽기를, 연애의 초반은 손잡기이고 그 다음은?


'으히으히. 몰랑'


나는 봉사모임에서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교육 관련 보조교사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배운 (적어도 종교인의) 연애의 정도(正道)는 이랬다. '유희적이고 난잡한 연애를 경계하며, 되도록 결혼할 적령기가 돼서,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를 하라'는 것이며, 나 역시 것이 건전한 연애관이라는 결론이었다.


나는 '손잡기 다음'이란 달나라 상상을 하며, 연애의 정도를 구현하기 위해서, 회사에서 '혼인서약서' 샘플을 검색해 열네댓 콘셉트별로 프린터해 놓았다. 그리고 천재네 놀러 갈 때 갖고 갔다, 비닐파일로 정중하게 고이 싸서 말이다. 


그리고 TV 보며 화기애애하던 어느 지점에, 천재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자기도 알다시피 혼전순결주의자야. 더 이상의 스킨십을 하려면 (우린) 결혼을 전제로 해야 해. 자기가 지금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그게 어려워 보이니 그럼 혼인서약서에 사인이라도 해줘. 그렇지 않고 스킨십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사귄 지 얼마 안 됐는데, 혼인신고 해야 스킨십을 허용하겠다 할 수도 없잖아?"


네, 그렇습니다. 천재는 이때부터 나를 계속 사귀여야 하나 고민했고, 저도 이 만남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스킨십과 혼인서약서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떽쥐! 음흉한 사람들. 우리 나이와 처지에 누가 봐도 공감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말해 두겠다. 물론 얼마 안 가서, 그는 내게 아름답고 청아한 다이아 반지를 선물로 주며 말했다. 


"지금은 (반지의) 알이 작아. 다음에 (정식) 청혼할 때는 알이 더 큰 걸로 () 해줄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그림 '아담의 창조' 중 한 장면


혼전순결.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에서 시각차가 첨예한 주제중 하나다. 이 주제로 글을 쓰자면 책 한 권이 족히 나올 것이다. 그렇게 세속과 수도원 사이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나, 그런 내가 40세가 넘도록 혼전순결을 지키며 견뎌야 했던 무언의 시선들.


'멀쩡하게 참한데. 뭐, (몸이나 정신 등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

'혹시 (여자) 동성애자 아니야. 안 그렇고는 (멀쩡한 외모와 직업에) 저 나이에 연애도 제대로 못 하고 혼전순결이 무슨 자랑이라고'


한 번은, 모 예방주사 맞으러 회사 근처 강남의 한 산부인과에 들렀을 때 일이었다. 50대 중반에 강남토박이로 보이는 고학력의 여자 산부인과 의사. 그녀는 문진 중 혼전순결을 긍지 어리게 말하는 나를 보고는 '더 나이 들기 전에 즐겨요'라는 식의 묘한 뉘앙스의 말을 했다. 동시에  '한심하다'는 그녀의 시선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얼마나 여자구실을 못하며, 여자로서 성적 매력이 없으면 그러냐'는 눈빛 같았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반대의 시선들도 익숙하다.


'에이, 뻥. 요즘 세상에 특히 저 나이에 혼전순결 지키는 사람이 어딨어?'


내가 대학 때 접했던 자료에 의하면, 미국 크리스천 남성들조차 과반수 이상이 음란물중독 경험이 있다 한다. 심지어 기혼인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 그 해악이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라는 통계 자료였다. 한국은 많이 다를까? 비종교인뿐 아니라 종교인들조차 가끔은 관음증 환자처럼 '순결'에 대해서 헤아리며, 이중언어와 모순에 빠져 드는 세상을 가끔씩 느낀다. 아니 이를 예상하고 죽을 고생으로 혼전순결을 지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말이다. 삶으로, 그들에게 엄중하게 말하고 싶은 그 무엇을, 오랫동안 숨 고르듯이 참으면서 말이다.


'저 나이에 순결은 지킨 거야?'


이 대목에서 순결을 지켰다 하면 '바보 맹추'가 되고, 못 지켰다 하면 '정조 없는 여자'가 되는, 그들의 비릿한 시선. 모의하듯 은밀한 언어를 발산하는 세상을 관망하며, 그들의 위선과 이중잣대에 그만 빡쳐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여자주인공의 한 대사를 남몰래 애드립 칠 때도 있었다.


'너나 잘하세요! 종교인이면서도, 부모님 몰래 또는 아내나 자식 몰래, 가끔 혹은 자주, 보는 그 음란 동영상이나 끊으시고요.'


나는 학생때부터 10년간, 대학생선교단체에서 평신도로 봉사하면서 오랫동안 지켜봤다. 독실한 남성 크리스천들조차 대학생 때는 물론 졸업하고도, 얼마나 음란물에 취약한지 아니 그 이상의 문제들로 넘어지는지 말이다. 물론 여성도 예외는 아니지만 남성들이 이 문제에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관음증 환자처럼 타자들을 여유롭게 판단할 그 시간에, 더욱 자신에게 정직하며 죽을 때까지 얼마나 정욕의 문제를 씨름해야 하는지를, 요즘도 진실한 남성 크리스천들의 간증을 들어 알고 있다. 유투브를 검색하면 오늘도 많이 올라온다, 이런 진정어린 종교인들의 간증 사연은 말이다.


천재로부터 아직 재가가 안 나서 세밀하게 다룰 순 없지만, 천재의 야구동영상(일명 '야동') 고해성사와 끊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길다. 우린 대부분 서로 숨기는 것 없이 투명하고 그래서 관계가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다. '죄가 없다'가 아니라 '죄가 있으면 빛 가운데 드러내 함께 씨름하는 것', 그것이 가식이나 위선이 아닌 진실하고 겸손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정도(正道)이다.

 




천재는 종종 말한다.


"연애를 책으로만 배운 여자와 사귀는 거 진짜 힘들어? 자기 알아?"

"어, 알지. 그래서 늘 (연애 난독증) 수렁에서 건져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어."

"아니(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진짜 주변에 물어봐봐. 내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사실 연애 초기에 천재가 불현듯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연애할 때) 어떻게 해주면 좋아?"


연애가 사실상 처음인 여자를 배려해 준 젠틀하고 정감 어린 질문이었다.


"음.. 우리 집에 연애 성자(聖者)가 있어. 셋째 형부, 친오빠(운남). 난 그런 것만 보고 자라서, 남자는 다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거든"

"그니깐 어떻게 해주는 거 좋아해?"
"션이나 최수종이 내 연애의 롤모델이긴 하지. 근데 그렇게까지는.."


천재는 속으로 '연애를 책으로만 배운 여자 맞네' 하는 표정으로 립서비스를 이어갔다.


"뭐가 어렵겠어. 그까짓 거. 해준다. 최수종, 션!"


당시 천재는 심각한 슬럼프로 인생의 최저점을 찍던 시기여서, 가끔 버럭이 비집고 나오고 우울함 그 자체였던 때였다. 그래 나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아무 말 대잔치'처럼 그냥 던져 본 말이긴 했다.


이 얘기를 그즈음 내 고등학교 동창들 식사모임에서 얘기했더니, 사방에서 야유와 폭소, 책망이 몰려왔다.


"야야, 너가 정신이 있니 없니? 니 나이를 생각해. 그 나이에 2살 연하 남자만으로 감지덕지지. 최수종과 션이 뭐니? 최수종과 션이. 얘가 참 정신이 없네."   


나는 이 대목에서 욕을 얻어먹어 마땅하다 생각하면서도, 지들이 왜 더 성을 내는가 싶었다. 나는 동창모임 후 그 주말에 천재에게 쪼르륵 이 여론을 전달했다.


그랬더니 천재가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말한다.


"자기가 친구들은 잘 뒀네. 아주 훌륭한 친구들이야. 속이 다 시원하네"

"지금 친구들 편드는 거야?"

"친구들이 바른 말을 하자나"

"그럼 최수종, 션 처럼 하겠다는 말 무르는 거야?"

"아니, 최수종, 션이 뭐가 어렵다고. 해준다고"


그러나 그가 최수종, 션처럼 하기 전에 늘 또 더 자주. 나는 그 두 남정네들보다 직위가 높은 왕자처럼 천재를 우대해 주었다. 천재는 내가 자기를 왕자처럼 대하는 것을 익히 안다. 처음에는 '왕처럼 대한다'라고 표현을 했으나 왕은 하늘에 계신 분의 직위이기에 왕자로 직함을 낮췄다.


그리고 나는 자주 말했다.


"내가 왜 자기를 왕자처럼 받들듯이 '네네' 하면서 대해주는 줄 알아?"

"..."

"여러 번 얘기 했자나. 이젠 외워야지. 자기가 왕자가 돼야 내가 공주가 되고 또 나중 왕비로 승진하잖아."


천재는 이 대목에 이르면, 딸내미 재롱 보듯 얼굴에 또다시 미소가 진다.


천재는 난생 처음 만난 별나라 외계인 캐릭터 여자를 자신의 여자 친구이요, 애인, 장래엔 공주와 왕비로 간택하는데, 고뇌가 있었을 거다. 그에 선택의 기로는 엄중했다. 그러나 그는 자주 그 선택을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요즘도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래 오래 살아야 해.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나한테 딱 붙어서"


그럼 나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답례한다.


"알아, 알아, 벽에 똥 바를 때까지. 아참, 똥은 더럽다. 찌찌. 아무튼 90세, 100세까지 딱 붙어 있을게"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이 고음의 절정을 이루며, 연말 천재네 집은 한층 설레는 풍경이다.

                                                                           





※저희 짝꿍 천재(가칭)는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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