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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Dec 28. 2023

먼저 사람이 되어라  

어머니의 교육철학은 숭고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때 일이었다.


그때는 한 반에 아이들이 많아 수업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후반 일 때, 조금 일찍 가면 이른바 스탠드에 앉아서 기다리다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학년 초라 어머니가 학교까지 데려다 주곤 하셨다. 내가 스탠드에 앉은 것을 보시고 어머니는 학교 교문으로 가던 차였다. 내 옆에 같은 반 남자애가 신주머니로 자꾸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난 그때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던지라, 아무런 대구도 못 하고 겁만 집어 먹고 있었다. 때마침 어머니가 교문 근처에서 이 광경을 보게 되었나 보다. 단걸음에 다시 돌아온 어머니는 남학생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셨다.  


"넌 왜, 누가 때리는데도 마디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가만히만 있니?"


내가 책망받을 일인가 하다가 이내 희한하다 생각했다. 지금 어머니의 말씀, 그것은 그녀의 교육방침 아니 삶의 방식과는 궤적을 달리 하는 것, 그래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작 어머니 자신은, 누가 한 대 때려도 가만히 당하고 마는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학생때 포함 지금까지, 나에게 단 한 번도 "공부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아니 우리 7남매 모두에게 동일하셨다.


어머니는 무학이시다. 학교를 한번도 안 다녔기에, 글을 읽거나 쓰지 못 하신다. 6.25전쟁 전엔 부잣집 막내딸이었는데, 6.25전쟁 전후로 가세가 기울었고 그즈음 아버지도 돌아가셨나 보다. 어머니의 엄마 즉 외할머니는 이내 재혼을 했고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외할머니 곧 내 증조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것도 고약한 할머니 밑에서 말이다. 어린아이를 1년 내내 목욕도 못 하게 했다 한다. 머리가 떡질 때까지 말이다. 거이 방치했고 동시에 고된 집안일을 맡겼다 한다. 어머니는 몸종처럼 8살 때부터 밥 짓고 빨래를 했다 한다. 그렇게 고생했으면, 나중에 결혼할 때 시댁 인복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시어머니도 고약했고 남편은 술만 먹으면 돌변하는 야수였다. 그랬다. 그녀의 인생은 내내 고통과 질곡의 연속이었다.

 




오빠의 예비 아내 곧 며느리감이 왔을 때, 모두들 그녀의 화려한 스펙에 집중하고 질시하다가, 때론 의아해하며  '저 커플이 아니 저 예비부부가 오래 가겠어?" 는 기류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오빠는 공사에 다니곤 있었지만, 장가갈 당시 모아 놓은 돈이 100만 원도 안 됐을 거다. 최근에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를 소재로 브런치에 '운남시리즈'를 쓰고 있다고 말이다. 브런치 링크도 보내줬다. 이렇게 비밀을 오픈한 이유는, 오빠 이야기인데 팩트가 소진되어 조만간 인터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오빠가 슬쩍 얘기를 해주었다.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나 장가갈 때 통장에 돈만 없었던 게 아니야. (우리 집의 오랜 누적 부채인) 빚도 4500만 원 내가 떠 고 (장가) 갔어"


나는 올케언니와 내내 친했다. 올케언니는 내가 직장을 잠시 쉬고 심리대학원 공부한다고 할 때, 선뜻 500만 원을 후원해 주었다. 재작년에는 언니가 샀다 거이 입지 않았던 검정 롱패딩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몇 년 전엔 커다간 검정 가죽가방도 보내 주었다. 언니는 유독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언니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그녀의 행보는 여타 여자 청년들이 흉내내기 힘든 희생과 손해의 연속이었다. 특히 결혼에 있어 배우자 선택이 절정이었다. 올케언니네도 당시 넉넉하지 않았기에, 언니도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입신양명에 목말랐던 차였다. 당시 올케언니에게 들어오는 선자리마다 의사, 검사, 변호사였다는 후문도 들었다.


얼마든지 부잣집에, 더 잘 나가는 남자를 충분히 만날 수 있었던 올케언니. 그녀는 가난한 집 장남에, SKY대도 아닌, 키도 크지 않은 나의 오빠의 신앙과 인간성만 보고 결혼한 것이었다.


한편 어머니 역시 오빠네 신혼까지, 올케언니의 인간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한 번도 흐뭇해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근심을 떠안은 사람처럼 가끔 혼잣말처럼 방백만 반복했다.  


"공부 잘하는 건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먼저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내내, 마치 타인이 때리면 가만히 맞고만 살았던, 어머니의 인생처럼 며느리관도 흡사 바보 같았다. 남들은 좋은 며느리, 좋은 사위 얻겠다고 뚜쟁이, 결혼정보업체를 동원하는데, 굴러온 돌들도 마다하는 뉘앙스 같았다. 다행히 올케언니는 참 훌륭한 사람이었다.





올케언니는 우리 어머니를 마치 친어머니처럼 위하고 좋아한다. 신기했다.


추석이나 설명절 때, 어머니는 올케언니가 오면 전 부치는 일을 거이 시키지 않았다.


"아가 왔니? 피곤할 텐데 작은 방에서 잠 좀 자고 나와라"


그때 언니는 병원 근무 중이라 내내 잠이 극심하게 부족하던 때였다. 그러면, 올케언니는 진짜 낮잠을 1~2시간 자고 나올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추석 때였는데, 그때는 오빠도 작은 방에 들어가 함께 낮잠을 1~2시간 자고 나왔다. 먼 거리 차 운전하고 오느라 힘들어서 일거라고요? 근데 오빠네 집은 수원이고 우리 집은 안양이라 나름 근거리였다.


물론 내 위로 친언니 몇 명은 이건 좀 너무 갔다, 나중에 투정을 좀 하기도 했지만, 나는 좋게 보였다. 내가 의식 있는 시누인지는 모르겠만 말이다. 어머니가 올케언니를 친딸처럼 여긴다면 의당 했을 말과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 나는 어머니가 나중에라고 변심할까 봐, 가끔은 여기에 또 살을 얹는다.


"엄마는 나중에라도 다른 시월드(시댁식구들의 행태를 풍자하듯 일컫는 말)처럼 하면 안 돼. 엄마마저 시어머니처럼 (동) 하면 (나는) 실망할 거야.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해도 지금처럼 (올케언니에게) 잘 해줘"

"...."

"알겠지?"


그럼 어머니는 별걱정 다 한다는 듯 말씀하신다.


"(나는) 다른 사람 불편하게 하는 거 싫어. 너도 시집가서 잘해"


올케언니는 나에게 꽤 솔직했지만 시어머니 곧 내 어머니로 인한 고초를 말한 적이 없었다. 가끔은 올케언니가 자신의 친엄마보다 우리 엄마를 더 좋아하나 싶기도 다. 우리 어머니 건강에 좋다며 이거 저거 챙겨서 택배로 보내주고, 명절이면 용돈도 두둑이 주곤 했다. 물론 이들 부부는 매달 목돈을 어머니 용돈 통장에 꼬박꼬박 보내주고 있기도 하다.


다만 올케언니가 남편 투정은 내게 꽤 했다.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늘 결핍을 느끼듯이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적으로 올케언니 편을 들어, 착하디 착한 우리 오빠를 오징어 씹듯 씹어 드렸다.


"언니, 그런 남자와 이제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어요? 그냥 끝내세요. 내가 다 열불이 나네. 오빠는 왜 그런데요. 아니 장가가기 전엔, 집에서 성자 같았는데, 희한한 남자네. 언니 만나 온갖 어리광과 투정을 다 쏟아내나 봐요. 언니가 너무 편하게 해 주어서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언니가 누적돼 왔다던, 서운해 한 내용들은 내가 보기엔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오빠가 화를 내면 무섭게 한다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 것인데, 사실 오빠는 온유한 사람이라, 화를 낼 때는 누가 봐도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왜 오빠가 화를 냈는가 보다 화를 냈다는 상황에 대해, 올케언니에게 전적으로 공감하며 언니 편만 든 것이었다.


내가 너무 올케언니 편을 드니깐, 나중엔 언니가 그런다.


"에이, 아가씨 (오빠가) 그렇게 까지는 (나쁜 건) 아니에요.. 오빠도 요즘 직장일이 힘들고, 어렸을 때 상처도 있고 그래서일 거예요. 뭐, 나도 오빠 어렸을 때 상처가 많은 거 아니깐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죠. 아가씨 고마워요!"

 

자신의 남편을 내가 싸잡아 부족한 사람 대하듯 말하는 것은 부담스러웠던지, 이 대화의 전환이 재밌었다.


"그래요? 언니가 그렇게 생각해 주니 너무 고마워요. 철없고 부족한 오빠를 언니 아니면 누가 치유해 주겠어요? 언니 아니면 오빠를 누가 거둬 주었겠어요? 가난한 집 장남은 요즘 여자들은 다들 싫다 하거든요"


이 대목에서 언니는, 오빠가 자매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중에 자신이 쟁취했다는, 레퍼토리 내지는 뉘앙스가 튀어나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1시간 넘게 통화 중이었던 터라, 우리는 뭔가 선을 넘은 오버스러움에 잠정 마무리를 했다.


그날 이후로, 올케언니는 내게 오빠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은 지금까지 일절 하지 않고 있다. 물론 나는, 두 사람이 진짜 갈라서겠다 펄펄 뛰었다면 팔 걷어 말렸을 것이다.





어머니는 모태솔로인 내가 천재와 연애하기 시작할 때도 동일한 말씀을 셨다.


"공부 잘하는 거 다 쓸데없다.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말은 나의 어머니가 했기에 감화력이 있고 실제적인 인성교육이 되었다. 어머니는 자녀 양육하면서, 고주알 미주알 잔소리하는 일이 거의 없으셨다. 매번 솔선수범으로 사셨고 먼저 희생했다. 본인의 자아를 죽여 타자들에게 먼저 순복하므로, 순종을 말이 아닌 삶으로 가르쳐 주었다. 때론 자식들에게도 순복하듯 조심스럽게 대하는 어머니에게, 우리는 "엄마는 왜 그렇게 우릴 키워?"라고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육성회비를 밀려 내고,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못 갔던 남매들조차, 당시엔 서운했으나 어머니에게 면박을 주거나 계속 투정할 순 없었다. 그녀가 죽을 힘을 다해 희생하는 삶 앞에서, '탓'은 모조리 우리 자식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우리 때문에 엄마가 고생하며 사신다. 아버지로부터 도망가지도 않고 말이야'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인생관은, 어머니뿐 아니라 우리 칠 남매 모두 동일한 삶의 기조이다. 올케언니는 다른 집안에 시집갔으면 내내 어깨에 힘주었을 스펙인데, 우리 집에 시집와서는, 도리어 그 때문에 내내 조심스럽 지내는 묘한 분위기다.


우리 집은 어머니의 교육철학 때문인지, 인간조건을 입에 올려 드러내서 자랑하는걸 극도로 조심한다. 물론 다들 출가해서, 그런 말을 할만큼 자주 만나지도 못 하지만 말이다. 셋째 형부가 예비 신랑으로 우리 집에 인사 왔을 때도 비슷했으니, 천재와의 연애초기에 '사람이 좋으냐?'는 유일한 질문은 비단 유난스러운 조심은 아니었다. 물론 나는 '내가 사람 (좋은 거) 보고 연애할 사람이잖아? 겸손하고 사람 좋아.'라고 응대했다.


30대 초반인 조카 진국이(조카 가명)는 얼마 전에도 내게 말했다.


"이모, 내 친구들은 우리 이모들, 삼촌들을 부러워해. 서로 돕고 살고, 조카가 아무리 힘들다고 그렇게 도와주는 이모, 삼촌들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냐 그러더라고. 내 친구는 오히려 삼촌이 조폭 같아서 조카 돈도 삥 뜯었거든"


나는 조카의 이 말이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론 굉장히 무겁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8살 때부터 살아온 삶과 알코올 가정폭력 남편 때문에, 온 동네가 그 집은 이혼해도 천 번 동의하고 이해한다 할 정도였는데, 그 모든 것을 참고 살아온 결실 같기 때문이다. 가끔 어머니도 힘든 내색은 했지만, 내 머리에 남겨진 어머니는 내내 평정심을 지켰다.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온 날, 가끔 매질을 당해도 자식들에게 화풀이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이 없는 순한 양처럼, 그녀는 자식을 포함 타인들에게 내내 온유했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늘 이타적인 삶을 살아왔다. 어렸을 땐, 그런 엄마처럼 바보 같은 삶은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DNA는 어디 안 가나 보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화를 낼 때는 하나. 자녀들이 '사람으로서 도리'에서 어긋날 때였다. 어머니, 그녀의 교육철학은 일관성이 있었고 지금까지도 언제나 솔선수범이 대원칙이다.  


80세가 넘으신 어머니는 지금도 문맹이시다. 자식들이 여러 번 또 간곡히 글자를 배우자고 졸랐지만 거절하셨고, 그래 지금도 글을 읽고 쓰지 못하신다. 그러나 자식들 중 누구도 어머니를 무시하거나 홀대하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둘째 언니, 넷째 언니는 지금도 어머니 돌아가시면 같이 죽을 거라 할 정도로, 어머니를 존경하고 살뜰히 공경한다.


어머니의 한마디 말, "먼저 사람이 되어라"


어느 달변가의 논리보다 어떤 명성있는 부흥사의 설교보다, 그 말 한마디가 뇌에 또렷이 남아 손발로 이어지게 했던 이유. 그 신비에 대해서, 요즘도 묵직하게 상념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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