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Nov 13. 2023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7)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녹색불



사각형 격자무늬 창문은 세상을 멈추어 세웠다. 푸르른 계절을 지나 엽록소를 소진한 은행나무 낙엽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섰다. 멈춘다는 것은 때론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 있음을 생각하며 운남의 두 눈은 멈추어진 세상을 헤아리고 있었다.




하나. 회상

                                                                       

오래전 어느 날이 운남의 걸음을 멈추어 세웠듯이 말이다. 운남이 대입 삼수를 하고도 또 대학에 떨어져 혼자 볕 떨어진 거리를 헤매듯 걷고 있을 때였다. 수화기 너머 불합격 소식을 전해 들은 게 어제인기운내기가 어려웠던 매일. 집에 들어가기도, 집에 있기도 힘이 없는 날들이었다. 난곡입구를 나와 봉천역을 지나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보니 멀찍이 봉사리(봉천사거리의 준말)가 보였다. 벌써 해는 떨어져 사방은 화려한 네온사인을 밝혔고 근방 최고대 학생들 일지, 중. 고등학생들 일지 아니면 어느 유망한 직장인일지 모를 그런 인파들이 쏟아져 나오고 쏟아져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운남은 그 인파에 자신을 숨기듯 서울대입구 전철역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듯 들어갔다. 그리곤 마치 누군가와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전철 개찰구 근처 원형 의자에 우두커니 앉았다. 사람들의 분주함과 동동거림은 하늘로 사라지는 메아리마냥 아득한 소리처럼 공명했다.    


  


운남은 겨울 잠바 깊숙이 넣었던 손을 꺼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장갑을 안 껴서 그런지 빨간 한기를 맞은 손이 시렸다. 다른 손으로 시린 손을 녹이려 덮었지만 그 손 역시 다. 손에 손을 서로 비비며 그렇게 쉬다 가고 싶었다. 시려 부르틀 것 같은 손을 위아래로 들었다 놨다 들여다 보는데, 순간 떼구루루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손이 시린 건데, 왜 이렇게 삶마저 시리게 느껴지는 것인지. 인생이 서럽고 버겁고 힘들다 느껴지려던 찰나. 눈물이, 운남이 저 깊이 숨긴 언어의 낱말들을 타자 치듯 그렇게 세상에 드러내고 만 것이다. ‘사나이가 창피하게 눈물이람’  이내 흘러 떨어진 눈물은 얼마간 후련하면서도, 남의 속도 모르고 부끄러움을 들추는 눈물마저도 야속하다 느껴졌다. 다행일까, 그 눈물은 목에 두른 목도리 안으로 스며 들어가 차가울뿐 지나가는 행인들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십 분이었는지 아니 몇 시간이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전철역을 나올 땐 몸이 꽁꽁 얼듯 한기가 가득 들어온 것을 보면 꽤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운남이 원형의자에 그렇게 한참 앉아있는데, 한 10m 떨어진 전철역 개찰구에서 한 여고생이 가방을 뒤적거리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여학생이 가방을 한참 뒤적이더니 전화 거는 모습이 보였다. 의협심이 남다른 운남은 순간 날치기를 당했나 옆눈이라도 달린 듯 티 나지 않게 그쪽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이내 운남이 앉아 있는 원형의자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운남은 흠칫 눈길을 재빨리 거두며 달아오르려는 귀를 만지작 거렸다. 그것도 성에 안 찬 듯 목도리 안으로 흡사 거북이처럼 고개를 푹 들이밀고, 한 손은 잠바 안주머니에서 지갑이라도 꺼내려는 듯 향방 없이 더듬거렸다. 다음 순간 그 여학생이 운남을 지나치는 것을 느꼈다. 괜한 오지랖이다 싶던 순간, 자신을 스쳐 지나간 여학생의 실루엣과 아련한 향취를 상상하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운남의 머리 뒤에서 아까 느꼈던 그 온기가 달려온다. 어떤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아까 그 여학생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엄마, 큰일 났어. 어떻게? 어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분명히 봉투로 받아 가방에 넣어 두었는데 오늘 보니 돈이 없어. 은행에 입금해서 바로 학교에 송금하려 했는데, 은행에 가보니깐 봉투가 없는 거야. 엄마 이거 없으면 등록금 모자란단 말이야."


운남의 뒷머리 쪽에서 들린 한 여학생의 목소리는 허공을 찢었고 예리한 날카로움은 이내 한숨으로 바뀌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 상대로 보이는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안 들렸다. 여학생이 처음보다 마음이 진정된 것으로 보아, 그녀도 세상에 태어나 기댈 울타리 하나는 있는 듯 보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뒤쪽 그녀의 핸드폰에서 데구루루 소리가 울렸다.


"어, 어떻게 됐어? 진짜야? 알겠어. 나는 또 놀랬잖아. 응. 그거 내 계좌 찍어줄게. 거기로 입금해죠. 오늘은 입학 등록금 송금하고 학교 교무과는 내일 가서 장학금 다시 알아보면 될 것 같아. ?근처에 과외교사 면접 몇군데 보느라 시간이 이렇게 된줄도 몰랐어. 밥은 안먹었지. 그니깐 입학 때 수석장학생으로 들어오면 좋았는데, 공대가 올해 이렇게 경쟁률이 몰릴 줄은 나도 몰랐지. 알겠어. 다음 학기 학점이 수석이면 전액 받을 수 있을 거야. 응. 알겠다고. 걱정하지 말고. 밥은 이거 다 한 다음에 먹을 거야. 다리에 힘이 빠져서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어. 응 알겠어. 끝나고 전화할게. 알겠어, 끝나고 밥 꼭 먹을게."


입학등록금. 한 단어가 운남의 귀에 착 달라붙었다. 그가 원형의자 기둥 쪽으로 등을 가까이 붙이며 귀를 쫑긋 세우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운남은 누군가의 어지러운 대화들을 마음에서 밀어내려 했지만 들리고 만 것이다. 그 여학생은 아마도 이 근처 최고대(해당 대학 가명)에 이번에 합격한 학생인 듯했다. 그리고 등록금을 은행으로 입금해도 되는데, 굳이 이곳 봉천동까지 온 것은, 그녀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 때문이 아닌가 운남은 마음이 흐르는 대로 생각했다.


누군가의 기쁘고 동시에 다급한 뉴스에 잠시 자신의 눈물과 한숨을 잊을 무렵. 여학생은 겨울철 한기를 온몸으로 털어내듯 야무지게 최고대 방면 출구로 또깍또깍 사라졌다.


운남은 잠시 시간이 멈추어 선 것만 같았다. 세상은 쉴 새 없이 흐르고 넘치는데, 유독 자신의 시간만 운행을 멈춘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다급함 마저 눈물 나게 부러운 그런 날, 그런 외로운 저녁이었다.




둘. 한걸음  




운남이 창문을 보며 언젠가 멈추어 섰던 추운 절을 더듬거리고 있을 때, 다정자매가 복도 곁 자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운남은 사람들이 많이 있던 곳에서와는 사뭇 다르게 어깨를 굽신거리듯 입가에 어려운 미소를 담고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자매님. 처음 인사드려요. 모임 중에 정말 죄송해요. 이거 어쩌지요?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주차장에 차를 대다가 옆에 있는 자매님 차와 조금 접촉된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기스는 안 난 것 같은데, 혹시 문제가 있을 수 있어서요. 차문에 연락처는 남겨 놓았는데, 마음이 어려워 직접 뵙고 말씀드려요. 정말 죄송해요."


"아.. 그래요? 근데 그건 제 차가 아니고 제 친구인 유정 자매 차예요. 유정 자매가 핸드폰 수리 맡기느라 오늘은 제 연락처를 차에 메모해 놓았는데, 그거 보셨나 봐요."


"아, 그렇군요. 그럼 유정자매 연락처 알려주실래요? 혹시 문제 있으면 바로 수리비나 필요한 것 전달드릴게요. 제가 오늘 집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서두르다가 이런 일이..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해요"


"아니, 괜찮아요. 제가 유정이랑 차 살펴보고 연락드릴게요."


"아, 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면 주중에 한번 통화해요. 제가 일이 있어서 그럼 이만. 좋은 시간 되시고요."


운남은 어쩐지 차주의 연락처를 묻고는 연락처를 받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다정도 어쩐지 차주의 연락처를 알려주려다 금세 마음에 숨기듯 꿀꺽 삼켜 버렸다. 두 사람은 뭔가 해야 할 숙제를 미뤄둔 사람들처럼 마음의 공백에 당혹스러우면서도, 따스한 온도가 감미롭게 마음에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공모다. 두 사람은 그 순간 짧지만 적지 않은 깊이로 뭔가를 공모한 짜릿함을 애써 외면하며 그것을 일상 속에 비밀히 접어 두었다.


다정은 자리에 돌아와 그제야 호흡을 가다듬었다. 달려온 것도 아니고 모임 장소가 더운 것도 아닌데 숨이 가쁘다 느꼈다.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살포시 개서 무릎에 얹으며, 오늘따라 이상해진 호흡을 숨기고자 고개를 떨구었다. 떨군 고개를 따라 바닥을 향한 눈동자는 방금 들은 어떤 말들을 무한 반복하며 마음이 상기되는 듯했다.


'그러면 주중에 한번 통화해요'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대각선에 있는 유정이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 묻는 것도 같고 아무 일도 모르는 무심한 표정 같기도 했다. 모임이 끝나고 다정은 유정과 늘 그렇듯 카플로 귀가하며 다른 날보다 말수가 적었다. 아니 말수를 줄였다. 다정은 오늘따라 피곤하다며 잠깐 눈을 감았고 유정은 "그럼 잠 오는 곡 틀어줄게. 기다려봐" 한다. 오늘따라 감미로운 클래식 피아노곡에도 가슴이 콩닥거린다. 또 숨이 차고 뭔가 열감이 일어나는 것도 같았다. 집에 가서 종합감기약을 먹어야겠다 생각했다. 이내 밀려드는 잔물결일지, 파도일지 모를 그 무엇을 잠재우느라 힘을 모아 본다. 그날 다정은 평소와 달리 늦은 밤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잠들었다.


                                                                                                                    


 

다음날, 다정은 월요일 아침 햇살이 더없이 눈부시게 밝다며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자신을 따라온 햇살을 느끼며 곳곳에서 그림자와 맞물린 누구가 창조의 기운을  만끽했다. 사무실의 책상이며 의자며 가느다란 모나미 볼펜까지, 빛과 그림자의 향연이였다. 햇빛이 비친 곳은 오후가 되면 그늘이 되고, 반대쪽 복도의 창가  그늘은 이내 시간에 따라 밝은 햇빛에 닿을 것이다.


"부르르릉"


소리를 진동으로 바꿔 놓은 핸드폰은 책상 위에서 흔들거리며 요리조리 움짝달짝 못 하는 게 오늘따라 귀여워 보였다. 가끔은 핸드폰이 말하는 생물이면 어떨까, 괜한 상상을 하다 아차 싶어 전화를 재빨리 받았다. 근데 아는 번호다.


'잉..'  


다정은 거래처와 통화를 마친 후에도 거이 20분 간격으로 이유 없이 핸드폰을 자꾸 확인했다. 누구도 기다려 달라 하지 않았으나 기다리고 싶은 때, 기다리고 싶지 않은데 기다림이 하루종일 졸졸 좇아다니 날. 다정에게는 오늘이 유독 그랬다.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


애꿎은 시계를 탓하며 PC모니터를 보는데, 사내 메신저로 옆팀 입사 동기 진선(가명) 주임이 오늘 점심 뭐 먹을지 물었다. 맛집 탐방을 즐기는 그녀 덕에 매일 가는 회사 구내식당을 가끔 건너뛸 때 숨통이 트이곤 하던 터였다. 그러나 오늘은 진선 주임의 말이 한 귀로 들어와 한 귀로 슝 빠져나간다. 공기 빠진 공처럼 말이다. PC모니터를 보며 혼잣말 하듯 자꾸 떠오른다. 그 목소리, 그가 남겨준 기약들이 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혼잣말을 되뇌인다.


'이름이 운남이라고 지'




셋. 다정에게


몇 주 전 이전남 전도사가 다정에게 전화 심방을 주며 했던 말이 순간 머리에 착 달라붙었다. 전남전도사는 아버지는 어떠신지 묻다가는 이내 조만간 있을 청년부행사에 관해 입을 열었다.


"다정자매님 혹시 독신주의자는 이니시죠?"

"독신주의라니요. 언젠가 시집은 가야죠.."

"근데 저번주 모임 때 대화하고 싶은 형제 이름 3명 써내라 했는데, 다정 자매건 없더라고요"

"그게 좀.. 말씀교회 청년부에 나온 지도 얼마 안돼. 아는 형제가 없어요. 글구 그간 고시공부하고 취직준비 하느라 연애 자체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어요. 어쩌죠? 죄송해요."

"아이코. 나이가 적지 않고 그 사이 좇았다니는 형제도 꽤 있었을 텐데, 눈이 좀 높으신  아니세요?"

"아예 남자 보는 눈 자체가 없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제가 서글픈 말을 참 밋밋하게 하네요."

"혹시 정 생각나는 형제 없으면 김운남 형제는 어때요?"

"김운남이 누구예요?"

"에이. 매주 보는 형제잖아요?"

"저 매주 보는 형제 없어요, 전도사님!"

"아, 매주 예배 전 찬양시간에 기타 치는 형제 말이에요. 가끔 제가 말씀 전하는 주엔 찬양도 인도하고요."


다정은 순간 헉, 말이 꼬일 것만 같았다. 전도사님이 뭔가 전말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많고 많은 형제 중 그의 이름이 이 대목에서 툭 튀어나와 적잖이 놀랐다. 다정은 통화는 자신의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빛의 속도로 계산하며 속삭였다. ', 말을 더듬지 말자, 말을 더듬지 말아야 한다'를 속으로 되뇌며 일부러 목소리를 더 차분하게 내리깔듯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아, 기억이 날듯도 해요. 근데 무슨 대화요, 말 한 번도 안 해 본 형제와 어색할 것 같은데요."


다정은 정답지 같은 대답을 깔끔하게 해 놓고는 되려 마음이 조급해졌다. 얼마 전엔가 운남이 예배 후 복도에서 다른 자매와 웃는 낯으로 대화하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헤픈 남자들은 피해야 한다며, 언짢아 하던 자신의 미묘한 감정도 말이다.


'다정, 그냥  전도사님께 못 이기는 척 얘기해. 한번 대화하는 것은 괜찮겠다고'


다정은 청년부행사때 운남이 다른 자매와 들떠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하자 순간 아차 싶었다. 그래 잠시 머뭇거릴 틈도 없이 재빨리 거이 본능적으로 추신 같은 여운을 덧붙였다.


"그보단 형제가 먼저 말을 걸면 모를까. 자매인 제가 먼저 그러는 건 좀.."


다정은 자존심이 삐죽삐죽 올라오는 바람에 끝내 심드렁한 무관심을 연기한 꼴이 되고 말았다. 최근 근황과 기도제목을 나누다 뭔가 껄적지근하게 통화를 끝내고 말았다. 좀 전 일어났던 조바심을 애써 무시하며 체념을 끌어다 평정심을 지켜내고자 오후 내내 바둥거렸다.


김운남. 그랬다, 어제 복도에서 대화를 나눈 남자는 전남전도사가 몇 주 전 말한 그 형제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접촉사고는 그저 우연인가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정은 오늘까지도 차주인 유정에게 어제 접촉사고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친구한테는 조금 미안한데, 뭔가 이 기회를 홀딩해 놓고 싶었다.




넷. 운남에게


한편 운남은 어제 주일 예배 후 전남 전도사와 오랜만에 단 둘이 저녁식사를 했던 터였다. 전남전도사는 밥을 입에 넣다가는 운남에게 몇 주 전과 동일한 질문을 했다. 다다음주에 있을 '말씀 청년부 사랑의 잣대기' 행사에서, 운남이 대화하고 싶은 자매는 없냐고 말이다. 운남도 대화하고 싶은 자매를 적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운남은 같은 교회에선 연애 안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했었고, 전남전도사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남전도사는 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애써 모르는 척하고 물어 본것이다. 운남은 배려심이 많아서 자신의 단호한 결심도 상대가 어려워할 것 같으면 에둘러 말하는 사람이었다.


"제가 그날 집에 일이 있어서 일찍 가야 할지도 몰라서요."


전남 전도사는 운남이 교회에서 워낙 철벽 같은 형제라, 보기보다 자매들이 다가가기를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 아마도 전에 어떤 상처가 있었나 싶다가도 더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 모르는 척하곤 했다.


그런데 전남 전도사는 보았다. 얼마 전 주일, 운남이 한 자매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는 눈빛을 말이다. 운남은 올해 30세가 되었지만 모아 놓은 돈도 없고 집에서는 가장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여러 이유로 결혼은 물론이거니와 연애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런 운남이기에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 그의 몸에 방향성이 생기는 작은 변화조차 전남전도사는 예민하게 읽어냈다. 다정 자매. 운남의 흔들리는 눈빛이 가리키던 뒷모습의 주인공은 다정자매였다. 운남은 예의 깍듯하고 매너 있는 형제이지만 결정적인 순간 자매들에겐 곁은 잘 안 주었다. 그렇기에 운남이 자매를 대놓고 호감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은 생경했다. 물론 아주 가끔 호감인가 싶어 알아보면, 그건 이내 호감이 아닌 친절이곤 했었다.


그런데 요전날 운남이 다정자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눈빛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뭔가 강렬한데 흐릿해지는가 더니 숨기고 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게 무엇일까, 전남전도사는 잠깐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사실 월요일은 전도사인 교역자들은 쉬는 날인데도, 오전부터 다정자매에게 전화를 걸었던 이유였다. 문득 이 두 사람 모두 집에서 장남, 장녀로서 가장 역할을 다는 것, 무엇보다 그 흔하디 흔한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생각해 보니 이 두 사람이 공통점이 많네. 그 나이까지 연애를 제대로 안 해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지' 


전남 전도사는 중.고등학교때부터 오작교 역할을 많이 했던 터라, 남녀 간의 미묘한 눈빛과 감정에 남들보다 촉이 빠르다 자부했다.


전남 전도사는 주일에 이어 다음날 월요일 오후에도 운남에게, 오는 주일 찬양 콘티 관련해서 의논할 일이 있다며 통화하자고 문자를 보냈다. 운남은 근무시간에는 통화가 잘 안 되곤 했기 때문에, 전남전도사는 사전에 문자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문자를 보내고 1분도 안 돼서 운남이 먼저 전화를 했다.


'어, 희한하네. 거이 빛의 속도잖아. , 이거 딱 걸린 것 같은데'


전남 전도사는 뭔가 도가 튼 사람처럼 운남을 꿰뚫어 보려 했고, 이내 작심이 일어나고 발동이 걸렸다. 하반기에는 찬양에 신곡을 대거 넣자며 이거 저거 얘기하다가, 말미에 이 말을 남기고는 순식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참, 운남형제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그게.. 다정 자매 아시죠? 그 자매가 좀 난감하게 되었어요. 이번 행사때 다정 자매와 '대화할만한' 형제가 없어서요. 자매가 청년부에 온 지 1년도 안 돼서 아는 사람도 적은 데다가, 이러다가 상처 받겠어요. 기존 리더나 임역원들이면 괜찮겠지만 사실상 새 가족분이시라. 운남형제가 도와준다 생각하고 대화자가 되어 주면 어때요? 하루만 하면 되는데 뭐 힘들어요. 딱, 하루만 대화 상대가 되어주자고요.

아, 전화가 들어와서요. 그럼 그렇게 알고 대화 상대로 편성해 놓을게요."


"어, 전도사님. 그게... "


전남전도사는 운남의 이 외마디를 들었지만 애써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뭔가 확실히 하고자 문자를 남겼다.


"전화가 들어와서 말하는데 끊어서 죄송해요. 그리고 저 지금부터 일이 있어서요, 오늘은 통화 어려울 수 있어요. 급한 일은 문자로 주세요"


사실 다정자매랑 대화하고 싶다고 써낸 형제들은 있었다. 2명. 그러나 그 두 명 다 다른 자매들이 호감을 갖고 신청을 한 터였다. 그리고 그 2명 모두 다정자매가 좋아하는 그 무엇과는 온도차가 있었다. 무엇보다 전남전도사는 찬양시간 때면 다정이 얼굴을 붉히며 숨겨 보던 눈빛을 몇 번 보고 말았다. 운남을 향한 눈빛 말이다. 그것은 운남이 다정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바로 그 눈빛과 비슷했다.



다섯. 퍼즐


전남 전도사는 운남과 통화를 끝내고 다정자매에게  문자를 보냈다.


"다정 자매님, 자매님과 대화하고 싶다는 형제가 있는데요. 다다음주 행사 때 꼭 나오셔야 해요. 형제 상처 받아요. 매주 보는 형제라는 것만 알고 계시고 차차주 꼭 2부 행사 때 남아 주세요"


전남 전도사는 평소 우연은 때론 의지에서 발화하며 이내 운명으로 이어지곤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래 이 두 사람을 위해 일련의 일들을 밀어 붙이면서도 하나님께 시로 기도했다. 자신이 혹여라도 잘못하는 거면 교정해 달라고, 다소 두려움을 담아 여러 번 간절히 기도했다.


'이건 내 오랜 느낌으로 보건대, 맞아. 그러니깐 더 하나님께서 이 두 사람을 도와주시길 기도하자'


누군가의 중보기도는 때로 당사자들의 그것보다 더 절절할 때가 있다. 특히 연애문제가 그렇다. 세상에 존재하는 오지랖 중의 최고봉은 연애 훈수의 오지랖이며, 수많은 청춘들은 고래로 이 오지랖으로 인생의 향방이 뒤바뀌기도 하고 어긋난 퍼즐이 맞아 떨어지기도 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다정은 전남 전도사의 문자와 자신이 밤새 뒤척였던 일이 맞물려, 오늘 새벽 자신이 기도했던 내용들이 떠올랐다.


"하나님 아버지, 저와 인연이 있는 형제가 있다면, 제가 용기가 없어 뒷걸음질 칠 때 그가 한걸음 나아오게 도와주세요. 저는 너무 어렵고 두려워요."


전남 전도사가 주도한 한걸음은 다정에겐 신의 계시 같았다. 다정은 바로 답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핸드폰에 온 신경이 쏠려 있으면서도 일부러 2시간이 지난 뒤에나 전도사에게 답문도 아닌 통화를 했다. 문자엔 자칫 자신의 속내가 묻어 날 수 있기 때문에 말로써 밋밋한 연기를 해치우기 위해서였다.  


"전도사님 죄송해요. 답이 늦었네요. 에구, 교회에서 상처 받으면 안 되지요. 제가 실은 형제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대게 꺼려요. 하지만 전도사님 부탁 잘 안 하시는데, 저번에 제가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깐요. 이번 건은 제가 순종할게요. 그럼 주일에 봬요"


다정은 결과적으로 오케이를 했지만 끝내 운남과 대화해 보겠다는 말은 명문화해서 전하진 않았다. 나중에 혹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자존심이 상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법고시 공부한 자매의 꼼꼼한 대처인 것이다.


같은 시간대, 야근 중인 운남은 낮에 전도사님이 남긴 말들로 마음이 어지러이 복잡해졌다. 교회에서, 그것도 같은 교회 자매와 미묘한 감정에 휩쓸릴 일은 없을 거라 다짐하곤 했기 때문이다. 다정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애틋하고 아련하게 마음에 끌렸던 것. 그것을 남몰래 숨기고 지우려 애썼던 이유였다.


끝내 한 사람의 자매도 대화상대로 적어내지 않았던 운남은, 끝내 한 사람의 자매와 독대할 떨리듯 긴장된 시간을 마음에 고이 간직했다. 운남은 꽤 늦은 시간이 되서야 퇴근길에 나섰다. 그 옛날 자신을 멈추어 세웠던 도시의 네온사인은 오늘도 화려하다. 자신을 세상에서 밀어내던 네온사인 불빛에 오늘은 자신을 되려 내맡기듯, 빨려드는 아지랑이처럼 몽환적인 밤길이었다.

 

'그분(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


운남은 자주 하는 질문이건만 오늘따라 해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밤의 불빛이 더없이 눈부시게 밝아 감탄이 나올 뻔했다. 빛은 어두울 때 더욱 눈 부시듯, 두 남녀의 검게 그을린 인생의 퍼즐들이 바야흐로 탁자 위에 숨 죽여 가지런히 놓여지게 되었다. 빛을 발하는 유리광처럼 말이다.






ㅡ 다음 편 8회에서 계속됩니다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  연재 목차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

어느 30대 청년의 ㅈㅅ예고 카톡  From.진국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

어느 흙수저 장남의 꺾이지 않는 인생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2)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통기타로 직장생활 평정한 사원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2)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3)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인연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3)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4)

할머니 이귀애의 단상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4)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5)

미싱, 목욕탕과 인형놀이  feat. 전태일

발행된 글 :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5)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6)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학벌

발행된 글 :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6)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7)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녹색불

발행된 글 :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7)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8)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첫사랑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9)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불운이 목돈 된 기묘한 불테크(불운테크)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0)

운남은 오늘도 절대자 임재연습 중




<포레스트 운남 잭팟>의 다음 목차들 (쓸 수 있을지는 고민 중입니다)  


00. 도둑놈 잡아 직장에서 갑으로 사는 남자

00. 나거만 과장과의 징검승부

00. 장인 장모의 1등 사윗감 등극 비법

00. 사내 최초 간 큰 육아 휴직남

00. 재테크, 퍼줄수록 들어오는 퍼줌 복리의 기적

00. 여동생의 말은 순종해야 산다

00. 중년 남편은 을이 더 좋아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과 연관된 청년 클레어 글

카프카의 < 변신 > (brunch.co.kr)

우리가 꾸는 꿈 (brunch.co.kr)

<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brunch.co.kr)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