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라는 이름은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으로 문학작품에서 불려지기 시작했다. 낭만은 가난과 거친 바람이 부는 날에 더없이 요긴한 겨울 이불이다. 달동네라는 운치 어린 이름은 그래 위로가 되며 더없이 아련한 존칭이다.
1987년 봉천동, 사진출처: 달동네(봉천동)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우리나라는 20세 초반 35년간의 일제 강점의 치욕을 응징하고 1945년 8.15 광복절을 맞았다. 나라 전체가 축제의 분위기였고 이 기쁨은 수십 년 동안 나라 잃은 설움을 겪던 해외동포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앞다퉈 해방 조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축제도 잠시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연이은 남북 분단의 비극은 이내 북한에서 월남한 난민들을 초래했다. 달동네는 그런 해외 동포들과 여러 실향민들이 도시의 산비탈이나 외진 곳에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달동네가 도시 빈곤층의 주거밀집 지역의 대명사가 된 데엔,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개발과 수출 주도형 공업화가 큰 몫을 했다. 바로 대규모 이농현상의 가속화가 그것이다. 1966∼1971년간 농촌인구는 150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달동네는 다양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이룬 동네지만 사실상 정부가 거주를 유도한 측면도 있다. 경제발전을 도모하려는 정부로서는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도시 내에 빈곤층은 그런 가성비 높은 노동력으로서 유용했다. 그리고 그 노동력을도시 안팎에 묶어두기 위해선 베드타운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 정부는 국공유지를 무단 점거해서 거주하는 그들을 묵인하곤 했다. 1970년 전후에는 아예 도시외곽 국공유지에 집단재정착지를 조성함으로써 달동네가 확산되는 계기를 적극적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1987년 봉천동, 사진출처: 달동네(봉천동)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한강의 기적, 서울은 수많은 고통과 그늘을 남겼다.
그러나 도시로 이동해 달동네에 정착한 이농 인구에 비해 도시엔 아직 일자리가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농 인구의 대부분은 일용직 막노동, 공장노동자, 노점, 행상 등 블루칼라에 종사하며 만성적인 빈곤과 잦은 실업에 노출되곤 했다. 그것이 달동네에 무허가 판자촌 이른바 불량주택이 즐비했던 숨 막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너나없이 가난을 이고사는 마을, 어느 학자는 이 달동네를 '빈곤을 공유한 공동체'라고 했다. 한강의 기적, 서울은 수많은 고통과 그늘을 남겼다. 화려한 고층빌딩과 말쑥한 아파트들은 그 도시의 그늘들을 삼켜버린 듯했으나 그것은 도시 곳곳을 유영하다, 이내 도시 한복판에서 그 토사물을 쏟아내곤 했다.
서울의 삼양동, 신림동, 봉천동, 사당동 등은 대표적인 달동네였고, 인애와 장남 운남의 봉천동 산 81번지도 그 달동네 중 하나였다.
1960년대를 넘어 1970년대 가난한 집 장녀와 장남들의 학벌은 묻지 말아야 할 배려 같은 것이다. 부모세대는 6.25를 핑계 삼아 짧은 가방끈을 에둘러 변명할 수 있었으나 전후 세대 이후 학력이 급속히 상향되고 의무교육이 증가하면서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고학력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제는 50세~ 60세 전후를 바라보고 있을 이들 장녀, 장남들은 묵힌 신음을 다 토로하지 못하는, 너무 서럽고 서글퍼서 모르듯 덮어주는 게 나을 세련된 도시에 가난의 세속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사진출처: <봉천동> 달동네의 변화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운남은 그런 가난한 집안에 서열로 4번, 남자 서열 장남이었다. 불운세대에서는 조금 빗긴듯한 어정쩡한 연차에 세상을 차고 태어난 우량한 아들. 가족 모두에게 이 아들은 왕의 귀환 같았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만큼은 아니지만 앞날이 암담한 봉천동 달동네, 그 인애의 집안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숙명이었다. 삶이 벅차고 숨이 턱끝까지 차다 못해 금방이라고 끊어질 것 같은 순간마다, 운남을 일으켜 세워준 것은 자신을 둘러싼 이런 가족들의 기대와 희생 덕분이었다.
그리고 운남에게 빚진 마음을 더욱 얹어 준 것은, 친할머니의 유별난 남아선호 사상도 한몫을 했다. 인애의 시어머니와 막내 시누이는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그러나 고난과 고통에 순응하는 것이 인애와 칠 남매 모두에겐 하나의 가풍 같았다.
이런 집안에 조금 결을 달리하는 자손이 탄생했으니 바로 의경(바로 이 글을 기술하고 있는 작가의 가명)이다. 인애네 집에서 의경은 서열 6번으로 끄트막에 간신히 태어났다. 의경은 어렸을 때부터 뭔가 독특했고 대부분 조용한데 이상하게 시끄러운 사건의 발원지가 되곤 했다. 국민학교 입학식 때 울음을 터트려 교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고, 그해 수업시간엔 교실에서 오줌을 지려 집안 망신의 원흉이 되었다. 이 인사의 소란이 학교에서 만이겠는가. 다른 가족들은 1년 내내 고상하게 즈려밟는 재래식 화장실, 일명 푸세식 화장실의 똥통에 최소 2번 이상은 발과 허벅지가 빠졌었다. 그것도 인식이 뚜렷한 국민학교 2학년, 3학년 때 말이다. 그 당시엔 집에 개별수도도 없던 터라, 꼬맹이의 다급한 소리를 듣고 좇아온 인애는 이 문제아를 들어 올려 공동수도에서 애물진 오물을 씻어내야 했다.
그리고 의경의 친할머니인 이귀애(인애의 시어머니이자 의경의 친할머니의 가명)에게도 의경은 종종 다루기 어려운 손녀였다. 대비마마와 같은 할머니와 40세까지 시집 못 가 노처녀 히스테리가 하늘을 찌르곤 했던 막내 고모. 이들의 시집살이에 내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내내 코너에 몰려 고초를 당하고 있다, 이것은 의경이 사리분별이 생기기 시작한 7살 이후부터 잠정 결론 내린 이 집안의 적폐였다.
이런 의경은 의협심이 남달랐고 집안에 전설 같은 에피소드를 여러 개 남겨 두었다. 그러나 누구도 파헤치거나 알아내지 못한 은밀한 신화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 이귀애의 숨겨둔 금고 사건이었다. 9평 집의 재래식 부엌이 입식부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아버지 김목수는 거금과 로비로 재래시장인 봉천시장 초입에 싱크대집에서 싱크대 세트를 맞췄다. 부엌이 워낙 좁아서 가스레인지와 싱크볼, 찬장만 옵션으로 들어간 기억(ㄱ)자 싱크대 세트였다. 그때도 외상으로 구매했을 텐데, 이후 싱크대 구매대금이 잘 지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동안 어른들이 순번을 매긴 듯 돌아가며 싱크대를 여기저기 닦고 쓰다듬고 조작하며 애착을 보였던 기억은 또렷하다.
사진출처: 1993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 달동네 일대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또 하나 명확히 기억하는 것은 할머니의 금고가 어느 날부터 싱크대 윗찬장 꼭대기에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연둣빛 나는 플라스틱 바구니. 할머니는 그곳에 곶감이며 귤 등 간식들을 두고 그 작은 바구니로 덮어두곤 했다. 우리 집 식구들이 장신이 그닥 없어 굳이 올려다보지 않으면 모를 장소, 그 싱크대 위 처녀림 같은 장소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할머니 본인 외에 그것을 처음 발견한 것은 의경이었을 것이다. 어머니 인애는 그 존재를 알았어도 모르는 척 덮어 주었을 위인이기에 열외함이 바람직하다.
가령 할머니는 의경의 언니들이 퇴근길에 귤 15개를 사 오면종종 3~4개를 할머니의 바구니 금고에 숨기곤 했다. 오빠와 의경 아래 남동생을 챙겨준다는 명목이었다. 물론 그중 7할은 오빠 운남의 몫이었다. 그런데 의경이 생각하기에 가끔은 할머니도 1개 정도는 몰래 까서 본인이 드시는 듯했다. 의경은 거이 매일 순시하듯 바구니 금고의 입출고 내역을 몰래 엿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추정은 맞을 것이다. 할머니는 우리 집안 두 아들의 몫을 챙길 때 눈치 보지 않았고 당당하셨다. 할머니의 부의 분배는 딸 많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율령 같았다. 그러나 의경이 보기엔 그것은 정당한 분배를 가장한 횡령과 차별 그 자체이며 그윽한 독재가 묻어나는 비리의 온상이었다.
사진 출처 : 그리운 시절을 박제한 사진집 골목 안 풍경 30년 (tistory.com)
국민학교 2학년 어느날, 의경은 자신의 인생이 참혹하게 지루하다 탄식하며 집에 들어서고 있었다. 때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관에 신발을 내던지듯이 벗고서 입식부엌의 마천루 같은 찬장 지붕을 늘 그렇듯 손으로 휘저었다. 할머니의 금고 바구니가 손에 잡혔다. '우씨, 어제 내가 1개밖에 못 먹었던 귤이 이 바구니에 4개나 있네?' 덩그러니 보관되어 있는 귤 4개는 자칫 잘못 건드리면 댕그르르 벽을 타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의경은 더 이상 이 차별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젠 이놈의 불의를 정의의 이름으로 단도리 해야겠다 작심했다. 귤 1개를 먹는 것은 당장은 즐거울지라도 의경 자신에게 내내 치부로 남을 터였다. 할머니 이귀애식 정당함에 걸맞을 맞대응을 구상했다. 그래 방법이 떠올랐다. 의경은 바구니에서 귤을 1개 꺼내 자기 이로 흠집을 상당히 냈다. 귤의 1/4 정도를 이로 갉아낸 것이다. 마치 우리 집의 동거가족 쥐새끼가 파먹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온전한 귤 옆에 난도질된 갉힘 자국난 귤을 원래 위치에 도로 잘 두었다. 이 일은 정말 몇 분도 안 걸리게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의경은 가족들 특히 할머니가 중간에 들어 올까봐 순식간에 해치운 것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 시간. 할머니가 아예 금고를 꺼내 들고 밥상머리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경을 꼈다 뺐다 근심 서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에이쿠. 이노무 쥐새끼들 때문에 나가 못 산다, 못 살아. 이 멀쩡한 귤을 이리 갉아먹어 버리면 어쩌노. 쯧쯧쯧.”
할머니는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듯 자신의 금고와 오늘 벌어진 수탈에 대해서 한바탕 하소연을 하셨다. 의경은 정의의 이름으로 골리앗 같은 권세로운 할머니에 맞선 것이나 할머니의 서글퍼하는 표정과 한숨에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 많이 미안해졌다.
'이것이 이렇게까지 할머니의 마음에 안타까움을 남길 줄이야.'
의경은 죄의식이 일어나려 했고 동시에 들통이 날까봐 걱정이 올라왔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싶었다. 그래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듯 할머니의 말을 거들었다.
“할머니 그러니깐 귤은 냉장고에 넣으셔야죠. 그걸 찬장 위에 바구니에 넣어 놓으니깐 쥐가 냄새 맡고 그런거잖아요. 나머지 귤들도 쥐가 갉아 놓거나 만지지 않았으려나”
할머니는 의경의 말에 안 그래도 참아 보려던 화가 격앙되어 부풀어 올랐다.
“내사 이놈의 쥐새끼들을 다 쪼사불란다”
할머니는 격노와 아쉬움을 연거푸 토로하며, 쥐가 균이라도 옮겨 놓았까봐 상처 난 귤뿐 아니라 나머지 온전한 귤 3개도 모두 갖다 버렸다.
그날 이후 인애의 집에는 작은 변화가 두 가지있었다. 할머니의 바구니 금고는 폐업을 선언하듯 사라졌고 쥐덫이며 쥐약이 여기저기 지뢰처럼 놓였다.쥐 때문에 덩달아 수난을 당한 것은 바퀴벌레다. 쥐를 박멸하자는 의지는 이내 그보다 더 많이 출현하는 바퀴벌레를 박멸하자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바퀴벌레를 죽이려고 놓은 재래시장 처방의 싼 약들이 농 뒤나 냉장고, 찬장 가끔은 책상 뒤편에도 놓였다. 의경은 생각했다. 금고만 조용히 처단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은 그다지 적의가 없는 쥐새끼와 바퀴벌레들까지 단두대에 올려놓은 꼴이 된 것에대해서 말이다.
의경은 이때 또 생각했다, 인생은 내가 목적한 대로만 흐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작은 적의는 또 다른 적의를 촉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맹랑함과는 달리 늘 순종적인 운남은 할머니 이귀애에겐 항시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장손이라는 것도 말이다. 할머니 이귀애나 막내고모 김모남에게 의경은 내내 만만치 않은 손녀였다는 것도 말이다.
사진출처: 달동네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운남이 먼 훗날 장가가는 날, 의경은 생각했다. '나의 그리운 할머니이귀애 씨가 이런 좋은 경삿날 함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이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 봉천동을 떠나기 몇 해전, 그러니깐 재개발 보상금을 조율하던 그즈음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초겨울이었지만 더 빠듯해진 살림에 보태고자 봉천6동 동회(현재의 행정복지센터의 옛날 명칭)에서 운영하는 노역에 나가곤 했다. 고혈압과 당뇨가 있으셨는데, 재래식 화장실에서 일을 보시다가 혈압이 올라가 변고가 생기셨던 것 같다.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할머니가 여느 부잣집 그랜드마마처럼 집에서 편히 지내셨다면, 손주들 학교시간에 맞추느라 급하게 일 보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 할머니의 마지막은 그분이 얼마니 희생적이고 배려심이 많으신 존경스러운 어르신인지를 유언처럼 남겨 주셨다.
할머니는 옛날분이라 남아 선호사상이 뿌리 깊었고 시어머니 특유의 꼬장 한 마음과 걸걸한 말이 약점이셨다.그러나 누구보다 이 대가족의 큰 어른으로서 큰 희생을 감수한 분이시기도 했다.우리 집은 9평에 부모님이 모두 계셨는데도, 동회에서 영세민(지금 기초생활수급자) 대상자였다. 국민학교 가정환경 조사때, 아이들이 다 있는데서 반 선생님이 “집이 영세민인 사람은 손 들어 보세요”라고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느꼈던 수치심과 부끄러움, 무너지는 자존심은 국민학교 내내 나의 말수를 줄여 놓았다.
그러나 인생에는 동전의 양면이 있듯, 이 영세민 자격이라는 것도 그랬다. 학교에서 모두에게 까발려지는 것은 너무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집에서 나와 가족들은 여러 혜택을 꽤 받곤 했다. 할머니가 70세 전후의 나이에도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동회에서 동원하는 여러 노역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예이다. 당시 달동네 빈곤층 특히 노인들에게 주요한 일자리 중에 하나는 새마을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1969년 박정희 정부가 대한민국 농촌현대화를 위해 시작한 운동이었는데, 나중에는 지역사회개발 운동으로 확장되어 봉천동 곳곳에서도 곧잘 목격되곤 했다. 할머니가 동회에 가서 노역으로 여기저기 잡초를 뽑고 고된 반나절을 보낸 후 받는 1일 수당이 얼마인지, 월급제로 받았는지 아님 면제나 또 다른 혜택이었는지 가물거린다. 아무튼 할머니가 그런 노역을 며칠을 하고 나면 얼마뒤엔 우리 집에는 쌀 한 포대가 생긴다든지 돈이 생긴다든지 했다.
의경은 할머니의 대비마마 위세에 저항하던 마음으로 비뚤어지다가도,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할머니가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70세이면 일 안 하고 편하게 노년을 즐겨야 한다고, TV드라마는 가끔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TV에서 본 마당이 있는 이층 집의 할머니는 그랬다. 그에 비해 의경의 할머니가 견뎌내야 하는 매일의 일상은 고되고 누추했다. 가끔 슬펐던 것은 할머니가 한 번도 대놓고 일하기 싫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가끔 의경에게 허리나 등이 아프다며 파스를 붙여달라 했던 것이 전부였다. 전라북도 임실에서 상경해서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는 아들 내외와 자손들. 그들을 누구보다 마음 무너지게 들여다 보았을 나의 할머니 이귀애. 아들이자 내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이 심각해지면서,아주 가끔은 아버지가 말리는 할머니에게도 폭력을휘둘러 넘어진 적도 있었다. 언성과 폭언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리고 아들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대놓고 슬퍼하기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며느리와 손주, 손녀들을 챙기며 고통을 삼키셨던 할머니.
사진출처 : 평생 가난한 사람을 찍었던 휴머니스트 최민식 사진작가 (tistory.com)
그래서일까. 의경이 어렸을 때, 그녀는 할머니에 대한 울컥한 연민과 시집살이시키는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뒤섞이며 자주 복잡해졌다. 할머니가 유독 자신의 권세에 반란의 눈빛을 보였던 맹랑한 아이. 아들의 다섯째 딸 오공주의경에게, 아버지 김목수가 그랬듯 살갑게 대할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반란군의경의 저항이 적이 당혹스러우셨을 텐데도 귀여우셨던 걸까. 혹 의경이 틈만 나면 할머니와 부모님을 나중에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며 내내 다짐했던 설익은 결의를 아셨던 것일까.
봉천동에서 가난하다 못해 처참하고 노곤했던 1막만 사시고 호강 한번 제대로 못 받으시고 돌아가신 할머니. 이제 몇 십 년 후면 나도 그할머니 나이가 된다. 화살의 살처럼 흘러간 세월만큼 서럽고 묵직한 회한이 밀려온다.
“할머니 너무 죄송해요. 그때 할머니 금고 바구니의 귤 제가 그런 거예요. 지금까지 우리 가족 아무도 모르는 아니 내 의식조차 묻어 놓았던 불효를 이제야 끄집어 올려 사죄드려요. 정말 너무 죄송해요."
의경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자신의 짧은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하늘을 올려 보곤 한다.할머니가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실 것을 알았다면, 의경은 되려귤을 몰래 숨겼다가 할머니 품에 안겨드렸을 것이기에.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할머니 생각에 의경은 오늘도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떨군다.
"새마을운동에 불려 다니지 않아도 되고 이젠 편히 쉴 수 있는 곳. 아픔과 고통, 슬픔이 없는 그곳에서 귤 많이 드시면서 기다려 주세요. 존경하고 그리운 든든했던나의할머니에게."
의경은 보이는 듯하다. 저 하늘 위에서 가장 밝은 미소로 장남 운남을 응원하며, 말썽꾸러기 오공주 의경을 토닥여 주는 할머니의 인자한 얼굴과 투박한 손이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