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만물이 소생하며 때론 소멸하기도 한다. 계절은 모두에게 동일한 계시를 주지 않듯, 그해 4월 칠 남매의 아버지 김목수는 생명의 소멸을 알렸다.
그가 떠난 빈자리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손재주가 좋은 목수였다고 말이다. 9평 작디 작은 집이 좁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막중한 가장이 고뇌하며 만들어 놓은 작품들 덕이었다. 집 앞 길가에 작은 마루를 만들고 천막을 쳐서 우리는 그곳을 창고로 쓰곤 했다. 부엌 시멘트 맨살에 나무 마루를 만들어 입식 부엌으로 탈바꿈시켜 준 것도, 부엌마루 아래 한 뼘 같은 현관이자 세면실에 조각 타일을 깔아놓은 것도, 부엌과 방에 여러 수납 선반들, 1개의 방이 3개의 방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만들어준 미닫이 문 덕이었다. 창호지의 구색만 맞춘 야리야리한 미닫이 문은 방음도 안 되고 때론 손가락 구멍으로 옆방이 다 보이지만 그것도 그의 걸작이었다.
때론 누군가의 장례식은 슬픔을 마음껏 터뜨릴 수 없는, 그러나 울고 있는 때로는 울어야 하는 작열한 빗줄기가 야속한 그런 날이기도 하다. 쇼팽의 야상곡이 흩뿌려지는 봄의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그해 봄은 한없이 어둡고 무거웠다. 정이 많고 책임감이 남다른 운남은 두렵고 소란한 세상을 수습하고 다독이다 이내 지쳐 잠들곤 했다.
어느 날 그런 무거운 공기를 뚫고 따르릉 전화가 왔다.
어머니 인애를 찾는 전화였다. 운남의 새 학년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성인(오빠의 담임선생님의 가명)이었다. 얼마 후 성인선생님은 어머니와 학부모 상담을 했던 듯싶다. 성인선생님은 운남 학생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운남이 아버지의 부재에 황망해 하던 그해. 공교롭게도 그의 인생에는 다른 어른 남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지식이 가득했고 성숙했으며 사랑을 표현하는데 익숙했다. 그는 마치 아버지가 보낸 친서나 대사인 것만 같았다, 내가 못 해준 것을 대신해줄 전권대사 말이다. 성인선생님은 운남의 그간 인생살이를 더없이 그윽한 공감으로 아파하고 긍휼히 여겨 주었다. 운남은 그 선생님의 남다른 도움으로 무너진 삶,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조금씩 흔들어 펴곤 했다. 성인선생님은 얼마지 않아 운남을 자기 집이며, 그가 다니던 교회로 초청해 식사대접을 해주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9평 집에 고작 한두 평 남짓인 운남의 작은 공간에서 멜로디가 새어 나왔다. 아버지가 유산처럼 남겨놓고 가신 걸작품 미닫이 문 사이로 보이는 통기타를 치는 운남의 모습은 생경한데 이내 익숙해졌다. 그해 여름 성인선생님이 다니던 교회의 여름수련회를 다녀온 후엔 전에 없이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종교의 힘으로 소생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마음과 정신, 영혼에 우주적 강력한 호흡이 닿은 그해를 필두로, 무겁기만 했던 그의 삶에 이유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공부해야 할 이유, 기타를 쳐야 할 이유, 운동을 해야 할 이유, 밥을 먹어야 할 이유. 무엇보다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
그즈음 오빠 운남의 방에는 기묘한 책들과 물건들이 쌓여 갔다. 엠씨스퀘어-당시 유행했던 집중력 향상에 좋다는 뇌파를 이용한 휴대용 전자제품-라는 우리 형편에 고가랄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성경책, 찬송가, 통기타 2개, 다소 어려운 내용의 책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가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잘 보진 못 했다. 학교나 독서실에서 했었는지도 모르나 집에서만은 영 아니었다. 인간에 생의 의지는 때론 늘어가는 물건의 개수, 사고 싶은 물건의 종류로도 가름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미덥지 않은 그의 어떤 구석보단 살아있음에 다행이라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정된 날들이었다.
운남은 자신을 둘러싼 새로운 환경들에 전에 없이 굉장히 열정적이었다. 새로 출석한 교회에서는 출석 1년 만에 이례적으로 고등부 총무를 맡았다고 한다. 교회에서 굉장히 신임을 받는다는 인상이었고 가족들 각자 그 종교를 찬성하네 반대하네 말할 것도 없었다. 운남에게 돌아온 생기에 모두가 쌍수 들어 환영했고 한편으로 크게 안도했다. 수년뒤 어머니 인애도 함께 그 교회에 출석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무슨 종교면 어떠냐는 그 심정이었으리라. 우리 가족들은 전에 없이 이 종교에 포용적이다 못해 허리를 굽히며 연신 읍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남 운남의 변화를, 우리는 조용히 예의 주시하며 때로는 방관하듯 모르는 척 했지만 뒷눈으론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도 운남의 삶은 학교생활보다는 종교생활로 가득 채워지는 듯했다, 적어도 집에서는. 당연히 그해말 대입 학력고사에서 그는 고배를 마셨다. 시험을 잘 본다 한들 운남의 내신성적으로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교에 갈 순 있을까, 나는 아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운남의 대입은 재수, 삼수로 이어졌고 그의 낙방에도 가족들은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다들 그가 살아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감사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자신은 적잖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눈치긴 했다.
운남은 심기일전이 필요했던지 대학 삼수를 끝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를 간 오빠 운남의 빈자리만큼 우리는 조금은 넉넉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삶이 부대끼고 번잡스러운 우리 집에선, 한 사람의 빈자리는 딱 그 정도의 허전함을 남길 뿐이었다. 엄마 인애와 가족들은 톱니바퀴를 돌리듯 가정을 중수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내달렸다. 때론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또 때론 떡방아 찧는 달님 속 토끼처럼.
어느 날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운남. 우리는 변비도 심하고 신경쇠약과 우울증이 아직은 여전한 이 변변치 못한 인사가 못내 걱정이었다. 그런데 운남은 우리에게 놀라운 얘기를 전했다. 군대에 들어가 자대에 배치되고 얼마지 않아 공고가 났다는 것이다. 그 부대 200명의 군인 중 5명만 뽑아 자격시험공부를 하도록 혜택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해 처음 시도한 제도 같았다. 그리고 어떤 채택기준인지는 몰라도 운남이 덜컥 선택이 된 것이다. 운남은 군대생활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자격시험 공부하는데 시간을 쓸 수 있었다, 마치 정재계 유력한 집안 아들에게나 주어질 혜택처럼. 그는 그곳에서 비OOOO이라나 그런 이상한 자격증을 땄다. 별 시답지 않은 자격증을 딴 것 같아 우리 가족은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다만 운남이 군대에서 일명 사무직처럼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다 제대했다는 사실과 고질병인 변비가 오히려 완치되었다는 소식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역시 남자는 군대를 가야 하나보다, 특히 운남 같은 변비 환자는 말이다.
운남은 우여곡절 끝에 중위권 대학에 간당간당 겨우 들어갔다. 운남이 가게 된 대학교가 중위권이라는 것은 여동생의 후한 주관적 수치다. 운남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모 금융기관에 취업을 했다. 그때까지 가족들은 그에게 아주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는 면접을 아주 잘 봤다. 서류전형만 합격하면 면접은 늘 통과했다. 신통했다. 그 금융기관에 몇 년 다니다가 OO공사에 몰래 이력서를 냈다. 그 공사의 채용 자격요건이나 기존 직원들 스펙을 보건대, 운남은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그냥 한번 넣어 본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서류전형에 합격하고 면접일정이 잡힌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최종면접에 합격했다. 그 경력직은 대졸전형으로 전원 외근직으로 빠졌다. 단 한 명 운남만 중요 사무부서에 내근직으로 배치되었다. 이에 고스펙자인 대졸 동기들은 운남의 아버지가 정재계 힘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스펙도 약한 그만 특혜를 받아 내근직이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그가 그 공사에 이력서를 냈는데, 마침 그 공사의 부사장과 운남이 재직 중인 금융기관의 임원이 절친이었던 것이다. 운남의 이력서가 서류전형 중일 때였다. 공사의 부사장은 금융기관의 임원 친구에게 운남이 재직 중 몰래 이력서 낸 것과 그의 평판에 대해서 의견을 물어 보았다 한다. 보통 이렇게 되면 재직회사에선 괘씸죄에 걸려 속된 말로 나가리가 되거나 비자발적 구조정리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운남의 직장 임원은 전혀 다른 답변을 했다 한다. “그 친구 아주 괜찮은 사람이야. 꼭 뽑아. 그리고 좋은 자리에서 써봐, 아주 쓸만해” 그랬다. 운남의 뒷배는 다름 아닌 현재 재직회사의 임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공사에 최종합격했던 결정적인 이유도 군대에서 땄다던 비OOOO 자격증 때문이었다 한다. 우리 가족들은 하릴없이 쓸모 없는 자격증을 땄냐, 컴퓨터자격증이나 따지 했던 그 자격증으로 공사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다. 운남은 남몰래 세상의 트렌드를 읽고 있었나 보다.
고등학교 때 운남이 집에서 공부는 안 하고 틈만 나면 허구한 날 퉁퉁거렸던 통기타 연습. 그 딴에는 이제 막 맡은 교회 총무라는 직분에 충성에 충성을 다하려던 모습이였고, 치유가 더딘 우울증과 신경쇠약증을 극복하려는 몸부림 같았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하란 공부는 안 하고 허구한 날 통기타 연습이라니. 나는 그의 기타 소리가 안심이 되면서도 실은 답답했다. 근데 운남이 직장에서 상사들 특히 임원들의 총애를 받은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이 통기타였다. 직장 회식이나 행사 때면 통기타 연주자를 자처하며 흥을 돋우니 그가 술을 안 마셔도 임원들이 이뻐했던 것이다. 시간낭비인 줄 알았던 통기타 숙련이 직장 경력과 이직에 주요했다는 사실에 나는 혼자 폭소할 뻔했다. "이것이 실화야 코미디야?"
물론 운남은 총명했고 남다른 일머리가 있었다. 그는 스펙은 약했지만 평소 일처리 능력은 어디서나 인정 받았다. 공사에 가서 먼훗날 본인의 아이디어로 직장 시스템을 발명해서 나라에서 큰 상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머니를 닮아 매사에 성심성의를 다했고 진심으로 선배와 임원들을 공경하고 동료들이 요구하지 않는 일까지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었다. 21세기 자본주의 세계엔 다소 낯선 석기시대 남자, 저 멀리 로마 근교 카타콤에서 살다온 남자 같았다. 스펙과 영어능력, 뒷배와 인맥이 성공의 주요 변수라면 이 남자는 회사에서 이용만 당하다 나가리 되기 딱 좋은 호구 사원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엔 희한한 마법가루가 뿌려진 것 같았다. 그의 구닥다리식 진정성에 세상은 미소를 머금고 환대했다. 흡사 콩깍지가 씌는 것 같았다, 운남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게 그를 좋아했다. 한 번도 그를 못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보면 모두 좋아지는 그런 남자 말이다.
그리고 운남이 지니고 있는 이 비밀병기인 마법가루가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아내 다정과의 운명적인 만남때였다.
ㅡ 다음 편 3회에서 계속 됩니다 ㅡ
*전권대사 : 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외교를 맡아보는 최고 직급. 또는 그런 사람. 주재국(駐在國)에 대하여 국가의 의사를 전달하는 임무를 가지며 국가의 원수와 그 권위를 대표한다.
**일머리 : 일하는 방법, 노하우, 요령 등을 뜻하는 말. 보통 일머리가 '있다' 혹은 일머리가 '없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나가리 : 1.화투에서 이긴 사람이 없어 판이 무산된 것을 이르는 말. 2. 계획이나 약속이 깨지거나 중단되어 무산되었을 때를 속되게 이르는 말
****호구(虎口)1.범의 아가리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처지나 형편을 이르는 말. 2.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바둑에서, 바둑돌 석 점이 둘러싸고 한쪽만이 트인 그 속.
****카타콤(catacomb) : 초기 기독교시대의 지하 공동 묘지로서, 기독교 박해를 피해 피난처, 예배처로 사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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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운남의 잭팟(4)
할머니 이귀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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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 목욕탕과 인형놀이 feat. 전태일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5)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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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0)
운남은 오늘도 절대자 임재연습 중
<포레스트 운남 잭팟>의 다음 목차들 (쓸 수 있을지는 고민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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