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Oct 29. 2023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5)

미싱, 목욕탕과 인형놀이  feat.전태일

전태일.

2023년 의경은 오래된 고서와 같은 한 청년의 기록을 살핀다.       


1990년대 패션의 총아로 주목받았던 서울 동대문 시장. 당시 두타(두산타워), 밀리오레 등 패션빌딩들이 들어서면서 대형 백화점들도 바짝 긴장시킬 정도로 호황기를 누렸다. 중국과 홍콩, 일본 등 외국 손님들도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불과 20년 전 수많은 고통과 눈물, 각혈이 난무하던 기구하고 아픈 도시였다. 이것을 아는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은 많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려는 이들은 적었다.      


1970년대 한국 의류산업을 선도했던 동대문 평화시장, 당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2만 5천 명에 이르렀다. 그중 80%가 여성이었고 절반이 10대 소녀들이었다. 소녀들은 시다(수습공) 시절을 보내야만 그럴듯한 미싱사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보통 12살에서 16살 전후, 그러니까 지금의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 나이에 직공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식사 시간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불편한 자세로 하루 15시간 노동은 예사로 견뎌야 했다. 보통 아침 8시에 들어가서 밤 11시에 집에 귀가해야 했다. 추석처럼 대목에는 2주 동안 아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3~4시간만 재우며 일을 시켰다. 그 때문에 졸다가 미싱 바늘에 손을 박히기도 하고 미싱사 보조인 시다들은 가위에 손이 베이기도 하고 다리미에 손을 데기도 했다. 게다가 집이 먼 여공들은 야근 후 막차를 놓치기 일쑤인 데다가 숙박할 곳이 없어서 공장 구석에서 선잠을 자곤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피곤에 쩔어 꾸벅꾸벅 졸며 일했다. 먹는 것도 제대로 못 먹어서 꼬르륵 거리는 배를 부여잡아야 할 때도 많았다. 당시 미싱 시다로 취업하게 되면 하루 일당이 50원으로 한 달 꼬박 일해봐야 월급이 1500원이었다. 당시 학숙집 숙박비는 하루 120원이었으니 얼마나 악스러운 노동 착취였는지 알 수 있다.     


급속한 산업의 발전과 화려한 도시의 발원 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신흥 부자가 된 사람들. 그렇듯 쉽게 번돈, 빠르게 성취한 발전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혹독한 인생 에누리가 딸려가게 마련이다. 거대 자본의 증식과 부의 축적에 소모되고 갈취되는 무력한 인생들. 세상은 이들을 산업역군이니 효자나 효녀라 치켜세우며 한 번 더 그들의 고달픈 입을 막아서곤 했다.     


어쩜 그 시절 여공들은 아련히 희망했리라. 이 시대의 종말을 또한 가난하고 불우한 가족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기를.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잡아 삼키는 타자들에 저항하지 못하는 이들 여공들을 무지한 굴종자라 할지 모른다. 또 누군가는 따스하게 억울한 피착취자라 이름할지도 모르겠다. 타자들이 뭐라 이름하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엄연히 오늘의 현재적 삶이었다는 것이 극악스럽게 끔찍한 리얼리티이다. 노동의 착취. 전태일은 그런 노동의 갈취를 온몸으로 살아낸 1960년대~1970년대 시대 어둠의 총체였다.



전태일(1948년 출생~1970년사망) 출처: KBS


전태일은 대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가내수공업도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그러다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든 뒤 1954년 서울 남대문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가족은 처음엔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했다. 한때 그의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를 다니며 동냥했다. 그러나 봉제 일을 하던 아버지가 취직하여 월세방을 마련하면서 월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다시 대구 중구로 내려갔다. 이후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서 파는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963년 3월 대구 명덕초등학교(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1963년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고 강요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하여 한 때 가출, 집을 뛰쳐나갔다가 3일 만에 귀가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구타하여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아버지에게 재봉 일을 배웠으나 1964년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다시 가출,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와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수습공)로 일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1965년 구두닦이로 구두통을 메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그해 가을 의류제조 회사인 삼일사에서 시다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삼일사에 입사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오십 원으론 어림도 없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그는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 중략-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나 전태일의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방치 당하고 있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한다. 그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시간이 흐른 뒤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한다.

출처 : 전태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출처: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어두운 새벽녘 부엌에서 뿌연 소리들이 둔탁음을 다. 곧이어 언니들이  들어와 자고 있는 의경을 흔들어 깨운다.


“빨리 일어나! 제일 먼저 가야 할인도 받고 넓게 쓴다고”

“.....”


의경은 눈을 비빌 틈도 없이 잠옷으로 입고 잤던 꽃무늬 분홍빛 내복 위로 바지며 상의, 그리고 무거운 겨울 잠바를 덧입었다. 정말 귀찮다가 목구멍 위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의경은 알았다. 1주일에 한번, 예전에는 2~3주에 한번 있는 이 연례행사가 갖는 의미를 말이다. 책상에 인 싸구려 탁상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경은 그렇게 비몽사몽 언니들에게 손을 내맡긴 채 집을 나섰다.


이 여전사들의 소란스러움에 세면실이자 현관 시멘트 바닥은 빗살무늬 신발 자국들로 이내 어둑어둑 해졌다. 이 야무진 행렬에 일빠를 맡은 것은 단연 막내고모 김모남(가명)이었다. 그 뒤를 따라 서열 1번 장녀 사연(가명)과 서열 2번 둘째 딸 애단(가명)이 동생들을 재촉하며 총총걸음으로 뒤따른다. 마치 음지의 모의를 꾸미는 이들처럼 6명의 여자들은 겨울바람, 새벽기운을 헤치고 버스로 한 정거장 반은 족히 될 좁다란 골목길을 추위를 꺾으며 걸었다. 겨울 새벽은 가녀린 입금들로 잠을 깰 것만 같았다.

  

대중목욕탕. 그녀들이 일요일 오전에 소란스럽게 도착한 장소였다. 가끔은 토요일에도 이 의식을 행하지만 대부분 일요일 새벽이 거사를 치르기에 좋았다. 사연은 익숙하게 여자 성인 3명, 학생 3명을 외친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목욕탕. 그러나 새벽에 거이 일빠로 도착한 대중목욕탕은 의례 썰렁하다. 대중목욕탕을 꽃피우는 모락모락 더운 김은 뜨거운 물을 데운다고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의경은 어느덧 터득했다. 사람의 호흡에서 나오는 입김과 그들의 열의에 찬 손동작, 그 반복적 생의 의지와 뜨거운 물바가지의 파동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살아있다는 생명의 증거. 따뜻한 김들은 이내 목욕탕을 휘감으며 모두를 안도케 한다, 그것은 살고자 바둥거리는 인생들의 의지를 집적하기 때문이다. 어쩜 목욕은 고단한 인생들에게는 하나의 의식이 아닐까. 이 겹겹이 싸인 과거의 티끌들을 씻어내며 때론 치열하게 벗겨내며, 전혀 다른 인생이 살아질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차마 희망이라 입에 담기 막막한 오늘에, 그 의미를 숨긴 채 스스로 행하는 자기 기약.


개운하다. 한바탕 초벌 작업을 치러낸 의경은 이 가뿐한 감정이 일어나면 의례 뿌듯했다. 지난한 의식을 어른스럽게 치러낸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지겹게 일어나 목욕비 어른 800원, 어린이 400원의 몫으로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그곳. 당시엔 아직 아파트가 보편화되지 않아 각 집마다 개별 욕실이 거이 없거나 부실하던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대중목욕탕에 가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지위고하, 빈부격차를 묻지 않는다. 간혹 잘 아는 이웃이나 심지어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난다 해도 말이다. 목욕탕에 아늑한 온도는 사람들을 이끈다. 실존적으로 살을 부대끼며 체온과 입김을 모아, 그 제한된 시간만의 인생을 공유하도록 말이다. 모두의 역사는 이곳에서 균등과 조율로 하나가 된다. 



사연과 애단의 야무진 손놀림. 때론 언니들의 손힘은 의경의 눈에 작은 경련을 일으킬듯 우악스러웠다. 목욕비 900원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용하는 자로서의 최선. 치열한 그녀들의 열심. 그것은 몇년 전 어느 밤, 사연과 애단이 풀이 죽어 나무늘보와 같던 때와 사뭇 다르다. 하늘이 무너져라 한숨과 이유, 의미로 퍼즐을 맞추며 밤을 길게 뽑아냈던 그날 밤의 그녀들.


의경이 국민학교 들어가고 한참이 지나서였던 것 같다. 사연과 애단이 돈을 벌어온다는 인식이 들어왔던 것은 말이다. 두 언니들과 대학 아니 공부는 오래도록 내내 집안의 금기어 같았다.      


의경은 그녀의 언니들이 언제부터 직장에 다녔는지 시작은 모른다. 다만 언니들이 직장을 다녔다는 강력한 증거들만 기억에 보존되어 있다. 언니들은 거이 매일 야근이었던 것 같다. 집에 도착하면 9시에서 10시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일찍 오면 7시~8시였는데, 그런 날은 집에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주말과 출근 전후 외에는 언니들을 잘 못 봤던 이유였다.      


의경이 어렸을 때, 어렴풋한 기억 중 하나는 집안에 가끔 희안한 요물들이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인가 집에 1m는 족히 될 '거인 껌'이 생기는가 하면 잘게 자르지 않은' 캐러멜 덩어리' 심지어 캐러멜을 만들기 전으로 추정되는 '왕엿'도 있었다. 씹다가 질겨 지칠 때까지 씹었던 껌, 너무 먹어 입이 달아 얼얼해졌던 캐러멜 덩어리와 왕엿. 가끔은 과자도 먹었던 것 같다. 사연과 애단이 다니는 직장은 그런 신기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흡사 찰리와 초콜릿공장 같았다. 너니온 제과(해당 기업의 가명)는 그 시절 의경의 눈엔 꿈의 직장이었다. 의경은 그런 회사에 다니면 의례 직원들에게 이런 선물을 정중히 나눠 주는 줄 알았다. 일종의 보너스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연과 애단이 좀 일을 잘하는 직원인가 싶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자주 그렇듯 의경이 잠들 때 퇴근하고 큰방에 들어온 두 언니. 의경이네 집은 방이 세 칸이지만 모두 창호지 미닫이 문이라 웬만한 소리는 다 엿들을 수 있다. 다급한 듯 그러나 조용하고 차분한 그녀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인애 포함 네댓명의 여자들이 무언가 오물거리며 얘기하는 것 같았다. 언니들이 야근을 하고 퇴근 무렵이면, 종종 줄줄이 사탕 같은 동생들을 위해서 사 왔던 먹거리. 호떡, 풀빵, 튀김, 귤 등등. 어쩜 몇 안 되는 유일한 간식. 그때 깨어있지 않으면 다음날 동이 난다. 그래서 의경은 묘한 습관이 생겼다. 검정 봉다리나 종이 봉다리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자명종시계의 알람처럼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거의 생존본능과 같았다. 그때 못 일어나면 다음날 먹거리들은 사라지고 냄새만 덩그러니 남곤 한다. 다음날 봉다리만 남은 현장을 목도하는 기분은 어른들 말로 껄정지근하다 못해 이글거리게 한다, 일어나지 못한 자신을 향한 자책으로 말이다.


그날 의경이 작은 방에서 자다가 잠귀가 열린 것은, 그녀들의 목소리때문이라기 보다 귀에 익숙한 검정봉다리의 울렁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이 정도는 다들 봐주곤 하거든"

"우리가 좀 정도가 심했나 보지"

"그게 거기서 걸릴게 뭐야"

"아이참,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해?"


두 딸의 어두운 대화를 지켜보던 엄마 인애는 늘 그렇듯 듣기만 했다. 말을 얹는다는 게 민망하고 미안했기 때문이리라.


그날 이후 의경이는 캐러멜 덩어리도, 거인 껌도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다만 그것들과 맛이 아주 똑같은 캐러멜과 껌을 동네 가겟집 진열대에서 볼 때면, 침만 삼키며 지나쳐야 했다. 아예 안 먹었으면 모르나 맛을 알게 된 기호품이란 어린아이에게도 중독성이 있어, 의경은 한동안 캐러멜 금단증상을 남몰래 견뎌내야 했다.


'언니들은 왜 이 좋은 직장을 계속 다니지 그만둔 거야?'  


당시 엄마 인애가 그랬듯 의경도 이유를 알아들은 것도 같았는데, 이내 그 이유를 머리에서 지우고 또 지웠던 것 같다. 이유를 마음에 담으면 너무 미안할 것도 같고 이젠 마음껏 먹을 수 없는 최애 간식과 엉키는 마음이 생길 것도 같아서다. 망각은 세월이 지나 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아프거나 너무 미안할 때도 그 녀석은 금세 찾아온다. 서둘러 털어내고 잡아타는 다음 버스처럼. 이전 탔던 버스를 현재에 담기 어려울 때 우리는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버스에서 오늘을 집중해서 살아내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누군가에겐 한날의 행복한 달고나가 되기 위해서, 누군가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누군가에겐 성장이 되기 위해서. 남몰래 치러야 했던 고달픈 눈물은 그렇게 세월에 묻히고 세상에 은닉되곤 한다.


그렇게 한동안 집에서 매일 보이던 사연과 애단은 얼마지 않아 또다시 예전처럼 부산한 출근준비를 다. 의경이 보기에 두 언니는 그 시절 예쁘고 고왔다. 집에서 평상복을 입고 있을 때는 의경 자신과 진배없다 여겼는데, 언니들이 화장하고 정장을 차려 입으면 옷태가 아주 그럴듯 했다. 외모 평가에 예나 지금이 야박한 의경이 보기에도 말이다. 의경은 그 당시 언니들이 굉장한 사무직에 새로 취직했다 생각했다.

                                                                            

좁은 공간에서 옷감과 엉켜 일하는 평화 시장 여공원들 <1970.10.9>


그러나 머잖아 막내고모 김모남을 위시해서 이들 세 여자들이 의기투합하는 기운이 자주 느껴지며 알았다. 세 사람이 같은 직장에 다니고 그 직장에서 고모는 조금 직위가 높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작업 반장이라나. 다보상사(해당 기업 가명) 그곳은 인형을 만드는 곳으로, 두 언니는 새로 취직한 그곳에서 미싱을 돌렸다. 미싱사라 해야 할지, 봉재사라 해야 할지 어쨌듯 언니들은 직업이 아니라 이름으로 내내 불렸다. 적어도 집에서는 그랬다.  


다보상사는 우리 집에서 버스정류장으로 대여섯 정거장이 되는 지금의 전철 봉천역을 지나 좀더 한참 가면 나왔다. 의경은 몇 번 엄마 인애와 솜을 받아오려고 걸어서 그곳을 오간 적이 있었다. 일손이 부족했던터라, 국민학교 1학년인 의경도 자기 키만한 솜덩어리를 엄마와 함께 이고 지고 갔던 그 길은 그땐 10 정거장은 넘는듯 했다. 다보상사에서 두 언니가 하루 몇 시간씩 미싱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야근을 하면 돈을 더 받아왔던 것으로 보아 1980년대 당시로선 대우가 괜찮은 줄 알았다. 그보다는 제과 회사 다닐 때처럼 내 손에 콩고물이 또다시 떨어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가끔은 여간해서는 살 수 없는 인형들이 하나둘 생겼다. 매번 완제인형은 없었고 만들다 만 인형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대체로 인형들은 옷을 안 입고 있다든지 눈알이 한쪽만 달리다 말았다든지 했다. 그러면 언니들이 집에서 옷을 마저 만들어 주거나 다른 쪽 눈을 구해다 달아 주었다. 언니들이 이번엔 뭔가 당당하고 숙련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불량품을 가져가는 건 회사도 손해는 아닌가 보다, 의경은 꼬마 철학자인양 생각했다.


이 사업은 나중에 엄마 인애의 부업 아니 주업으로 이어졌다.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비즈니스가 되는 모양새였다. 인형 눈 하나 달면 몇 원, 봉제뒤 옷 뒤집으면, 인형에 옷 입히면, 또 솜 넣으면 몇 원. 내 수준까지 일감이 내려오려면 난이도 조절이 중요했다. 나는 주로 솜 넣기를 했다. 단순한 일을 한참하다 보면 지루할 법도 한데, 나는 엄마, 할머니, 언니들, 오빠, 남동생과 다 함께 둘러 앉아서 하는 이 일이 재밌었다. 게다가 돈이 벌리면 엄마가 50원 주던 용돈을 100원으로 올려 줄 테니깐. 또 이렇게 두러두런 부업을 하다 보면 의례 여기저기서 간식이 날라든다.


의경은 부업하며 온돌방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일상이 따뜻하게 때론 풍족하게 느껴졌다. 그 시절 의경은 '가난'을 배고픔이나 슬픔이라 읽지 않았다. 진짜 배고팠던 기억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쌀밥을 자주 못 먹고 소시지 반찬을 도시락으로 못 가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상하게 아예 굶은 기억이 많지 않다. 굶지 않는 가난은 가난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의경에겐 운 좋게도 따뜻한 울타리가 겹겹이 있었던 터이다. 그러나 먼 훗날 그 울타리가 겪어내야 했던 삶의 파고를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의경은 알았다. 강요된 희생은 간혹 웃는 얼굴로 가면을 쓰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언니들이 적어도 의경 앞에서는 일이 싫다거나 힘들다 시위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의경은 언니들이 화장하고 꽃단장하며 다니는 그 회사를 상당히 좋아하는 줄 알았다.


의경네 집의 작은 번창은 이내 온 동네 소문이 되버렸다. 급기야 인형부업은 그 동네 일대 아주머니들의 비즈니스가 되었다. 김장철도 아닌데, 아줌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며 일하는 모습들은 그 시절 자주 목격되었다. 그 골목에서 몇 안 되는 마당 있는 우리 앞집. 그 집에서도 우리와 경쟁적으로 새로운 부업이 시작되었다. 아이템은 스웨터였다. 다 만들어진 스웨터 앞면과 뒷면을 일감으로 받아다가 마감일정에 맞춰 손바느질로 앞, 뒤를 꿰매어서 완성품을 만드는 난이도 높은 작업이었다. 옷을, 사서 입을 물건이 아니라 돈벌이로 본다는 것은 생경하고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이땐 옷의 디자인이나 색감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웨터 한장에 부업 단가가 얼마야?'

'이거 묶음 10개 다 하면 얼마 받을 수 있지?"


무엇보다 가내 부업의 하이라이트는 점심식사다. 아주머니들이 품앗이하듯 손에서 일감을 놓고 '누구네'로 지칭되는 그 집에 몰려가서 밥을 먹고 오거나 부업하던 일터에 먹거리들을 가져와서 먹기도 했다. 더없이 행복하게 눈을 비벼가며 일하는 동네 여자 어른들 모습. 나는 그들의 성실하고 알뜰하면서 치열한 그러나 상냥하고 여유 있는 삶의 관조가 따스했다. 보기 좋았다.


사연과 애단은 미싱사로 상당히 오랫동안 일을 했다. 사연는 20대 중반인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을 하고도 상당기간 이 일을 계속했다. 다보상사는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겐 다른 회사보단 조금은 성숙된 기업이었다. 다만 야근이 많고 수당이 아주 박했다는 것을 먼 훗날 의경이 알고는 남모래 십퉁거리긴 했다.




다보상사 일을 하면서, 전보다 더 열심히 목욕탕에 다니는 작업반장 막내고모와 두 언니들. 거이 1주일에 한 번은 언니들의 손에 이끌리어 목욕탕을 다닐 때, 의경은 종종 생각했다.


'참, 세상에는 야무지게 깨끗한 인간들이 많아. 난 1년 내내 목욕 안 해도 아무렇지 않은데, 특히 겨울에는.'


그러고 보니 한참 집에 벌이가 안 좋을 때는 겨울 내내 목욕을 한 번도 안 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몇 년은 그랬다.


달동네의 겨울은 돈이 많이 든다. 난방비도 그려거니와, 여름에는 목욕하려면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다가 그냥 끼얹으면 되는데, 겨울에는 아무리 철인이라도 찬바람 들어오는 현관 겸 세면실에서 목욕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우리 집에 딱 두 명의 철인 여성이 계시긴 했다. 할머니와 엄마 인애. 인애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대중목욕탕을 안 갔다. 알몸을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는 게 남사스럽다나. 그러나 그녀가 80세 할머니가 돼서는 자신을 간병하는 딸들 앞에서 훌러덩 옷을 잘 벗고 목욕 때도 딸들에게 순순히 몸을 맡길 때, 세월이 주는 남사스러움에 의경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할머니는 우리와 목욕탕에 다녔던 적도 있었던 것 같으나 언제부터인지 겨울이면 수건목욕을 하시는듯 했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와 한때 같은 방을 썼던 의경은 국민학교 4학년때인가 남학생들의 놀림을 받은 적이 있었다. 찌린내가 난다고 말이다. 의경은 처음에는 그 놀림에 애꿎은 자신을 탓하면 여름 냉수에 여러 번 샤워를 했는데, 나중에 알았다. 그것이 할머니 냄새였다는 것을. 할머니 요강도 그 방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 고민을 엄마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학교에서도 또 집에서도 꽤 이슈가 되었던 것 같다. 그후 제부터인가 내 방의 위치가 바뀌었고 할머니 방은 짐을 좀 더 채운 반면 할머니와 남동생이 같이 쓰게 되었다. 아무튼 찌린내 소동은 반학기를 지나지 않아 말끔히 해결되었다.


의경은 어렸을때 자신의 언니들이 미싱을 아주 잘하는 전문가라서 좋았다. 돈이 없던 시절 언니들은 원단을 얻어다가 집에서 의경을 비롯한 동생들의 옷을 손수 만들어 주곤 했다. 학교에 가면 기성복이 아닌 의경의 치마들은 눈에 띄었고 한바탕 주목을 받기도 했다. 어른 옷에 쓰는 원단에 특이한 디자인 가령 다홍색 빛깔 원단에 앞치마 주머니 같은 디자인과 레이스 치마. 의경은 그때 독보적인 자신의 패션에 어깨가 우쭐했으나 나중에 알았다. 반 친구들 누구도 자신의 패션을 그닥 동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더 삼박한 디자인의 아동복을 입었던 그들이니깐. 그러나 친구들은 의경의 옷이 산 것이 아니라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대목에서는 감탄을 자아내며 부러워했다. 디자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솜씨는 좋다는 얘기다. 그리고 사랑받는 느낌도 묻어난다는 것, 누가 뭐래도 의경이 우쭐할만 했다.


                                                                                                                    



봉천동의 재봉틀은 다행히 어느 해 평화시장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뜨거운 불이나 무거운 투신 같은 얼룩으로 점철되진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오래전 한 청년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쩜 사연과 애단이 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먼훗날 애단은 바로 위의 사연이 일찍 시집간 것은 아버지의 알코올중독과 일이 힘들어서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의경은 그것도 모르곤 가끔 생각했다. 두 언니들이 주중에는 신나게 일하고 주말에는 핫도그나 팬케이크, 김치전 등 온갖 요리를 해주었던 일들에 대해서, 그녀들의 직장생활은 꽤 행복한 것 같다고 말이다. 가끔은 TV에서 봤던 직장 연애와 그녀들의 비밀을 상상하며 의경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다, 화사하고도 밝은 행복이란 단어는 이런 대목에 붙일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어른된 이들이 곧잘 하는 '아닌 척', '묻어두기', '감내하기'의 일환이었을 뿐이라고. 나중에 의경이 좀더 어른이 되었을 때 더 깨달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게 다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장녀 사연은 이제 60세가 되었다. 시집가서도 우여곡절이 많은 여자, 사는 내내 일을 한 번도 손에서 내려놓은 적이 없었던 여자. 사연의 20대 때부터 소망은 전업주부였다. 의경은 그 사실을 자신이 40대가 되어서야 알았다. 그리고 작년부터 사연은 엄마 인애의 간병ㅡ혼자 걷기가 가능해 크게 손이 안가지만ㅡ을 위해 유사 전업주부가 되었다. 의경의 아이디어였고, 의경은 자신의 다소 높은 연봉의 상당 부분을 떼어 간병비 내지는 생활비로 매달 사연의 통장에 입금한다. 사연이 직전까지 주 5일 일하고 버는 돈보다 시세 대비 더 많은 금액을 말이다. 손목수술을 하고도 고된 일을 놓지 못했던 사연. 의경은 언니들이 출가 후, 그 자신이 인애를 봉양하며 고된 가장역할을 맡으면 알았다. 세상에 당연한 희생은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 거금이 생길라치면, 사연과 애단에게 어떤 형태로든 지금보다 더 많이 보답하고 싶다고 말이다.


몇 년 전 애단의 장남 시월은 대한민국 패션대전(실제 대회명)에서 영예의 대상을 탔다. 당시 삼성계열 제일모직(실제 기업명)에서 인턴을 하기도 했던 시월, 그가 대상 받던 날 가족 회식자리에서 동시에 자신의 여자친구 앞에서 했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애단은 지금은 소박하나마 과수원의 여주인이 되었지만 결혼 전과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미싱일을 했다. 시월은 그런 자신의 어머니의 예전 직업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전공을 바꿔 패션 디자인을 시작한 것도 어렸을 때 엄마인 애단이 미싱하는 모습을 보면서 꾼 꿈이라고 말이다. 그때 의경은 조카 시월에게 부끄러웠고 동시에 굉장히 고마웠다. 의경은 어렸을 때는 언니들이 미싱 전문가라서 너무 좋았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그런 언니들을 대놓고 자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른바 MZ세대인 조카 시월이 자신의 예쁜 여자친구 앞에서, 어머니의 과거 직업인 재봉사(미싱사)를 소중한 유업처럼 당당하게 말하는 대목에서 눈이 시려 눈물이 날뻔했다. 


'시월이 녀석 참 잘 자랐네'


지금은 자기 사업하기 위해 독립해서 일하고 있는 시월. 나는 시월이가 그 업에서 엄청난 성공을 못 한다 해도 믿는다. 그는 이미 성공 DNA를 제대로 갖고 있다고 말이다. 희생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고, 희생의 누추함에 대해서 당당히 서명할 수 있는 자신감 말이다. 


국가, 회사 때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혹독한 희생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당연시하는 일부 염치없는 타자들. 리고 그들 고통의 수혜를 받는데만 익숙한 자기애적인 몇몇 아랫 세대. 어쩜 의경은 자신이 그 경계선에 애매하게 끼여있는 존재 같았다. 고통은 나 자신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때론 그 고통은 나를 둘러싼 가족과 타인들의 삶에 더 많이 깊숙이 찌들어 있곤 하다. 고통을 이고 지는 삶은 그래 우리를 성장시킨다.


천동의 회색 달은 오늘도 흐른다. 비 오는 날을 함께 지냈던 회색 달. 맑은 날이 되면 빨래를 꺼내 짱짱하게 널어 말리듯, 우리 인생에 우기의 흔적들도 종종 볕 좋은 태양 아래서 달래듯 올려 보고 싶다.


 빨래가 햇볕에 말라가고 있다. 2020년, 출처: 연합뉴스








ㅡ 다음 편 6회에서 계속됩니다 

.

.

.

.

.

참고 자료

[아침마당 하이라이트] 70년대 교과서 대신 미싱을 잡은 소녀들의 이야기, 미싱타는 여자들 (KBS 20220125 방송) - YouTube

[KBS 역사저널 그날] 평화시장, 지옥의 다락방ㅣ KBS 201013 방송 - YouTube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  연재 목차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

어느 30대 청년의 ㅈㅅ예고 카톡  From.진국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0) 이모, 죽고 싶어요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

어느 흙수저 장남의 꺾이지 않는 인생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2)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통기타로 직장생활 평정한 사원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2)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3)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인연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3)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4)

할머니 이귀애의 단상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4)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5)

미싱, 목욕탕과 인형놀이  feat. 전태일

발행된 글 :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5)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6)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학벌

발행된 글 :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6)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7)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녹색불

발행된 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7) (brunch.co.kr)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8)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보신탕으로 거머쥔 천사 아내 - 첫사랑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9)

우주가 돕는 이 남자의 사는 법 : 불운이 목돈 된 기묘한 불테크(불운테크)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10)

운남은 오늘도 절대자 임재연습 중




<포레스트 운남 잭팟>의 다음 목차들 (쓸 수 있을지는 고민 중입니다)  


00. 도둑놈 잡아 직장에서 갑으로 사는 남자

00. 나거만 과장과의 징검승부

00. 장인 장모의 1등 사윗감 등극 비법

00. 사내 최초 간 큰 육아 휴직남

00. 재테크, 퍼줄수록 들어오는 퍼줌 복리의 기적

00. 여동생의 말은 순종해야 산다

00. 중년 남편은 을이 더 좋아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과 연관된 청년 클레어 글

카프카의 < 변신 > (brunch.co.kr)

우리가 꾸는 꿈 (brunch.co.kr)

<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 (brunch.co.kr)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포레스트 운남의 잭팟(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