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 목욕탕과 인형놀이 feat.전태일
전태일은 대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가내수공업도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그러다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든 뒤 1954년 서울 남대문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가족은 처음엔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했다. 한때 그의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를 다니며 동냥했다. 그러나 봉제 일을 하던 아버지가 취직하여 월세방을 마련하면서 월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다시 대구 중구로 내려갔다. 이후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서 파는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963년 3월 대구 명덕초등학교(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1963년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고 강요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하여 한 때 가출, 집을 뛰쳐나갔다가 3일 만에 귀가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구타하여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아버지에게 재봉 일을 배웠으나 1964년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다시 가출,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와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수습공)로 일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1965년 구두닦이로 구두통을 메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그해 가을 의류제조 회사인 삼일사에서 시다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삼일사에 입사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오십 원으론 어림도 없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그는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그는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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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나 전태일의 몸에 불이 붙은 상태에서 방치 당하고 있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한다. 그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와중에도 끝까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시간이 흐른 뒤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한다.
출처 : 전태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