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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Jan 02. 2024

파스타 요리하는 남자

그는 가끔 씻긴 싫어도 요리는 잘 해줍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열며, 천재는 파스타 요리를 해주었다.


클레어란 조신한 여자는 그 답례로,

그의 검정 양말 두 켤레와 코트 안 주머니에 난 구멍들을 감침질과 공구르기로 바느질 주었다.


연말연시의 연인들은 의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보신각에 가던지, 해돋이를 보러 일출 현장에 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독한 집돌이, 집순이인 우리 두 사람은 편의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혹여 아주 가끔 어딜 놀러 가도 둘 다 사진을 거이 안 찍는다. 얼굴 사진 찍는 것을 즐기지 않거니와 풍경 사진도 거이 안 찍는다.


"음, 여기 사진이야. 인터넷 검색하면 더 잘 찍은 게 많은데, 사진 찍느라 고생할 필요가 뭐 있어? 그지?"

"그럼! 사진 필요하면 집에 가서, 장소 이름 넣어서 검색하면 최고의 샷으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이 수두룩 나오지. 우린 풍경이나 즐기자."


그래, 우리 데이트는 늘 간결하고 편안하다. 군더더기가 없다고나 할까.


연말 우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TV에서 봤다. 또한 해돋이 역시 TV와 유튜브를 둘 다 켜놓고 교차로 보며, 어떤 방송사가 더 절경을 올리는가, 판단하며 보았다. 우린 올라이트를 한셈이나 늘 그렇듯 건전했다. 진짜로.


우리의 12월 31일 진수성찬 상차림도 상했다. 그제 먹다 남은 샐러드, 롯땡마트에서 산 15,900원짜리 초밥과 12,900원짜리 양장피, 30% 할인된 6900원짜리 누드김밥세트 그리고 파스타. 술 대신 구입한 탄산음료와 실론티로 와인잔을 채웠다. 내가 봉사모임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이 연말이라며 선물을 주렁주렁 주었는데, 그중 쿠키 일부도 상차림에 올라왔다.


다른 연인들이나 부부들은 한해의 마지막날이라며, 오성급 호텔 고급 레스토랑에 가거나 심지어 해외여행도 간다는데, 우린 이 정도만으로도 거하게 먹은 포만감이 가득했다. 피곤한 이벤트를 하지 않아서 좋았고 뷔페집에 온 느낌으로 보기만 해도 눈이 호강이었다. 청소년들 수학여행 온 기분도 살짝 들었다. 우리 커플 분위기가 늘 그렇듯 말이다.


특히 오늘 상차림에서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파스타다. 천재가 바로 이 파스타를 요리해 주었기 때문이다. 가끔 그가 요리를 해준다는 사실은 내게 뿌듯한 기쁨을 준다. 1년 내내, 비서나 집사와 같은 나의 돌봄을 받는 남자. 그리고 그것이 기꺼이 아주 좋은 여자. 천재는 재간둥이 같은 그의 필살기를 '요리'로서 빛내곤 한다.


12월 31일 저녁 만찬. 둘 다 사진을 잘 안 찍는데, 이 날 사진 찍으라고 자리를 피해 주었으나 그의 발가락이 나오고 만다 :)


연애 초반에 천재는 말했다.


"요리는 내게 맡겨. 온갖 요리를 다 해줄게"


그리고 실제로도 요리를 해준 적이 꽤 되는데, 대부분 밀키트나 비조리 배달요리였다. 천재가 해준다는 '요리'는 재료 준비까지 다 되면, 딱 요리만 해주는, 초본질적인 요리였다. 그래도 요리가 어딘가? 산해진미를 해준 건 아니지만, 우울해서 삶의 의욕이 바닥인 남자가 내면의 에너지를 응집해서 해주는 요리이니 황송할 따름이다. 밀키트면 어떻고, 비조리 배달요리면 어떻겠는가. 가끔은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짬뽕인 듯, 뽕짝인듯한 요리면 어떠하랴. 나는 본래 연애에 대한 환상이 그다지 없는, 연애 회의론자였다. 허나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망은 있던 터였다. 천재는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서인지, 맛을 잘 낸다. 창의적인 요리를 해도 맛이 다.


스카이 라운지의 뷰가 좋은 값 비싼 레스토랑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나 나나 이런데 사치 부리고 돈 낭비 하는 것을 싫어한다. 둘 다 살아오는 동안 개인적으로 여행이나 놀이동산 가본 것도 손에 꼽는다. 우린 인생을 살아내느라 내내 바빴다. 무엇보다 집돌이, 집순이에겐 최고의 휴양지요, 안식처였다.


앞서 말한 파스타 근사하지 않은가? 근데 너무 환상을 갖지 마시라. 천재네 아파트 입구에 C땡 편의점이 있는데, 마침 컵파스타(컵라면과 비슷한 형태)가  1+1 행사를 하고 있었다. 컵파스타 1개는 3700원인데, 1+1이니 대략 가격은 2000원 미만인 것이다. 2000원 미만의 가격으로 만들어낸 파스타였지만, 비주얼도 좋고 밖에서 사먹은 파스타 보다 더 맛있었다. 그의 손맛이 꾸덕하게 묻어나는 파스타,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유일한 맛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런 멘트를 남겨 주니, 내 머리에선 이미 보신각종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만들어 어"


천재는 작년까지도 우울증 기간 내내 무기력, 귀차니즘에 깊숙이 침잠되어 있었다. 우리가 초반 사귀는 동안엔, 늘 '씻지 않았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 달 넘게 목욕을 안 하는 것은 기본이고 병원을 그만두고 잠시 쉴 때는 머리도 안 감았다.


믿기 어렵겠지만, 병원에 근무할 때는 수술복 같은 파란색 상. 하위 세트를 한 달 내내 24시간을 입었다. 출근할 때 입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또 잘 때도, 하루종일 자기 피부처럼 입고 살았다고 한다. 2~3주 간격으로 빨래를 핑계로, 내가 동일한 다른 병원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권면하면, 그때 파란 피부옷이 교체되곤 했다. 심지어 교회에 갈 때도 그대로 입고 갔다. 물론 그는 고급향수를 자주 뿌리긴 다. 그건 다행이랄까, 첩첩산중이랄까.


그가 '죽고 싶다'는 말만 안 하면 모든 게 다 용납되던 시절이었다.



한 번은, 내가 봉사모임에서 가르치는 아이의 어머니가 그러신다.


"선생님, 우리 똑순이(가명)가 저번 주일에 선생님이 남자친구랑 같이 있는 거 봤다고 하더라고요. 호호호"

"(헉!!!) 아, 네에.."


그 아이는 선생님의 남자친구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을까. 심지어 당시엔 헤어스타일도 톰 크루즈를 따라 한다고 약간 장발이었다. 근데 사실, 제로 보면 톰 루즈 보단 최양락 느낌이 살짝 났다. 장발에 웨이브를 주면 그나마 괜찮은데, 그 당시엔  천재가 우울증이 심해서 머리를 감고는 드라이도 않고 웨이브도 안 주었던 터였다. 그럴 땐 영락없이 여학생 단발핏인 데다, 미용실 가기도 귀찮아해서, 머리 길이가 어깨에 닫기 직전이었다. 이 모든 사달은 다 그의 우울증 때문이었다. 원래는 외모 가꾸기도 꽤 프로급이었을 그인데, 애잔한 연민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내, 너무 웃겨서 웃픈 상황 속에서, 표정관리 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 사실을 사귄지 1년이나 지나서 천재에게 말했다. 그는 자기 헤어스타일이 톰이 아니라 최양락 핏이라는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흉.."


그러고도 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길래, 인터넷에서 크루의 숏컷 사진을 열댓 장 검색해서 보여 주었다. 아가 다루듯 살살 말이다. 그날 그는 미용실에 갔다. 그리고 숏컷의  루즈로 변신해서 돌아왔다. 내 눈에는  크루즈로 보였다, 아니 그렇게 보여야 했다.



연애기간 내내 천재는 자주 기인(畸人)에 가까웠다. 아니 기인이다. 나도 캐릭터가 흔하지 않은 여자인데, 이 남자는 항상 나를 압도하는 기인 열전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거나 꺼리기 보단 재밌고 실은 매력을 느낀다. 나는 단벌신사의 로망도 있었는데, 비록 양복은 아니지만 파란색 병원복이면 어떠하랴. 다만 병원을 벗어난 공간에서 이 남자의 이 의상은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어떤 오해일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렇듯. 우울증의 후유증으로 삶이 무기력하고 만사가 귀찮았던 천재. 그런 그가, 내가 요리해 주는 남자에 흥분하듯 매력에 빠져드니, 전에 없는 에너지와 기를 모아 요리를 해주곤 했던 것이다. 이 어찌 감동이 아니겠는가.


그는 유학시절엔 하루 2번 이상 샤워를 했다 한다. 깔끔했던 그로선, 지금의 자신이 더없이 답답하고 서글플 상황인 것이다. 요즘은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40대 남자 평균보다는 잘 안 씻는다.


그리고 나는 안 씻는  남자에게서, 향수를 안 뿌린 날도 무향무취를 느낀다.


"자기 외계인이 아닐까? 어쩜 그렇게 안 씻는데도 냄새가 안 나?"


근데 최근에 알았다. 실은 내가 비염이 있어 냄새에 무디다는 사실을 말이다. 올여름 잔기침이 오랫동안 있어 병원에 갔다더니, 알레르기성 비염이란다. 순간 천재에게 무향을 느꼈던 건, 단순히 사랑의 묘약 덕분만이 아님을 알고, 혼자 웃음이 빵 터졌다. 어쩜 이 남자를 만날 즈음, 고등학교 때 완치판결을 받은 비염이 재발됐는지 신통방통 신비롭기만 다.


사실 천재가 씻기를 미룬다면, 난 방바닥 청소와 바느질을 미룬다. 그렇다고 집이 더려울 것이라 상상하진 마시라. 워낙 초기 세팅이 깔끔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청소는 잘한다 싶다. 천재네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생각한다. 설거지나 쓰레기 치우기, 화장실 청소는 그런대로 해주겠는데, 이상하게 방바닥 쓸고 닦는 것은 하기가 싫다.


우리 둘의 약점은 다른 커플들이라면 꽤 많이 트러블이 생겼을 일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문제로 다툰 적이 사실상 없다. 서로 좀 참다가 아니다 싶으면 이 정도로만 말한다.


"방바닥에 뭐가 자꾸 걸리네?"


그러면 천재가 이젠 바닥 청소는 했으면 좋겠다는 사인이다.


"알겠어. 자기 소음에 민감하니깐, (자기) 외부강의 있는 날 와서 할게"


그리고 할 때도 있지만, 다시 안 할 때도 있다. 그럼 둘 다 속 편하게 아프리카에 놀러 왔다 생각하고 그냥 지낸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천재가 일을 쉬고 한동안 집에만 있었을 때, 머리감기를 너무 안 해 하얀 친구 곧 비듬이 머리에서 보일 지경이 되면, 나는 말했다.


"머리에 흰 눈이 내렸네?"

"뭐 있어?"

"좀 있는데, 괜찮아. 약속이나 외부미팅 있는 날 그때 감아. 집에서라도 편하게 지내야지. 머리도 끈끈하니. 젤이나 무스 바른 것이 크루 웨이브야"


참고로 천재는 톰 크루즈의 열혈 팬이다. 그러면 이 남자는 또 그걸 칭찬으로 받는다.


"정말?"


그러면서 자연 젤 무스에 눌린 머리카락을 손놀림으로 한 번 더 매만져 준다. 그러나 우린 이내 각성한다. 최양락  헤어스타일은 두 번은 안 한다고 말이다. 그날 그는 미용실에 갔었. 그가 단골로 다니는 미용실 남자 사장님은 그의 머리에 앉은 백색 손님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까? 부디 너그러이 백색 팅커벨-동화 <피터팬>에 등장하는 인물ㅡ요정 잠깐 방문한 것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랄 뿐이었다.


내가 이토록 머리 안 감는 남자에게서, 어떤 불편함도 못 느낄 줄은 몰랐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의 어머니는 매일 쓸고 닦았다 하는데, 방바닥 청소에 한해 귀찮음을 느끼는 나를,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기다려 준다. 어떨 때는 이런 농담도 하면서 말이다.


"방바닥을 걸으면 (먼지) 숲길을 헤치는 것 같아"


이 정도 나오면, 여자의 수치다. 바로 일 들어간다.





3~4년 전 천재의 어머니가 암으로 몇 달 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후로 작년까지, 천재가 잘 씻지 않는 것은 우울증이 심각하다는 강력한 신호였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들은 내담하는 환자가 오면 육안으로 위생상태를 먼저 체크한다고 한다. 천재는 그의 주치의가 메모하는 내용을 실은 대충 읽어내고서 나에게 얘기해 준 적이 있다. 그는 주치의 의사에게 자기도 의사라사실을, 작년에 처음 말했다고 한다. 그래, 주치의 선생님은 급하게 갈 거 쓴 정신과 진료 메모를, 그의 환자가 대부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안 셈이다. 아니 지금도 모를지 모른다.


어느 날은 병원 다녀온 후 이렇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위생상태에 '불량'이라고 표시하더라"

"응? 그 메모가 눈에 보여? 시력 대개 좋다"

"정신과 메모 양식을 아니깐. 대략 보면 알지"

"자기가 (주치의인) 의사 선생님 메모를 인지하고 있는 거 나중에 알면, 소스라치게 놀라시겠다. 하하하"


그리고 올해 어느 대목에서, 그의 주치의 선생님은 천재가 뭐 하는 사람인지 포털 사이트의 프로필로 처음 알고 놀란 기색이었다고 한다. 직장도 다니다 말다 하는 한심한 한량 같은 통통한 40대 독신남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근데 자기 신상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도 그간 상담이 가능했을까? 그게 진짜 사실이라면, 천재는 이 대목에서도 기인이다.  


우연찮게 서로의 인생 속도가 맞물러, 씻지 않아도 청소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지금. 그는 좀 더 씻는 횟수가 많아졌고 나는 청소에 마음 쓰는 횟수가 많아졌다.






새해 첫날 우린 늘 그렇듯 함께 재택산책을 했다.


"오늘 (내가) 대청소 해줄까?"

"그냥 하기로 한 것만 해줘. 바느질 말이야. 그래도 힘이 남으면 대청소는 그때 생각해 보자."


갑자기 기분이 상할까 말까, 나는 재택산택 도중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바닷 게처럼 옆걸음질 치며 반항하듯 비뚤비뚤 어긋 걸었.


"봐봐! '게' 할거야. 게 데리고 걷는 기분 어때?"

"어, 언능 앞서서 걸어."

"응?"

"개는 (옆이 아니라) 앞서 걷는 거야"


내가 입을 내밀고 말이 없자, 채근한다.  


"말 좀 해보지"

"( 소리를 흉내내며) 왈왈. 왈왈"


한국 버전 '멍멍'이 아니라 아메리칸 버전 "왈왈"로 개 흉내를 내는 나를 보며, 천재는 웃음이 터지고 만다.  


"(네가 방금) 개라고 해서, '왈왈' 한 거야. 어때?"


그는 못 이기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우리 아버지 개띠인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헉!!!"

"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그 위에 널 뛰는 놈 있는 거. 명심해!"


나는 개그 배틀에서 한수 위로 진화한 자신을 확고히 하며 말했다.


"뭐래니?"

"아무 말 대잔치지"


그리고 허리 째기 한방을 보내준다. 허리 째기란 오늘 그의 살이 얼마나 빠졌는지 허리둘레를 쟤주는 나만의 방식이다. 뒤에서 허리를 감싸서 둘레를 쟤준다.


"오늘은 (허리둘레) 현상 유지"


 그리곤 천재옆으로 바짝 붙어 말했다.


"나 같은 캐릭터 여자 처음이지?"

"나니깐 감당해 주는 거야"

"왈왈왈 멍멍멍"


천재는 딸내미 재롱 보듯 웃으며 그의 팔을 내밀었다. 그럼 나는 철봉 턱걸이하듯, 그의 팔에 덜렁덜렁 매달리는 흉내를 내며, 오붓하게 거실과 부엌을 걷는다.


그날 나는 조신하게 바느질을 완수했다.

우리는 새해 첫날, 멍멍이와 옆으로 걷는 게를 넘나들며, 소란한 듯 아주 평온한 하루를 열었다.








※저희 짝꿍 천재(가칭)는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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