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년 클레어 Jan 19. 2024

삼만이의 코피 발바닥

40대 독신남의 다이어트는 처절합니다

다이어트 전쟁.

연초가 되면 살을 빼려는 사람들의 결의로 하늘이 휘청이고 땅들이 들썩인다. 그것은 간절한 염원이며, 마음 졸이는 필연이고, 멋지고 아름다운 날선 턱의 희망이다.


천재의 다이어트 역사는 퀴퀴한 고서처럼 서사가 길다. 그것은 일반인들의 작심삼일과는 비견할 수 없는 비범함의 역사이며, 동시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존재의 가벼움, 그 열교차점이었다.



얼마전 과자계의 오래된 고전인 '인디안 밥'을 혼자 몰래 먹다가, 천재에게 들켰다.


그날도 천재네 집에 가서, 천재의 음악실(건반과 뮤지션들이 가질법한 기계, 칠판, 책장 등이 있는 방)에서 평소처럼 직장일을 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는 본래 직업 외에도 취미활동으로 음악 작곡도 했었고 미술, 사진, 글쓰기, 디자인, IT 등에도 재능이 있다. 천재는 그 방을 잠정 '클레어의 방'으로 내준 지 오래 되었다. 내가 일에 천재네 가서 밀린 직장일을 할 땐, 의례 이 방을 사용한다.


그날, 며칠 전 마트에서 샀다가, 천재 몰래 책상 밑에 숨겨 놓은 인디안밥이 자꾸 발에 걸렸다. 그래 혼자 그 인디안밥을 꺼내서 꾸물꾸물 먹고 있는데, 내 노트북 모니터 옆면으로 날쌘 그러나 투박한 실루엣이 다가왔다.


"뭐해?"


천재가 굉장히 서운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내 과자봉지를 쳐다 보았다. 나는 그의 다이어트를 도와 주는 사람으로서, 먹거리를 줄때와 뺐을 때를 잘 조절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날 나의 판단은, 나 혼자 먹는 게 낫다였으나 왠지 분위기가 요상하게 흘러갔다.


나는 눈치껏 남은 인디안밥을 천재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라도) 먹어"

"뭔데?"

"인디안밥"

"안 먹어"

"어, 인디안(언)을 무시하는 거야? 미쿡한테도 핍박받고 자기한테도 무시 당하고. 인디안(언)이 무슨 죄야?"


나의 과격한 개그에 천재의 눈이 땡그래지며 흔들거렸다. 나는 순발력 있게 말했다.


"앗! 오늘도 개그가 너무 갔다"


나는 마저 상황을 수습을 하려고, 이거 브런치에 써야겠다며 '잠깐만'을 외치며 화제를 전환했다.





사실, 천재 몰래 간식을 먹다 들킨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구름땅콩버터 샌드. 순수발효 버터 100% 구름같이 부드러운 빵. 메이저 기업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이 노브랜드에 가까운 샌드위치를 천재는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열량이 높아서 반쪽씩 한 세트 이상은 못 먹게 한다.


몇 주 전 마트 갔다 때마침 구름땅콩버터 샌드가 매대에 있길래, 남아있는 수량 2개를 후다닥 챙겨서 샀다. 집에 도착해서는, 천재에겐 미처 아니 결코 말하지 않고 바로 야채서랍으로 직행했다. 냉장고는 천재에겐 고뇌의 상징이요, 통곡의 벽이기 때문이다. 그 냉장고에서 그나마 천재의 목표물 표적에서 벗어나곤 했던 지점은, 바로 야채서랍이었다. 천재는 귀찮은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허리를 구부려 서랍을 여닫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재네 아파트는 꽤 넓다 보니 거실에서 부엌의 전경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부엌에서 5분 이상 안 나오면 천재는 자주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자기 시야에서 내가 벗어나면 심심하다고 또 외롭다고 오버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는 부엌에서 내가 저지를 모의가 정당한지 불의한지를 빼꼼히 수사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리란 것도 말이다.


그날도 천재가 거실에서 노트북으로 뭔가에 집중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나 역시 크림빵을 좋아하는지라, 이 하얀 구름빛이 나는 샌드위치가 그날따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 어차피 천재는 1개 이상 먹으면 안 되니, 내가 미리 쐐기를 박듯 1개는 먹어 두자 생각했다. 그렇게 샌드위치를 1/4쪽을 몰래 먹었다. 그런데 1/4쪽은 정말 간지러운 식욕의 여운을 남겼다. 그래 샌드위치 1/4쪽을 마저 먹자 생각하고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그 1/4쪽을 집으려던 찰나였다.


그때 키 180cm가 넘는 이젠 좀 날씬해졌지만 아직은 거구인 검은 그림자가, 내 곁눈으로 캐치되기도 전에,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다가왔다.


"뭐해?"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 일상적인 멘트에도 나는 화들짝 놀라, 그만 냉장고 윗짝에 머리를 찌고 말았다. 그것도 상당히 아프게 말이다. 근데 다음 순간 천재의 외마디가 내 뇌리에 박혔다.


"앗! 벌 받았다"


천재는, 냉장고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나를 보고는 데굴데굴 웃었다. 그가 보기에도 상당히 심하게 냉장고에 꽝 부딪혔던 것이다. 하지만 천재는 내 머리를 염려하기보다 부딪힌 냉장고 부분을 만지며 말했다.


"(냉장고는) 멀쩡하네 (다행이다)"


나는, 이 남자의 언변에 질소냐 여걸의 맛을 보여줬다. 내 발로 천재의 엉덩이를 어퍼컷 응징한 것이다. 실은 어퍼컷 흉내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눈이 땡그래진 천재는, 그제야 자신의 행적을 돌이켰는지, 아니면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생각했는지, 할리우드 액션을 취한다.


"어이쿠, 아파라!!!"


나는 인정머리 없이, 눈에 힘주어 그러나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한번 더 해줄까?"

"...."


그리고 냉장고에 찐 머리가 진정이 되자 말을 이었다.


"에잉! 인기척을 하고 나타나야지 놀랐잖아"

"(부엌에서 5분 이상 안보이니깐) 뭐 하는지 궁금해서 그랬지"

"엉?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같이 먹자 하면 (자기) 다이어트 방해하는 거잖아"


그때 천재의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순간 내가 진실만을 말한 것이 맞나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 남자의 소 내지 사슴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너무 웃겨서 개그 욕망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날은 분위기상 자중하며 천재에게 남아있는 구름 구름한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천재는 최근에 과도한 다이어트로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다. 바로 족저근막염이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재택산책이 이 정도로 유용한지 몰랐다며 신나했다. 처음엔 하루에 5 천보로 시작하더니 1만 보, 2만보를 걷기 시작했다. 내가 무리라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하루에 3만보를 걸었던 그즈음 그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며칠간 연속으로 3만보 전후로 걷던 어느 날, 코피가 나고 만 것이다. 발바닥도 통증을 호소했고 병원에 갔더니 진단명이 족저근막염이었다. 그날부터 그의 별명은 (다이어트 한다고 하루) 3만보 걸어 탈이 났다하여, '삼만이'가 되었다. 하루 만보는 좀 과하지 않는가. 근데 천재의 별명은 그간에 그의 인생을 많이 닮아 있다.


이 남자는 뭐든 시작하면 중간이란 게 없다. 중학교때 이미 소설을 썼던 남자다. 그의 말로는 영화 '접속'이 개봉되기 한참 전에, 그 비슷한 스토리로 소설을 썼으나 가만히 집 서랍에 넣어 두었단다. 그의 중. 고등학교 시절, 그가 PC통신 쪽에서 무명의 맥가이버로 날렸던 일화, 고등학교때 반친구들이 돌려보던 1인 연재 글노트를 썼던 청소년, 대학교때는 사진에도 심취해서 결국 동아리를 만들었고 급기야 전국대회 1등을 거머쥐기도 했다. 내가 그의 CV(영문이력서)를 처음 봤을 때, 이건 '사기 캐릭터'다 느낄 정도였다. 어떻게 한 사람이 제한된 시간동안 이 모든 공부와 퍼포먼스를 성취해 냈을까 싶었다.


그는 대학교 3학년 방학때도 다이어트한다고, 하루에 4~5시간씩 산을 타고 20km 행군을 했다 한다. 다이어트한다고 1주일 꼬박 금식도 하는 남자다. 탕자 같이 방황하던 시절엔 술, 담배를 하다가도, "나 끊겠어" 하면 바로 끊는 정신 승리의 1인자였다. 그의 정신과 주치의 선생님은 이런 그를 보며, 절제력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며 기인처럼 봤다 한다.


그런 그이지만, 금번 다이어트의 업다운은 그리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가 보다. 특히 어머니 돌아가시고 20kg 넘게 급격하게 불어난 체중은 그에겐 담기 어려운 숙제였다. 절제력의 정신 승리자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늪, 그것은 그리운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이었다.


천재는 외동아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이렇게 단출한 가족이었다. 그나마 아버지는 그가 대학교 졸업하고 이듬해 곧 유학 가기 직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남은 세월을 오롯이 어머니와 함께 산 것이다. 천재가 유학시절 빼놓고는 서울에서 자취나 하숙 등을 일절 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의 지인들이 거이 대부분 서울 근방에 있었지만 편도 평균 1시간 이상 막히면 2시간 거리를 감수하며, 이 아파트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신 지도 만 3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천재의 집에는 어머니의 유품과 옷, 신발, 쓰시던 성당의 묵주 심지어 핸드폰까지 그대로 있다. 핸드폰 요금도 여전히 내며, 어머니를 향한 천재의 피 끓는 사모곡은 현재 진행형이다.


천재네 집에 처음 간 날, 그가 햄버거산의 현자로 남은 것은 그런 연유였다.




ㅡ  <삼만이의 코피 발바닥> 2편은 다음에 연재됩니다 ㅡ










*족저근막염 : 발바닥 근막의 통증을 유발하는 염증. 발바닥 전체를 모아 주는, 섬유성 띠 모양의 발바닥 근막이 단축돼 긴장함에 따라 체중을 견디지 못하여 염증이 생긴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아프다.

※저희 짝꿍 천재(가칭)는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그림,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매거진의 이전글 ■제 짝꿍은 독신남이고, 천재작가 아니에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