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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Aug 30. 2023

독거동 산 81번지를 스케치하다

독거동 이웃들은 어떻게 살까요?


4-5년 전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그렇게 백발의 할머니를 뵙게 되었다.  '독거노인 섬김'이라는 이름으로 닿게 된 만남이었는데, 난 처음엔 계면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우울증을 앓던 어떤 언니가 봉사를 원하셔서, 그분을 돕는다고 함께 간 자리였다. 사실 난 봉사나 선행이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던 터라, 만천하에 드러나지게 되는 이런 봉사가 부담이었다. 차라리 기관이 아닌 곳에서 만났다면 아무도 모르게 섬기며 은밀한 나눔의 기쁨이 클 것이란 아쉬움도 있었다. 그런데 언니는 한주만 가고 사정이 생겨 내가 그 일을 도맡게 되었다. 그런 탓에 처음 2년여 동안은 우리 가족들도, 내 절친한 지인들도 할머니의 존재를 거이 몰랐다. 그런데 자꾸 다들 내가 비밀연애 하는 줄로 오해하고 서운해하셔서 급기야 오픈하고 말았다. 한편으론 은밀한 봉사라는 명목으로 남몰래 아집을 부리는 나의 소아를 책이라도 하고 싶었다






올해 90세인 할머니는 사실 자녀들이 있긴 하셨다. 젊은 날 재혼을 하셔서 친아들 외에 양딸들이 몇 분 계셨더랬다. 그런데 아들은 알코올중독에 생활력이 거의 없으시고, 따님들은 다들 이혼 등으로 형편이 빠듯하긴 마찬가지셨다. 작년 9월 할머니는 갖고 싶은 생일선물을 묻는 내게, 신발을 사고 싶다고 2만 원짜리 아줌마 구두를 가리키셨다. 더 좋은 거 신으시라 하셔도 난 이게 좋다며 그렇게 고집하셨다. 오늘 안 얘기지만, 내가 선물드린 이 신발도 아끼느라 한번 신고는 비닐에 넣어 보관하셨다 한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되어가던 할머니와의 만남. 그런데 저번 주말에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실은 며칠 전 내 친구 아들이 그 할머니 준다고 하얀 목도리를 직접 짜서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 목도리를 전달드리려고 할머니와 약속한 날이었다. 부랴부랴 달려갔을 때는 이미 산소호흡기를 끼시고 말을 하지 못 하셨다. “이 목도리는 하시고 가셔야 한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데, 폐까지 내려간 산소호흡기를 힘들어 하시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난 사람 앞에선 눈물을 잘 안 흘리는 편인데, 그 다음날 출근길 차 안에서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따라 유난히 성애가 끼어 흐릿했던 차창은 마치 눈물 흥건한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다음 날도 그랬다. 허벅지를 꼬집고 손을 쥐어봐도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어 두툼한 목도리에 눈물을 숨겼다. “괜히 정을 주었어. 괜히 정을 주었어..” 수 십 년 전 학교 근처 문방구점 주인 아주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10명을 만나면 10명 모두에게 진심을 주려다 상처받기 쉬운 타입이라고. 그냥 예닐곱한테만 진심으로 해도 된다며. 그렇게 여러 상념 속에서 준비가 된 듯 준비되지 않은 이별 앞에, 나는 억지로 마음의 단도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장례식장에 가기 전에 수도꼭지를 조절해야 할 텐데, 이번에도 하필이면 차 안에서. 어렸을 때 내게 비친 장례식장의 풍경은 살아있는 자들의 '야속한 오늘'이었다. 떠난 자들을 슬퍼한다면서, 밥은 넘어가고 오늘이 살아지는 그들이 정말 진심으로 떠난 자들을 사랑하고 슬퍼하는 것일까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누군가를 떠나보내고도 잘 살아내는 산 자들의 강인한 생활력이 야속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오늘 나는 어떤 장례식장에서 보다 밥을 꾹꾹 열심히 먹었다. 이내 강인한 생활력은 슬픔을 숨기고 떠난 자를 눈물에서 가슴으로 모셔 내리는 대관식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말씀하시곤 했다. 죽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며 오랜 병치레를 하면 안 되는데 하시며. 심지어 치매 등으로 시설로 보내져 손이 묶여 고생하는 왜곡된 노년을 상상하며 손사래를 치시곤 했다. 그런데 그 마음의 간절한 소망대로 갑자기 응급실에 가신 후 일주일 만에 눈을 감으셨다. 걱정하던 병원비는 구청의 지원을 받아 면제받게 되었고 장제비도 일부 지원받게 되었다. 할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생각하며, 월 1만 원 장학금 지원과 주위의 중국교포, 막노동 어르신, 병든 어르신들에게 김치며 1-2만 원씩 돈을 나눠 주시곤 하셨다. 진정한 섬김은 없을 때 하는 것이라던 그 마음, 삶으로 교훈 주셨던 만큼 나에게 주어진 숙제의 양이 두툼한 듯하다.



신이 인간에게 준 놀라운 선물 중에 하나가 착각과 망각이라고 한다. 차창의 흐릿한 풍경처럼 세상에 구십 해를 살다 간 분은 점점 잊히겠지만, 그 망각과 비례해서 강인한 생활력으로 그 삶이 보여준 구십 해의 무게를 이어 살아내야 겠다. 할머니의 친지들께서는 장례 때 관속에 못다 매신 목도리를 함께 넣으신다 한다. 내가 선물 드리려던 바로 그 목도리를. 그래 가는 길이 춥지 않으실 거라고.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그동안 사랑하고 감사했습니다."





                       2015. 2. 7 토요일 오후, 청년 클레어






 






*'독거동'은 가상의 동네 이름으로 '홀로'를 강조한 것이고. '산 81번지'는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봉천동 산 81번지에서 따왔습니다. '산 81번지'는 몸이 또는 마음이 가난하지만 그것을 견디어 살아내는 삶에 대한 은유적 명칭입니다.


**후기: 상기 글은 8년 전엔가 썼던 에세이입니다. 오늘 비 오다 흐린 창가를 보며 문득 생각나서 올립니다. 올해로 10년 넘게 세분의 독거어르신을 순차적으로 섬기고 있는데요, 그중 두분은 소천하셨어요. 그분들과의 이야기도 종종 풀어내겠습니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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