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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Dec 05. 2024

가장 가치 있는 일이란

조금만 마음과 시간을 내면 할 수 있는 일

아래글은 보석 같은 작가님들을 소개합니다 매거진 중에서  <4.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서두글에서 발췌합니다.


한주가 금세 지나갑니다. 1주일 만에 스터디카페 인수를 완료하고 또 2-3주 만에 리뉴얼을 거이다 마무리했네요. 내가 운영할 것도 아니고 도와주는 일에 이렇게까지 혼신의 힘을 써야 하나 싶다가도 문득 짝꿍과 그런 대화를 하곤 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는 일중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사람을 영육 간에 살리고 회복시키는 일이야"  


짝꿍은 이런 나의 말에 "그럼 한번 해봅시다!" 라고 응수하곤 합니다. 


부창부수 같다랄까요. 얼마 전 짝꿍이 박사 학위를 받았던 미국 모교에서 좋은 제안을 주었습니다. 부학과장님이 한국에 오시고 친한 미국인 모교 선배가 한국에 와서, 연달아 만나고 간 뒤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미국에 가서 살 필요는 없는 일이라 금상첨화고요.  


"절대자는, 소외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보는 인생들을 궁극적으로 들어 쓰시곤 해."


클레어는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짝꿍이 계속해서 사람을 돌아보고 돕는 일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길 바라고, 그런 저의 마음을 묵묵히 따라주는 이 남자가 참 좋습니다 :)




 


 







“내가 ‘난장이’를 쓸 당시엔
30년 뒤에도 읽힐 거라곤 상상 못 했지.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읽힐지,
나로선 알 수 없어.
다만 확실한 건
세상이 지금 상태로 가면 깜깜하다는 거,
그래서 미래 아이들이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며
눈물지을지도 모른다는 거,
내 걱정은 그거야.
 
ㅡ 조세희 작가 인터뷰 중 ㅡ






코로나19로 지구가 멈춰버리기 시작했던 몇 해 전, 그렇다 벌써 몇 해 전이 되었다. 속절없이 애석하게 사라져 갔던 숱한 이름들이 있었다. 어떤 이별은 느닷없다 말하기도 숭고한, 예고되어 있는 실존의 상실이건만, 예의 저항감을 일으키는 급작스런 멈춤이었다.


어른이 되고도 한참 동안 먹고 살기 바빴다. 종교는 안식처처럼 내 삶의 난문에 답을 지어 주었다. 이른바 성공자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계발서를 읽어 댔고, 지식자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서양의 철학, 심리, 역사, 공자왈 맹자왈 등 유식해 보이려 고전들을 간간히 보았다. 간간히가 맞을게다.


소설, 에세이, 시 등 이른바 문학이라 일컬어지는 분야는 내게는 다소 사치처럼 느껴졌었다.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에게 문학허구는 도피를 부추기는 열병 같았다. 현재를 파고 또 파듯 매일이 치열한 자에게 그것호사스러운 여유 같았다. 매일의 숙제가 막중한 누군가에겐 가끔 오늘의 직무유기만 같았다. 그래 청소년기 이후론 문학에서 한참 멀어졌었다. 언제, 어떤 용기 아니 객기였을까. 대형서점 문학 매대의 책들에  다시금 손을 올려 가름하게 되었던 때가.


한때 핑계와 명분, 이유를 나열하며 멀어졌던 문학서적 사이로 언제가 한번 읽어 보고 싶었던 기묘한 소설책들이 있었다.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그런 책중 하나였다. 코로나 때 들려온, 이 소설을 쓴 어느 작가의 비보가 남다르게 다가왔던 이유였다. 2023년 5월 11일 발표된 코로나 종식 선언을 5개월여 남긴 2022년 12월 크리스마스 때였다.


작가였던 그는,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익숙하고 당연한 존재였다. 미루고 또 미루는 습관은 이내 우리의 안일한 신뢰에 배반의 돌직구로 되받아 치곤 한다. 이왕 읽을 책이었다면 미리 읽어 멀리서나마 생색이라도 낼 것을, 아쉬운 미련이 못내 아까웠다. 작가를 먼저 알았던 책, 그 치명적인 한 사람의 부재란 아련한 회한으로 스며들었다.


글을 쓰며, 기상천외하게 작가의 꿈이 부풀어 오르다가도, 당장 한 줄이 아쉬운 뻣뻣한 글촉은 허황되게 부풀어 오른 풍선의 허풍을 터트리고 만다. 때론 글을 쓰며, 읽히지 않을까 아니 누군가는 읽되 영구적이지 못할, 이 글자의 축적이 허망해 보이기도 하다. 글쟁이의 기념이라 하나, 세상 도서관에 즐비한 읽히지 않는 숱한 책들처럼, 오랜 기다림을 감수하며 번호표만 하염없이 붙들고 있을 '먼 미래의 나의 책'에 대한 안쓰러움에 절필의 유혹도 밑돈다. 


종종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아득해질 때, 그래도 써야 할 이유를 절절하게 호소하는 글들은 그래 작가의 희망으로 피어오른다. 시대가 누락한 아니 누군가 기만하고 일부러 은폐한 그 지점은 자주 침묵으로 꺼져버리곤 한다. 그 은닉한 시간과 공간, 현장에 내달아 당도해서는 쉼 없이 열기를 품어내며 타이핑을 한다. 작가의 시대고발 정신은 어쩜 개인고발 정신 이상으로 막중한 유난이며 매혹이다.





빈곤사회는 고래로 늘 있어왔다. 동시에 빈곤은 늘 우리 가까이에서 숨죽여 지내곤 한다. 입을 열지 말라 강요 당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들 빈곤은 자주 상품화, 소재화, 선전화에 노출되기도 한다. 빈곤이 있어야 할 곳은, 본래 그 위치의 부당함만큼 엉뚱한 곳에서도 한 번 더 부당하게 호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빈곤을 배설하고 쓸어 담는 세상의 폭주하는 문자와 영상, 소식들은 흡사 형체 잃은 전쟁을 방불한다. 빈곤을 논하고 빈곤을 말하지만, 정작 빈곤의 원형은 달아난 듯한 소음 일색들에 피로감이 밀려온다. 빈곤을 이용하고 소비하는 매체, 그 어디메에 진정 빈곤을 적실하게 마주할 용기 있는 작자가 있을까. 빈곤을 그 어디에서 건져 올려야 진주 같은 진가가 드러날지를 아는 것, 어쩜 작가란 소재의 단편적 나열이 아닌 그 소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 아니 그 소재가 마땅히 부여 받아야 직위와 위계를 정당히 부여하는 일이 아닐까. 백화점 매대의 화려하게 나열된 상품 가짓수의 하나가 아니라 전쟁터에 내던진 채 그 틈바구니에서 소리 없이 고개 내민 들풀 같은 실체로서 말이다. 그렇게, 소재의 정밀하고도 치열하며 내밀한 아우성을 경청하고 바라바줄 단 한 사람, 작가는 무거운 렌즈를 등에 지고서 고독히 이 하루, 이 시대를 조망하고 조명하는 일에 심호흡 가쁜 걸음을 내딛는 존재가 아닐까.


조세희 작가는 살아생전 자신의 책이 300쇄를 넘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는 현상을 기뻐하기 보다 괴로워하고 마음 아파했다 한다. 이미 종식됐어야 할, 어느 가정의 고통이, 어느 시대의 치부가 여전히 상존하는 현실을 탄식했다 한다. 글을 쓰지 않는 날에도 카메라를 들고 노동자들의 삶을 담으며, 글의 소재란 대상을 애지중지 남몰래 아끼고 아꼈던, 그 치열한 작가의 불꽃정신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작가의 외적 요건이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이른바 잘 나간다는 작가가 멋진 외제차를 몰고, 빌딩을 사고, 명품을 사들이고, 고가의 해외여행을 해야 '성공'이라 이름할 수 있다 여겨지는 한축의 은밀한 모의가 불편하다. 글의 소재을 찾아 얻어낸 글감은 속절없이 소비되어 탕진되고 마는, 일회용 플라스틱의 위상으로 내던져지는 그 지점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대상을 소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치열하게 고뇌하고 함께 아파하고 지독하게 주려, 몸부림쳤을 어느 작가의 외로운 밤들을 자간에서 읽어내는 일, 책을 읽기 전 작가를 몇 번이고 아련히 추억하고 싶었던 이유였다. 


누군가의 공석(空席)이 이토록 안타깝고 애처로운 그리움으로 남는 일, 그런 사건이 우리 생애 내내, 세상 어딘가에선 일상처럼 내내 상속되길 희구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ㅡ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ㅡ





*공석(空席):  사람이 앉지 아니하여 비어 있는 자리. 결원으로 비어 있는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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