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난민촌 이야기/2편
'미스 카쿠마'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비포장 흙길을 달려
또 다른 카쿠마 난민촌 학교로 향했다.
차에 탄 낯선 동양인들을 본 아이들은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들었고, 몇몇 아이들은 흙먼지가 날리는 우리 차를 따라 달렸다. 수도에서 벗어나 외진 마을로 들어갈수록 동양인을 볼 기회가 적기에 신기해하는 눈동자가 많아진다. 마을에서 마주치는 갓난아기들은 내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놀라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에 웃는 얼굴로 무마해보려 해도 울음소리가 더 커져 멋쩍은 적도 있다. 피부색이 다른 동양인이 얼마나 낯설었을까.
학교에 도착해 교실로 들어서니 아이들이 노래로 반겨준다. 아프리카에서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마을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춤과 노래가 빠지지 않는다. 첫 아프리카 출장을 와서 들었을 때는 가슴이 벅차기도 했었다. 직접 들어보면 사람들이 왜 '흑인 소울은 남다르다’ 하는지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것이다.
환영 인사가 끝나고,
차례로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는 아이들.
“남수단에서 온 데이비드예요.”
“저는 부룬디인 이시무에입니다.”
“소말리아 출신 아하메드예요.”
귀여운 아이들의 자기소개에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런데 한참을 듣다 보니 어딘가 이상하다. “아이들 국적이 다 다르네요?” 슬쩍 옆에 있던 현지 동료에게 물으니 쪽지에 무언가를 적어 건넨다.
남수단 7명, 부룬디 4명, 소말리아 2명, 콩고, 르완다, 에티오피아, 북수단, 케냐까지. 한 교실에 8개국에서 온 35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쪽지를 보고 한 아이, 한 아이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보니 조금씩 생김새가 다르다. 눈이 크고 동글동글한 느낌의 케냐 아이, 팔다리가 길쭉하고 모델 포스가 풍기는 남수단 아이, 눈매가 깊어서 사슴눈 같은 에티오피아 아이.
외국 여행을 갈 때면, 사람들이 '곤니치와' '차이나?'하고 말을 건네는 게 기분 나빴었는데, 막상 내가 반대 입장이 되고 보니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더 자세히 바라봐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아이들은 어쩌다 한 교실에 모인 게 된 걸까?
그 뒤엔 다양한 사연들이 있었다.
딩카족과 누에르족의 부족 갈등을 피해 온 남수단 소년. 인근 국가들과의 분쟁 및 오랜 내전을 겪은 소말리아 소녀. 기후변화 등으로 인한 식량난에 피난을 온 에티오피아 소년.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부모님과 어린 동생, 친구를 잃기도 했다. 세상은 이 아이들을 '난민'이라고 부른다.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이슈나, 요즘도 뉴스를 통해 종종 들리는 시리아 난민 사태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어인 난민. 그 뜻을 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난민(refugee) :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
예기치 못했던 이유들로 살던 동네, 고향, 나라를 떠나 난민촌이라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정착한 아이들. 이곳 난민촌 학교에서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배우며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해 간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어려움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와 문화, 전통을 배우며 자란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한 교실에서 공부하게 된 거예요. 아이들에게 이 상황은 매우 낯설죠. 히잡을 쓴 친구, 다른 부족어로 말하는 친구, 처음 접하는 나와 다른 친구들의 모습에 아이들은 당황하게 돼요. 나의 엄마와 아빠에게 해를 끼친 부족 출신의 아이가 같은 교실에 있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해요. 집안의 원수처럼 느껴지는 아이가 같은 반에 있다면 마음이 얼마나 어렵겠어요."
학교 선생님께서 차분히 말해 주신다. 난민촌 학교이다 보니 선생님 중에서도 난민이 있고, 반 아이와 적대 관계인 부족의 출신인 경우도 있어서, 아이들은 큰 혼란을 겪는다고 했다. 직접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기에 그 아픔이 얼마나 클지 함부로 짐작할 수 없지만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Peace leads to forgiveness’
(평화는 용서로 이끌어줘요)
‘Peace Enhances integration’
(평화는 더욱 통합될 수 있게 해요)
교실 벽에는 아이들이 직접 쓴 문장들이 붙어 있다.
교복과 책 등을 지원하고 학교 건물과 화장실을 짓는 1차적인 지원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상처를 보듬고 갈등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 기관은 아동 평화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방과 후 활동(?) 같은 개념이다. 일주일에 2번 정도 평화를 주제로 한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해서 부르기도 하고, 갈등 상황을 풀어내는 방법을 토론하거나 역할극으로 배운다.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어느 부족 출신의 아무개가 아닌, 공놀이를 좋아하는 아무개'로 친구 그 자체를 알아가는 것이다.
“이곳에서 함께 평화를 배우고 있어요. 저는 이제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친구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제 꿈은 대통령이에요. 오랜 전쟁으로 눈물을 흘리는 제 고향 남수단에도 평화를 전하고 싶어요.” 남수단에서 피난을 온 한 남학생은 말했다. 이제 모든 친구를 사랑한다고.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과 선생님과 동료 NGO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었을까.
취재를 마무리하고 교실을 떠나기 전, 짧게나마 아이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주어졌다. 부끄러워서 안 한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함께 간 팀장님이 '낯선 이방인이지만 자신들을 응원하는 누군가가 와서 전해준 메시지가 아이들에겐 오래도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라는 말에 용기를 냈다. 프레젠테이션에 익숙한 나임에도 똥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 앞에 서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러분,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마워요. 그 이야기들은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어요. 저와 우리 기관의 비전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마음껏 꿈을 꾸고 꿈을 이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에 있는 정말 많은 분들이 여러분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어요. 저는 이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멀리서도 여러분을 기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서투른 이야기 속에 담긴 나의 진심이 전해졌기를 바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연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본인들이 직접 만든 노래를 들려줬다.
“Peace is important everywhere~
Peace is important everywhere♬”
(평화는 어디에서나 중요해~
평화는 어디에서나 중요해♬)
노랫소리를 뒤로하고 차에 오르며,
다시 한번 마음으로 기도했다.
어른들의 전쟁.
그로 인한 분노와 아픔이,
아이들에게 대물림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