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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김미생 Jul 01. 2020

어둠 속에서도 다시, 생명은 태어난다

미얀마 난민촌 이야기/2편

다소 충격적이고 정신없었던 첫 날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게

다시 아침을 맞았다.


오전 7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며, 우리 일행은 숙소에서 싸준 도시락을 소중히 손에 쥐고 차에 올라탔다. 보통 시내에 호텔 등 숙박 시설이 모여 있기에, 우리가 취재하는 난민촌이나 마을은 숙소에서 한두 시간 이상 차로 이동해야 하는 편이다. 식당 또한 잘 없기에, 이동 시간을 아끼려 도시락을 싸가 차에서 점심을 해결하곤 한다.

차로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새 도착한 난민촌 입구.


전날 신었던 장화를 다시 신고,

눈에 조금은 익숙해진 난민촌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 만난 친구는,

작은 체구의 13살 소녀였다.

다리에 총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2017년 미얀마 소요사태가 발생했던 날, 소녀의 부모님은 차가운 총구 앞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소녀는, 얼마간 기절했다 일어나 보니 커다란 바구니에 실려 있었다. 다리에 상처를 입어 걸을 수 없는 소녀를 안전하게 피난시키기 위해, 이웃사람들은 10여 일의 피난길 동안 서로 번갈아가며 소녀를 실은 바구니를 어깨에 짊어졌다. 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소녀는 이곳 난민촌에 무사히 도착했다.


인터뷰를 이어갈수록,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소녀의 표정이 어두워져 갔다. 아이의 아픈 기억이 되새김질되는 것 같아, 우리는 아이와의 대화를 멈추었다. 그리고 보호자인 할머니와 대신 이야기를 이어갔다. 불길이 치솟고 총성이 오가던 소요사태 속에서, 할머니는 자식과 며느리를 하늘에 보냈고 손녀마저 잃어 벼렸었다. 간신히 챙긴 어린 손자들과 피난을 온 할머니는, 난민촌에 도착해서야 손녀와 재회할 수 있었다.


"손녀를 영영 다시 못 보는 줄 알았어요. 여기서 어렵게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한참을 안고 울었어요. 어린 동생들도 누나를 보곤 울음을 터뜨리더라고요. 그 날 이후로 손녀딸은 부쩍 말수가 적어졌어요.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도 하고요. 그날의 기억이 큰 트라우마가 되었나 봐요. 제대로 된 병원이 있었다면, 총상 입은 부위도 잘 치료하고 심리 치료도 했을 텐데,,,. 아이의 심리 상태가 너무 걱정돼요. 부모도 없이 힘들어하는 손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제대로 된 의료 지원도 심리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 열악한 주거환경과 부족한 식량, 생필품만큼이나,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  




이런 난민촌의 어려움을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충격적이었던 건,

바로 화장실과 가로등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용 식수터를 사용중엔 아이들

앞선 글에서도 적은 것처럼, 난민촌에는 제대로 된 화장실이나 샤워 시설도 없고 전기 배선도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구호기관에서 나누어준 작은 손전등이 어둠을 비추는 유일한 빛. 밤이 되면 아이들은 어둠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둠을 틈타서 성범죄 등이 발생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길을 잃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 기관을 비롯한 많은 NGO 기관들이 가로등과 화장실 설치에 힘을 쏟고 있지만, 90만 명을 넘는 난민촌 사람들을 모두 수용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런 환경은 여성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빛이 사라진 밤이 되어서야, 여성들은 비닐포대로 엉기성기 엮어 만든 공용 샤워실에서 몸을 씻을 수 있다. 그나마도 '누가 훔쳐보진 않을까, 들어오진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생리기간이면 더욱 곤란하다.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제대로 씻을만한 위생 시설이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생리대를 포함한 속옷 등의 위생용품도 매우 귀하다. 같은 여자로서 그 어려움이 더욱 공감되어 마음이 아팠다.



북적북적한 난민 텐트 사이로 다소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 보니, 갓난아이를 품고 젖을 물리는 엄마들이 보인다. 산모들의 작은 쉼터인가 보다. '아, 이 곳에서도 새 생명이 자라고 있구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텐데, 새삼 놀라웠다.

쉼터에서 만난 산모들의 모습

"산파 출신인 난민 이웃이 아이를 받아 주었어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닦아줄 수건도 제대로 없었죠." 아이를 임신한 채 피난길에 올라, 이곳에서 출산을 겪었다는 한 어머니는 말했다.    


현지 동료에게 물어보니, 미얀마 난민촌에서 하루 평균 60명의 아이가 태어난다고 했다. 아이의 국적은 어떻게 되는 걸까? 미얀마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으니 미얀마 사람일까? 난민촌이 위치한 방글라데시가 국적일까? 난민촌(Refugee Camp)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국가에도 속하지 못한 채 난민(Refugee)으로 등록된다.




고향을 떠나온 미얀마 사람들이 난민촌에서 살게 된 지 벌써 4년 남짓. 내가 출장으로 갔을 때가 벌써 2년 전이니, 그 사이 수천의 아이들이 새로 태어났을 것이다. 아이들에겐 빼곡한 비닐천막이 세상의 전부이겠지.


요즘은 정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방글라데시 정부에서는 난민촌 내에 정식 학교를 설립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입장에서는, 미얀마 난민 사람들이 하루빨리 본국인 미얀마로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일 거다) 그래서 난민촌 아이들은 NGO 기관들이 세운 임시 학교와 아동 센터에서 공부를 한다. 국적이 없고, 학교가 없고, 우리 집이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아이들.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며, 사회적 거리두기로 학교가 문을 닫고, 재택근무를 하고, 병원이 폐쇄되는 경험을 하는 요즘이기에, 난민촌 아이들의 삶이 아주 조금은 피부에 와 닿는다. 몇 년 전 다녀온 미얀마 난민촌 출장이 갑자기 떠올라 글을 써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 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곳에서 태어났을 새로운 생명.

그리고 소중하고 작은 아기를 품에 안았을 누군가.

기억 속 희미해진 난민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빛도 희망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곳에서도,

생명은 언제나 꿈틀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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