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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목요 Mar 29. 2024

그림책 <바다의 얼굴들> 작업노트

 01.

아마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누가 일을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었던 나는, 바다를 주제로 그림을 그려 그게 스무 장 넘게 모이면 작은 책으로 엮어보자고 마음먹었다. 팔리든 안 팔리든 어쨌거나.



일어날 수 없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어나 앉아있을 기운이 나면 그림을 그렸다. 그건 수입으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견디는 건 너무 무서웠다. 연필을 쓰는 게 가장 마음이 편했고 면밀히 파고드는 작업을 하다 보면 잊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02.


그림책학교를 졸업하며 만든 더미북을 몇몇 좋아하는 출판사에 투고했다.(가만히 있으면 일이 들어오냐고, 직접 문을 두드리라고 했던 선생님 말씀을 떠올리며.) 돌아온 반응은 세 줄의 거절통보 혹은 무응답 둘 중 하나였다. 사실 나도 그 작품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많이 상심하진 않았다.




한 출판사에서만큼은 조금 더 긴 답장이 왔는데 내 작품의 좋았던 점과 하지만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 응원의 메시지를 덧붙인 내용이었다. 물론 거절의 메일이었지만 나는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03.


몇 번인가 계절이 바뀌었다. 여전히 종이를 검고 고르게 칠하는데 집중하고 있던 어느 날 DM이 왔다. 내게 정성스런 거절의 메일을 보냈던 출판사로부터. 꿈인가. 내가 그리던 바다 연작 그림들로 함께 그림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왜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조용한 카페의 창가 테이블. 난 아마도 캐모마일차를 마셨던 것 같다.(진정에 도움이 되니까) 대표님은 왜 바다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물으셨고 ‘제가 바닷가에서 살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됐는데… 바다를 떠나오고 나서야 바다를 그리워하게 됐거든요.’ 이런 대답을 했던 것 같다.


그 그림들에 이야기를 붙여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난 글을 써본 적 없는 사람이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글을 자주 쓰는지 워드를 자주 쓰는지 그런 어이없는 걸 물었다. 그날 밤 메일로 출판 계약서가 도착했다.




04.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분간이 잘 안 갔지만 난 이 출판사의 책을 좋아했다. 이곳의 책은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그런 책을 만들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잘 못하더라도 이곳에서 어떻게든 잘 만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는 무책임한 기대를 하며(죄송합니다...) 책을 만들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글을 쓰려고 보니 난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만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떠나온 바다에 대해서 그리고 다시 만난 바다에 대해서 쓰기로 했다. 쓰는 일은 어려웠다. 자꾸만 내가 쓴 단어에 마음이 찔려 눈물이 났다. 내가 쓰면서 내가 울다니 주책이 따로 없었다.




05.


글을 다듬으며 스토리보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특별히 번뜩이는 좋은 생각은 나지 않았고 조금 쓰고 그리고 고치고 또다시 쓰고 그리고 고쳤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도무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장면은 오랜 시간 빈칸으로 남아있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안되는 일에 매달리며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빈칸을 그대로 둔 채 그림 작업에 들어갔다. 계속 그리다 보면 미래의 나는 조금 더 나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06.



하얀 종이가 무섭다.
종이는 너무 티 없이 하얘서 내 실력이 낱낱이 드러나 보인다.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고 도망치고 싶을 때 나는 그림 위에 ‘천천히’라고 쓴다.


천천히 해도 돼, 종이를 망쳐도 돼,

다시 종이 살 돈은 있으니까.


마음에 몇 겹의 용기를 두르고 나서야 종이를 더럽힐 수 있다.




07.


막상 손을 움직이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달려가게 된다.

한 장을 완성하면 끝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곧 이게 최선이었나?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이게 최선이라는 것을 목구멍으로 삼켜야 다음 장을 그릴 수 있다.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고 삼키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날들이 이어졌다.




08.


산책하며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오던 봄

전기세를 걱정하며 에어컨을 틀지 말지 고민했던 여름

해가 지면 강가에 나가 걷고 뛰었던 가을

웅크리며 온기를 지켜낸 겨울


모든 계절을 한 작품과 함께하며 빈칸을 채워갔다.

그 시간들이 연필 선 위로 구불구불 녹아있다.

나의 부족함이기도 최선이기도 한 모습으로.







곧, 나의 첫 그림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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