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에서 처음으로 향한 곳은 섬의 서쪽 시칠리아에서 처음으로 향한 곳은 섬의 서쪽 끝, 절벽 위에 자리한 마을 에리체였다.
해발 750미터. 숫자로만 보면 실감이 나지 않지만, 산에 오르자, 공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고 풍경은 저 아래로 멀어졌다. 이곳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지 않는 곳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육중한 성문을 통과하자, 마을은 중세의 얼굴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를 맞았다. 돌로 쌓은 성곽과 낮은 건물들, 좁은 골목과 계단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점심을 먹고 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외벽이 벗겨진 성당, 이끼가 낀 돌담, 골목 사이에 매달린 가로등, 작은 광장을 둘러싼 노천카페와 기념품 가게들. 에리체는 ‘중세 마을’이라는 말이 가장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무어인의 얼굴이 남긴 이야기
기념품 가게마다 빠짐없이 진열된 도자기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랍식으로 장식된 얼굴 모양의 도자기, ‘무어인의 얼굴’이라 불리는 시칠리아의 상징이다.
그 뒤에는 다소 섬뜩한 전설이 전해진다. 사랑과 배신, 분노와 집착이 뒤섞인 이야기. 사실 여부를 떠나, 이 도자기 하나에도 이 섬이 지나온 시간이 겹겹이 스며 있는 듯했다.
성채처럼 서 있는 대성당
에리체 대성당은 화려함보다 단단함이 먼저 느껴지는 건축물이었다. 신을 위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방어를 염두에 둔 듯한 모습. 이곳에서는 종교와 삶, 전쟁과 일상이 분리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잘 닦인 산책로에서 만난 풍경
골목을 빠져나와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시야는 점점 열렸고, 절벽 아래로 바다와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베네레성이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름처럼 신화와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성이었다.
발리오 정원의 오후
녹음이 짙은 발리오 정원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아래로는 에리체 마을이, 멀리로는 또 하나의 성당이 보였다. 이 섬에서 성당은 늘 풍경의 일부였다.
노점에서 팔고 있던 작은 인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손녀에게 주려고 도안을 구입해 직접 만든 인형과 아주 닮아 있었다. 아무리 글로벌한 시대라지만, 한국에서 만든 인형과 거의 같은 모습의 인형을 이 작은 산골 마을에서 마주치다니! 이 마을과 뜻밖의 연결고리가 생겼다. 여행이란,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마음을 붙잡는다.
하늘과 바다가 만든 풍경
그날의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푸른 하늘 아래, 바다는 고요했고 트라파니의 염전마저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시칠리아 여정의 시작은 이렇게 행복했다.
첫날의 끝, 팔레르모에서
해가 기울기 전, 에리체를 내려와 팔레르모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정원으로 나서자, 몬테 펠레그리노가 도시 위로 묵직하게 서 있었다. 정상의 작은 성소는 이 도시가 품어온 믿음과 시간의 흔적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칠리아에서의 첫 숙소 빌라 이기에아는 품격을 간직한 호텔이었다. 정원과 바다, 그리고 느린 밤공기 속에서 우리는 여행의 첫날을 조용히 마무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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