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중심 도시 팔레르모는 2,7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곳이다. 구시가지에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야자수와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도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 도시는 단일한 얼굴이 아니다.
구시가지의 큰길을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자, 풍경은 급격히 바뀌었다. 회벽이 벗겨진 담장, 속살을 드러낸 벽돌, 곧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건물들. 화려함과 쇠락이 한 도시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하나의 표정으로 묘사되기를 거부한다.
노르만 왕궁, 권력의 흔적
팔레르모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노르만 왕궁과 팔라티나 예배당이었다. 이곳은 시칠리아가 가장 빛났던 시기의 기억을 간직한 장소다. 한때 요새였고, 이후에는 왕의 거처가 되었던 공간. 도시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황금빛으로 가득한 예배당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선은 자연스럽게 위를 향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황금빛 모자이크가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성서의 이야기를 담은 장면들이 눈부시게 빛났다. 지난해 피렌체에서 보았던 성당들의 프레스코화가 차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아랍풍의 벌집 모양 목재 천장과 기하학적 무늬의 바닥 타일은 벽면의 황금 모자이크와는 또 다른 양식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문화와 양식이 충돌하지 않고,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이어지고 확장된 황금빛
팔라티나 예배당의 황금빛은 이 도시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체팔루에서 시작된 모자이크의 전통은 팔레르모를 거쳐 몬레알레로 이어졌다. 세 성당은 서로 닮아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몬레알레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이 도시 안에서 이미 충분히 그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팔레르모 대성당, 혼합의 미학
팔레르모의 건축은 늘 ‘혼합’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른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팔레르모 대성당이다. 여러 차례의 증축과 개조를 거치며 서로 다른 양식이 겹겹이 쌓였다. 하나의 양식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 도시다운 모습이 되었다.
이곳에는 노르만 왕 루지에로 2세와 그의 가족들이 잠들어 있다. 종교 건축물이면서 동시에, 시칠리아 역사의 한 단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였다.
도시의 중심에서 만난 장면들
두 개의 큰 도로가 만나는 곳, 콰트로 칸티에서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났다. 네 개의 모서리에 자리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조각상과 분수, 둥근 곡선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극적이면서도 정제되어 있었다.
조금만 내려가면 프레토리아 광장이 나온다. 하얀 나체 조각상들이 둘러싼 분수 앞에 서자, 피렌체 예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실제로 이 분수는 피렌체에서 만들어져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수치의 광장’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지금의 눈으로 보기에 그것은 우아한 아름다움의 정수였다.
팔레르모를 떠나며
도시를 둘러본 뒤, 우리는 체팔루로 향하는 길에 작은 시골 마을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관광객의 자취가 거의 없는 마을이었다. 식당을 나서자 따뜻한 햇살 아래 펼쳐진 소박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이었지만, 그 순간 마음이 한결 느슨해졌다.
팔레르모는 화려함과 낡음, 권력과 삶, 성스러움과 세속성이 한데 뒤섞인 도시였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그 위를 우리는 잠시 걸었을 뿐이다.
겹겹의 시간 속을 통과한 하루는 그렇게, 다음 도시를 향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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