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소도시 여행 ⑤
피렌체의 서쪽에 자리한 피사는 한때 제노바, 베네치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해상 공국이었다. 이슬람과 가장 활발히 교역하던 도시 중 하나로, 중세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이전까지 가장 풍요로운 도시로 꼽혔다.
하지만 13세기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피렌체 공국에 합병되며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아르노강의 퇴적작용으로 해안선이 서쪽으로 멀어지면서 항만도시의 기능도 잃었다.
그럼에도 피사는 교통의 요지로 남았고, 대리석 가공업과 근대 산업이 자리 잡았다. 문예의 중심지로도 번성했으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수학한 대학 역시 이 도시에 있다.
현지에서 ‘Pisa’는 우리가 익숙한 ‘피사’가 아니라 ‘피자’에 가깝게 발음된다. 이 작은 발음 차이 하나가 여행자의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든다.
피사의 주요 관광지는 미라콜리 광장(Piazza dei Miracoli)에 모여 있다. 성당과 사탑의 내부를 보지 않고 외관만 둘러본다면 30분이면 충분하다는 정보가 있어, 우리는 피사를 잠시 둘러본 후, 기차로 20분 거리의 루카까지 하루에 함께 보기로 했다.
피사에서는 무엇보다 날씨가 중요하다. 야외에 머물며 사탑의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주 내내 비 예보가 이어졌지만, 월요일만 유일하게 맑다는 예보를 믿고 일정을 그날로 정했다. 결과적으로 선택은 옳았다. 하루 종일 맑았고, 대신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아침 7시 53분,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피사로 향했다. 약 1시간 20분 정도 걸렸다. 피렌체에서 사탑으로 갈 때는 피사 중앙역(Pisa Centrale)보다 한 정거장 뒤의 피사 산 로소레(Pisa S. Rossore) 역에서 내리는 것이 훨씬 편하다. 산 로소레 역에서는 도보 7분이면 미라콜리 광장에 닿는다. 다만 이 역에 정차하는 기차가 많지 않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미라콜리 광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방향 표지가 잘 되어 있어 헤맬 일은 없다. 성곽 앞 광장에는 기념품 노점이 늘어서 있고, 그 너머로 붉은 돔을 얹은 세례당이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성곽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야가 갑자기 탁 트인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 잔디 위에 우아하면서도 묵직한 세례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피사 두오모 대성당, 그리고 마침내 기울어진 사탑. 이곳이 바로 ‘기적의 광장’이라 불리는 미라콜리 광장이다.
아침 9시 무렵이었지만, 사탑 앞에는 이미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여기서는 누구나 같은 포즈를 취한다. 기울어진 탑을 손으로 떠받치는 척, 혹은 밀어 올리는 척. 우리도 예외 없이 그 줄에 섰다.
피사의 사탑은 1173년, 피사 출신 건축가 보나노 피사노가 대성당의 종탑으로 짓기 시작했다. 공사는 여러 건축가의 손을 거치며 무려 200년에 걸쳐 이어졌고, 1372년에야 완공된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탑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문제는 땅이었다. 남쪽 지반이 약해 공사 초기부터 탑은 기울기 시작했다. 보강을 거듭하며 완공은 했지만, 기울기는 멈추지 않았다.
현재 탑은 약 5도 정도 기울어 있고,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는 1미터 가까이 난다. 붕괴 위험으로 1990년 일반 공개가 중단되었고,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2001년 다시 문을 열었다. 지금은 40분 간격으로 제한 인원만 입장할 수 있다.
피사를 이야기할 때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사탑 꼭대기에서 낙하 실험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사실 제자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도시는 그 전설과 함께 기억된다.
세례당은 흰 대리석의 원통형 건물 위에 붉은 돔을 얹은 형태로, 단정하면서도 우아하다. 내부의 공명 효과로 소리의 울림이 크기로도 유명하다.
산타 마리아 아순타에게 봉헌된 피사 두오모 대성당은 규모와 위엄에서 단연 돋보인다. 전성기 피사는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을 넘어서는 성당을 꿈꾸었고, 11세기 최고의 건축가와 기술자들을 동원해 토스카나식 로마네스크 양식의 걸작을 완성했다. 피렌체가 훗날 두오모 대성당을 지을 때, 시에나와 피사의 성당을 넘어서고자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피사 두오모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성당 내부도 보고 싶었지만, 아직 개장 전이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루카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탑 앞에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한 장 더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피사 산 로소레 역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보이는 지하도를 건너지 말고 오른쪽에 있는 역사로 먼저 들어가 표를 끊어야 한다. 그날은 역사가 잠겨 있어 무인 발매기로 표를 산 후, 지하도를 건너 루카행 기차에 올랐다.
기울어진 탑을 뒤로하고, 이날 하루의 다음 장면을 향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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