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낙엽 쌓인 성벽 위를 걷다

토스카나 소도시 여행 ⑥

by 필로트래블

푸치니의 고향 루카(Lucca)는 피사의 북동쪽, 피렌체의 북서쪽에 자리한 도시다. 피사에서 기차로 20여 분. 아침 일찍 피사를 빠르게 둘러본 우리는 10시 20분쯤 루카에 도착했다.


루카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최근 가장 설득력을 얻는 이야기는 이렇다. 기원전 180년, 로마와 로마의 팽창을 막으려 했던 리구리안 족 사이의 전투 끝에 승리한 로마가 이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것이다.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루카는 번영을 이어갔다. 기원전 56년에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삼두정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역사의 큰 물줄기가 스쳐 간 자리다.

11세기, 실크 무역을 기반으로 다시 힘을 얻은 루카는 1160년 루카 공화국을 세우고 르네상스 시대까지 베네치아 다음 가는 도시국가로 성장한다. 그리고 수많은 분쟁 속에서도 1799년 프랑스에 함락되기 전까지 꿋꿋이 독립을 지켜냈다.


나폴레옹의 누이 엘리자 바치오키가 통치하던 시기를 거쳐 1860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현재 이 도시의 인구는 약 9만 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우리가 그동안 다녀온 토스카나 중세도시 중 루카가 유일하게 평지 위에 자리한 도시라는 사실이었다. 관광객은 많지 않았고, 동양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도시는 조용했고,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의 동선

오늘의 계획은 주요 성당과 귀니지 탑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뒤 성벽을 걷는 것.

안내 지도에는 푸치니 생가 박물관 → 산 미켈레 포로 성당 → 필룽고 길 → 안피테아트로 광장 → 산 프레디아노 성당 → 귀니지 탑 → 산 마르티노 대성당 → 성벽이라는 코스가 추천되어 있었다. 이 코스를 따르면 시내 중심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성벽을 오르게 된다.


우리는 사전에 지도를 구하지 못해 성문에서 가까운 곳부터 발길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남쪽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간 뒤 성벽으로 오르는 동선이 되었다. 성벽을 절반만 걷는다면, 지금 돌이켜보니 이 선택도 나쁘지 않았다.

산 마르티노 대성당

역을 나와 레지나 마르게리타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걷다 보면 붉은 벽돌의 육중한 성벽과 산 피에트로 성문이 나타난다. 성벽 밖에는 절벽과 해자 대신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루카 성벽


루카, 산 피에트로 성문


성문을 통과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루카의 두오모, 산 마르티노 대성당이다. 6세기에 처음 세워지고, 8세기의 재건과 수차례 확장을 거쳐 1070년 공식적으로 축성된 성당. 이후에도 수 세기 동안 손질을 거듭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흰색과 회색, 분홍빛 대리석이 어우러진 파사드는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상단 아치의 기둥들은 하나같이 서로 다른 표정이다. 아레초에서 보았던 산타 마리아 델라 피에베 성당이 떠올랐다.


루카, 산 마르티노 대성당


중앙 아치 오른쪽 위에는 망토를 반으로 잘라 거지에게 나누어 주는 〈산 마르티노의 기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마상은 모작이고, 진품은 성당 내부에 보관되어 있다.


루카, <산 마르티노의 기마상> 모작(좌), 진품(우)


귀니지 탑


성당 북쪽으로 걸어가 귀니지 탑에 올랐다. 한때 루카에는 250개가 넘는 탑이 있었다고 한다. 귀니지 탑은 14세기, 유력 가문이었던 귀니지 가문이 세운 탑이다. 높이 45미터. 붉은 벽돌 탑의 옥상에는 나무가 심겨 있다. 아래 골목에서도 그 나무들이 보인다. 루카의 상징과 같은 풍경이다.


루카, 골목에서 올려다 본 귀니지 탑의 공중 정원

출처: 루카 귀니지 탑 - 출처: LivornoDP, Wikimedia Commons


옥상에 오르니 일곱 그루의 참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벤치까지 놓여 있어 작은 정원처럼 느껴졌다. 16세기 그림에도 나무가 등장한다니, 이 풍경은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붉은 지붕들이 겹겹이 이어진 도시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바람이 너무 차가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루카, 귀니지 탑의 공중 정원(상), 공중 정원에서 바라본 루카 전경(하)


이곳에서 무료 지도를 하나 얻었다. 그제야 도시의 윤곽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구글 지도보다 종이 지도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우리는 역시 아날로그 세대였다.


산 미켈레 포로 성당


귀니지 탑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면 파사드가 유난히 독특한 산 미켈레 포로 성당이 나타난다. 건물 앞에 파사드만 따로 세워 둔 듯한 구조다.


루카, 산 미켈레 포로 성당 옆면(상, 중), 파사드(하)


12~13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파사드는 큰 아치와 수많은 작은 아치들로 이루어져 있고, 역시 기둥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맨 꼭대기에는 용을 물리치는 대천사 미켈레가 서 있다.

루카에서는 두오모 광장보다 이 성당 주변이 훨씬 활기차다. 도시를 걸으며 느꼈던 썰렁함이 이곳에 와서야 조금 옅어졌다. 중세에는 정치와 시민 생활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점심, 그리고 안피테아트로 광장

근처 간이식당에서 크레페로 점심을 해결했다. 짭짤했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려다, 그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카푸치노로 대신했다.


이후 찾은 안피테아트로 광장은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 터 위에 만들어진 광장이다. 건물들이 타원형으로 둘러서 있고 위로 올려다보면 하늘마저 타원형이다. 루카의 중심 광장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계절과 날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카, 안피테아트로 광장


산 프레디아노 성당과 골목들

북쪽에 자리한 산 프레디아노 성당은 파사드 상부의 금빛 비잔틴 모자이크로 시선을 끈다. 예수의 승천과 열두 사도가 묘사되어 있고, 가롯 유다 대신 사도 바오로가 포함되어 있다.


루카, 산 프레디노 대성당(상), 파사드의 모자이크 <예수 승천과 12사도>


루카의 골목들은 거칠었다. 회벽은 벗겨지고, 길바닥은 투박했다. 정갈했던 산지미냐노와는 정반대의 인상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중세도시의 진짜 얼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루카, 골목길과 거리


성벽 위에서


루카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성벽 산책이다. 16~17세기에 방어를 위해 조성된 성벽은 실제 전투에 사용된 적은 없지만 유럽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성벽 중 하나다.


높이 12m의 성벽 위에는 4.2km 길이의 산책로가 이어진다. 우리는 북쪽 산 프레디아노 통로로 올라 남쪽 산 피에트로 성문까지 절반만 걸었다.


루카, 성벽 산책로 올라가는 통로

성벽 위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잔디, 노란 가로수, 바닥에 쌓인 낙엽. 그 모든 것이 느린 속도로 흘렀다. 그러나 우리는 모처럼 마음껏 빠르게 걸었다.


루카, 성벽 위 산택로


아래로는 파네르 저택과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사람들은 산책하고, 조깅하고, 자전거를 탔다. 다음에 온다면 꼭 자전거로 달려보고 싶었다.


루카, 성벽 위 산책로에서 바라본 파네르 저택과 정원


푸치니의 도시를 떠나며


루카는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의 고향이다. 푸치니 생가 박물관도 있고, 여름이면 토레 델 라고에서 오페라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의 음악을 직접 듣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피사와 루카를 모두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피사 두오모 성당의 내부를 보고 올 수도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남긴 채, 우리는 오후 2시 반 기차로 피렌체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피스토이아와 프라토 역이 스쳐 지나갔다. 다음 날은 일정이 비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또 다른 중세도시가 여행 목록에 추가되었다.

피렌체에 도착해 털모자 하나를 샀다. 보온도 되고, 아침마다 머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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