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소도시 여행 ⑧
피에졸레(Fiesole)는 피렌체에서 약 8km 떨어진 언덕 위의 작은 도시다. 인구는 1만 4천 명 남짓. 평지에 자리한 피렌체를 감싸듯 둘러싼 언덕들 가운데, 북동쪽 가장 높은 자리에 고요히 앉아 있다.
이 도시는 피렌체보다 오래되었다. 기원전 700년 이전, 에트루리아인이 세운 도시로 한때는 북부 에트루리아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와 함께 쇠퇴했고, 인근의 피렌체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행정적·경제적 중요성도 점점 희미해졌다. 12세기 초, 결국 피렌체에 정복당하며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난다.
이후의 피에졸레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권력과 상업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피렌체 상류층과 예술가들이 머무는 휴식의 공간이 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이곳에 별장을 지었고, 지금도 피에졸레는 조용하고 값비싼 주택가로 남아 있다.
피에졸레는 문학 속에서도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단테의 《신곡》,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헤르만 헤세의 첫 소설 《페터 카멘친트》까지.
에드워드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에서는 루시 허니처치가 조지 에머슨에게 운명적인 키스를 ‘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프라 안젤리코 역시 이곳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 언덕이 주는 고요와 전망은 예술가들에게 오래전부터 영감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피에졸레를 찾은 날
피렌체 산 마르코 광장에서 7번 버스를 타면 종점인 미노(Mino) 광장까지 약 30분. 버스는 15분 간격으로 온다.
일몰과 야경이 좋다고 하여 오후에 가기로 하고, 오전에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과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먼저 둘러보았다. 하루치 감탄을 오전에 모두 써버린 기분이었다. 이미 지쳐 있었지만, 근처 카페에서 점심용 파니니를 사고 왕복 버스표까지 함께 해결했다.
피에졸레는 첫인상부터 단정했다.
돌담 하나하나가 말끔했고, 미노 광장까지 이어지는 언덕길에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피렌체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지대가 높아 단풍은 더 깊었고, 낙엽이 쌓인 길에서는 진한 가을 냄새가 났다.
문제는 종점에 내린 뒤였다.
아침에 남편에게 건네준 안내 책과 메모지가 가방에 없었다. 다른 책을 챙기느라 내 말을 놓친 모양이었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동네라 해도, 막상 아무 정보 없이 서 있으니 막막했다.
‘종점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갔다’는 어느 여행기의 문장이 떠올라 무작정 언덕길을 따라갔다. 여행자 차림의 사람 몇을 뒤따르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사라지고 발아래에는 피렌체와는 반대 방향의 풍경이 펼쳐졌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내려오는 길, 코압(Co-op)이 눈에 들어왔다. 전날 상추를 너무 많이 먹어 부족하겠다 싶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상추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샀다.
이 동네는 확실히 달랐다.
코압의 상품은 신선했고 진열도 고급스러웠다. 피에졸레가 토스카나에서 가구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다시 미노 광장.
버스정류장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세 갈래 길이 보였다. 왼쪽은 피렌체를 내려다보는 파노라마 전망대, 가운데는 로마 유적이 보존된 고고학 공원, 오른쪽은 별 의미 없는 대로. 우리는 처음에 그 ‘별 의미 없는’ 길을 택해 엉뚱한 언덕을 오른 셈이었다.
이번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아 전망대로 향했다. 하지만 일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햇빛이 정면에서 쏟아져 피렌체는 잘 보이지 않았고, 사진도 찍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람들이 해 질 무렵을 기다리는 것이리라.
계단에 앉아 파니니를 먹고, 언덕 위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나타나는 성 알레산드라(S. Alessandra) 성당을 지나면, 언덕 끝에 산 프란체스코 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 들어서자, 가운데 돌 십자가를 품은 탑이 우리를 맞이한다. 앞쪽의 회랑이 있는 건물은 오래전 예배당이었지만, 지금은 기념품 가게가 되었다.
성당은 놀랄 만큼 소박했다.
장식도, 과시도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마음이 갑자기 잔잔해졌다. 갈색 톤의 내부는 화려한 피렌체의 성당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오래 닦아 윤이 난 시골집 같은 공간.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곳이었다.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우리가 다 둘러보고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박물관 벽에 그려진 병자를 돌보는 장면, 장례를 치르는 장면, 죄수를 찾아가는 장면들은 성 프란체스코의 정신이 여전히 이곳에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성당을 나와 숲길로 내려오니 고고학 공원이 보였다. 에트루리아인이 만들고 로마인이 재건한 이곳에는 테아트로 로마노, 목욕탕, 신전 유적이 남아 있다. 입장료도 비싸고, 로마 유적은 이미 많이 보았기에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고고학 공원 옆에는 반디니 미술관이 있다. 하지만 오전에 이미 충분히 예술을 만났기에 이곳도 생략했다.
숲길의 공기는 상쾌했다. 피렌체에서 쌓인 피로가 조금은 씻겨 내려갔다.
일몰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만 돌아가야 했다.
피에졸레는 일몰 시간에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었다. 미노 광장의 테라스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해보고 싶었다. 파니니를 싸 올 게 아니라, 햇살 아래 노천 테이블에 앉았어야 했다며 남편과 아쉬움을 나누었다.
며칠 뒤, 두 번째 피에졸레
지난번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며칠 뒤 늦은 오후에 피에졸레를 다시 찾았다. 도시는 여전히 단아했고, 미노 광장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일몰까지 시간이 남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노천 테이블은 아니었지만 분위기는 충분히 좋았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에 지난번 놓쳤던 공원에 들렀다. 1차 세계대전과 나치에 의해 희생된 피에졸레 시민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는 곳이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도 다시 찾았다. 지난번의 고요함과 달리 이날은 방문객들이 제법 많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피렌체는 여전히 뿌옇다. 스모그인지 안개인지 모를 베일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네 시 반쯤 해가 기울기 시작했고, 조금 더 기다리자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보는 야경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는 피렌체는, 언제나 한 박자 늦게 다가온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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