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헤치 경로, 홋신몬오지에서 혼구타이샤까지
우리 부부가 몇 차례 이용했던 여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이 울창한 구마노고도(熊野古道) 순례길을 걷는 상품을 소개했다. 온천과 미식이 함께하는 일정이라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7월 초 이탈리아 돌로미티 트레킹을 앞두고 있어, 예행연습 삼아 다녀오기로 했다.
기이 반도와 구마노고도 순례길
간사이 남부, 와카야마현 전역과 나라·오사카·미에현에 걸쳐 있는 기이 반도(紀伊半島)는 선사시대부터 ‘신들이 머무는 성지’로 여겨져 왔다. 약 3천6백 개의 험준한 산등성이와 단풍나무, 편백나무, 삼나무 숲, 강과 폭포가 어우러진 이 대자연 속에서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느꼈고, 자연 그 자체를 신성한 치유의 공간으로 받아들였다.
천 년 전부터 나라와 교토의 왕족과 귀족, 승려를 비롯한 순례자들이 기이 산지의 험준한 산길을 넘어 참배를 떠났다. 요시노와 오미네, 고야산, 그리고 구마노 산잔(熊野三山)은 그 목적지였다. 요시노·오미네는 슈겐도의 중심지로, 구마노 산잔은 자연 숭배를 바탕으로 한 구마노 신앙과 신토의 성지로, 고야산은 진언밀교를 대표하는 불교 성지로 각각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역사와 정신적 가치를 인정받아 기이 산지는 2004년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구마노 산잔은 구마노하야타마타이샤, 구마노나치타이샤, 구마노혼구타이샤 세 신사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본래는 각기 다른 자연 숭배 형식을 지녔지만, 10세기 후반 불교의 영향으로 세 신을 함께 모시는 신앙으로 발전했다. 신토와 불교가 절묘하게 혼합된 이 삼신은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신으로 여겨졌다.
구마노고도는 이 구마노 산잔으로 향하는 순례길이다. 순례자는 길 위에서 엄격한 예배와 정화를 행했고, 걷는 행위 자체가 수행이자 참배였다.
700km에 이르는 구마노고도 가운데 나카헤치, 오헤치, 코헤치 등 문화와 자연경관적 보전 가치가 높은 307km 구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마노고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함께, 세계에서 단 두 곳뿐인 ‘유네스코 세계유산 순례길’이다. 두 순례길의 종착지인 스페인 갈리시아와 와카야마현은 자매결연을 맺었고, 두 길을 모두 완주한 이에게는 ‘이중 순례’ 증명서가 수여된다.
길 위에는 ‘구마노 99 오지’라 불리는 작은 신사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순례자들에게 쉼과 방향을 제공하던 중간 거점이다. 숫자 99는 정확한 개수가 아니라, 그만큼 많았음을 뜻한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 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구마노의 여섯 개 주요 순례길 가운데 나카헤치 황실 경로의 핵심 구간과 고야산 오쿠노인 참배길을 걷는 것이었다. 숲 속에서 사유하고, 시골의 풍경과 문화를 만나며, 온천과 맛난 음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2025년 5월 6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7시 55분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편으로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40분. 일행은 다섯 명, 소수라 분위기가 한결 오붓했다. 인솔자는 작년 설국열차 여행에서 만났던 이로, 반가운 재회였다. 10인승 차량을 직접 운전하며 안내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구로시오 시장의 참치 해체 쇼
첫 일정은 와카야마 마리나 시티의 구로시오 시장. 생참치로 유명한 이곳에서는 장인이 직접 참치 한 마리를 해체하는 쇼가 열린다. 냉동하지 않은 생참치는 식감부터 다르다. 설명은 일본어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날카로운 칼끝과 유려한 손놀림만으로도 볼 만했다. 우리는 2층 식당에서 생참치회를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마리나 시티는 간척지에 조성된 인공섬으로, 시장 외에도 온천과 테마파크가 있다. 잠시 들른 포르토 유로파의 유럽풍 거리는 연휴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로 붐볐다.
시라하마 센조지키와 산단베키
이후 시라하마로 이동했다. 하얀 모래사장으로 이름난 온천 마을이다. 산단베키의 절벽은 파도가 깎아낸 거대한 주상절리 암벽으로,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있는 풍경이 인상 깊다. 센조지키는 수천 장의 다다미를 펼쳐놓은 듯한 암반 지대다. 바닷물에 다듬어진 풍경을 보며 대만 예류 지질공원이 떠올랐다. 예류는 바람이, 이곳 센조지키는 바닷물이 형성한 기암이다.
숙소는 언덕 위에 자리한 난키-시라하마 메리어트 호텔. 바다를 내려다보는 노천온천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온천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저녁과 이른 아침, 두 번이나 온천에 몸을 담갔다.
나카헤치 경로: 홋신몬오지 – 구마노혼구타이샤
여행 2일 차. 드디어 구마노고도를 걷는 날. 일정이 일부 조정되어 오헤치 대신 나카헤치 구간을 더 걷게 되었다. 바다보다 숲을 좋아하는 내게는 오히려 반가운 변화였다.
오늘 걷는 구간은 홋신몬오지에서 구마노혼구타이샤까지 이어지는 약 7km. 반나절 코스로, 숲길과 옛 돌길, 계단식 논과 마을 풍경이 번갈아 나타난다.
홋신몬오지
홋신몬(発心門)은 ‘깨달음에 대한 열망의 문’이라는 뜻을 지닌다. 구마노혼구타이샤 경내로 들어서는 가장 바깥의 문이자, 순례자들에게 목적지가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홋신몬오지를 출발하여 호젓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작은 마을이 나온다. 녹음이 우거진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일본인 할머니 길라잡이와 함께 출발했지만, 우리는 곧 일행과 거리를 두고 우리 속도로 걸었다.
숲길에 들어서자, 삼나무 향이 깊게 스며들었다. 고요한 숲 속에서 숨을 고르며 걷는 시간, 그것만으로도 이 길에 오른 이유는 충분했다.
숲길은 다시 차밭과 논이 있는 마을로 이어졌고, 후시오가미오지를 지나 내리막 숲길로 접어들었다. 표지판과 나무 말뚝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구마노혼구타이샤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도리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을 오르자, 구마노혼구타이샤가 나타난다. 여러 순례길이 교차하는 이곳은 전통적으로 구마노 참배의 첫 목적지였다. 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맞물려 지은 건축, 편백나무껍질로 덮은 곡선 지붕이 인상 깊다.
경내 곳곳에서 삼족오 야타가라스 문양을 볼 수 있다. 길을 인도하는 신의 사자, 순례자들에게는 더없이 어울리는 상징이다.
점심 후 들른 구마노혼구센터에서 구마노고도의 역사와 걷기 정보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유노미네온천
이후 유노미네온천으로 이동했다. 1,800년 역사를 지닌 일본 최고(最古)의 온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유일한 온천, 바위탕 츠보유는 대기 줄이 길어서 우리 일행은 대신 다른 온천장을 이용했다. 나는 짧은 시간에 서둘러 마쳐야 하는 온천욕이 부담스러워, 마을 벤치에 앉아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온천욕의 진짜 맛은 여유로움에 있으니까.
시라하마 해변과 엔게츠도
해 질 무렵, 다시 시라하마 해변에 섰다. 고운 백사장 위로 바닷바람이 스쳤다. 돌아오는 길에 엔게츠도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바위 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 붙은 곳. 특히 바위의 공동을 통해 바라보는 달의 풍경이 일품인 곳. 파도가 만든 시간의 흔적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조용히 정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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