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걷기(3): 후지산 중턱에서 미호반도 연안까지

오합목 오츄도와 미호노마츠바라, 그리고 여행의 여운

by 필로트래블


오합목 둘레길 오츄도를 걷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후지산 오합목 둘레길, 오츄도였다. 해발 2,305m 지점에서 후지산의 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합목’은 산 높이를 열로 나눈 단위로, 오합목은 산 높이의 절반 지점, 즉 5부 능선을 뜻한다. 날씨가 좋으면 둘레길을 걸으며 정상의 만년설과 함께 산기슭의 마을과 호수 풍경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


후지산 둘레길 전체 길이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204~217km 정도로 알려져 있고, 여러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이날 오전 일정은 버스를 타고 오합목까지 오른 뒤, 중턱에서 비교적 평탄하고 경치가 좋은 오츄도 구간을 걷는 것이었다.


이날 오후에는 시즈오카 시내로 이동해 숙박할 예정이었으므로, 호텔에서 체크아웃한 뒤 곧바로 오합목으로 향했다. 인솔자는 여러 차례 산 위의 기온이 낮을 수 있으니, 복장에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이동하는 길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후지산의 단풍은 우리나라처럼 강렬하게 대비되는 색감보다는 전체적으로 은은한 느낌이 강했다. 선명한 붉은 단풍이 몰려 있는 일부 구간에서는 단풍 축제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만큼 붉은 단풍이 귀하다는 뜻일 것이다. 호텔에서 오합목까지는 약 1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둘레길은 등산화나 스틱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고 안내받아 별다른 준비 없이 나섰지만, 초입에서는 예상보다 가파른 경사길이 나타났다. 비탈길에 약한 나로서는 잠시 긴장했지만, 10여 분쯤 지나자 평탄한 길이 이어져 안도할 수 있었다.


걷는 내내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길이 거의 끝나갈 즈음에야 한국에서 함께 출발했던 다른 팀, 여섯 명이 역방향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침엽수림임에도 노랗게 물든 가라마쓰(일본갈잎나무)들이 환상적인 가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나무는 후지산 자생종으로, 1900년대 초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서식지를 넓혀왔다고 한다.


구름이 끼어 후지산 정상의 만년설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래쪽 마을과 호수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호젓한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중간중간에는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도 남아 있었다.


오합목 오츄도 둘레길 풍경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종착지인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이 막 풀릴 즈음 끝이 나버려 아쉬움이 컸다. 말 그대로 간에 기별만 간 정도였다.


산장 인근 주차장에는 대형 관광버스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주변에는 관광객들도 많았다. 대부분 후지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음료를 마시며 잠시 머물다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걷는 동안 길이 그렇게 조용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본적인 풍경을 완성한 오시노핫카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시노핫카이로 이동했다. ‘핫카이’는 ‘여덟 개의 바다’라는 뜻으로, 이곳에 흩어져 있는 여덟 개의 연못을 가리킨다. 눈 녹은 물이 여러 겹의 용암층을 거치며 수년간 걸러져 만들어진 연못들이다. 연못 위로 놓인 다리와 물레방아,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전통 초가지붕 가옥들이 어우러져 일본적인 풍경을 완성한다.


오시노핫카이 연못(상), 일본 전통식 초가지붕 가옥(하)


예전에는 후지산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몸을 정갈히 씻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한 상점과 식당들이 골목마다 들어서 있었고,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붐볐던 장소였다. 오시노핫카이 역시 후지산 세계문화유산의 구성 자산 중 하나다.


연못 주변에서는 하루살이처럼 생긴 곤충들이 눈앞을 날아다녔다. 유키무시라 불리는 벌레로, 이들이 나타나면 곧 눈이 내린다고 한다.


후지 히노키 숲을 걷다


일본에서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온천, 가이세키, 그리고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이다. 이날 마지막 일정은 편백나무 숲, 후지 히노키에서의 산책이었다. 편백나무는 일본어로 히노키라 불리며, 우리나라에서도 고급 인테리어 자재로 널리 쓰이고 있다. 삼나무와 함께 피톤치드를 많이 내뿜는 나무라, 숲을 걷는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대가 컸다.


히노키 숲으로 향하는 길 역시 단풍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점차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숲에 도착할 즈음에는 비가 잦아들었고, 버스에서 내릴 때는 거의 그쳐 있었다.


숲에 들어서자 확연히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기 수련을 해 온 남편은 기운이 강한 장소에 가면 금세 알아차린다. 때로는 그 기운이 너무 강해 힘들어하기도 한다. 일본 고야산 오쿠노인이나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커스텐보쉬 국립식물원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울창한 히노키 숲에 들어서자, 남편은 강한 기운에 잠시 적응이 필요한 듯했다.


처음에는 인솔자를 따라 천천히 걷다가 이후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숲이 워낙 넓어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든 산책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건너편 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포장도로를 만나 다시 숲 안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곳은 히노키 대신 활엽수가 많은 구간이었다. 방향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걷다 보니, 결국 주어진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버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일부 일행은 히노키가 밀집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고 있었다. 걷든, 앉아 있든, 피톤치드를 쐬는 데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히노키 숲길을 좀 더 잘 알았더라면 더 오래, 더 깊이 걸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시즈오카로 이동


일정을 마치고 시즈오카 시내로 이동해 시즈오카역 바로 앞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시설이 잘 갖춰진 호텔이었고, 21층 객실 창문 너머로는 시즈오카 시내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루의 피로를 내려놓기에 충분한 밤이었다.


미호노마츠바라를 걷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오전에는 미호노마츠바라를 걷고, 하마마츠로 이동해 악기 박물관을 관람한 뒤 나고야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미호노마츠바라는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미호 반도 연안에 자리한 소나무 숲이다. 해안을 따라 약 5km에 걸쳐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으며, 신일본 3경이자 일본 3대 소나무 숲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1922년에는 "해안의 소나무 숲 너머로 후지산을 조망할 수 있는 풍치 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평가받아 일본 최초의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오른쪽으로는 태평양의 푸른 바다, 왼쪽으로는 짙은 초록의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정면에는 후지산이 그림처럼 자리한다. 이곳은 후지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구성 자산 가운데 하나로, 후지산에서 약 45km나 떨어진 장소임에도 유일하게 포함되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풍경을 작품으로 남긴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숲 중앙 부근에는 ‘날개옷 설화’의 무대로 알려진 하고로모노 마쓰가 있다. 선녀와 어부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이 소나무는 수령 650년으로, 3대째 명맥을 잇고 있다.


우리는 해안을 따라 수령 200~400년 된 노송들이 약 500m 이어진 카미노미치, ‘신의 길’을 30~40분 정도 걸었다. 후지산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도 남겼다. 오래 걷고 싶은 길이었다. 일행 중 한 분이 “걷고 싶은 길은 짧게 걷고, 걷기 싫은 오래 걸었다”라는 말로 이번 여행을 요약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미호노마츠바라


하마마츠 악기 박물관에 들르다


미호노마츠바라를 떠나 하마마츠로 이동해 악기 박물관을 찾았다. 하마마츠시 악기 박물관은 일본 최초의 공립 악기 박물관으로, 전 세계 약 1,500점의 악기를 상설 전시하고 있다. 1981년, ‘음악 도시 하마마츠’를 표방하며 설립된 곳이다.


악기들은 지역별로 전시되어 있었다. 아시아 전시실에는 우리나라 전통 악기도 적지 않게 전시되어 있었고, 인도네시아와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의 악기들도 눈에 띄었다. 일본 악기는 별도의 전시실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었으며, 오세아니아·유럽·아프리카의 악기들도 다양했다. 건반 악기만 모아 놓은 전시실에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비롯해 쳄발로, 클라비코드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전자 악기와 일본산 서양 악기를 소개하는 전시실도 흥미로웠다. 음악과 악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간을 들일 만한 공간이다.


에필로그


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후지산 지역의 걷기 좋은 길을 찾아 걷는 것이었다. 트레킹이라기보다는 하이킹이나 산책에 가까운 일정이었다. 길 자체는 모두 아름다웠지만, 걷는 시간이 전반적으로 짧아 아쉬움이 컸다. 대부분의 걷기 일정이 한 시간 남짓으로 계획되어 있었고, 실제로는 그보다 더 짧은 경우도 많았다.


나고야 국제공항과 후지산 지역 간 이동 시간도 길게 느껴졌다. 이동 중 지루함을 덜기 위해 플라워 파크나 악기 박물관 같은 명소를 포함한 일정이었지만, 걷기에 방점을 두었던 우리 부부에게는 크게 반갑지 않은 기획이었다. 시즈오카 공항을 이용하고, 불필요한 관광지를 줄여 걷는 시간을 늘렸다면 훨씬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취향의 여행객이 함께하는 단체 여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음식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아침은 호텔 뷔페로, 점심과 저녁은 외부 식당에서 해결했다. 해산물 국을 곁들인 회덮밥, 가이세키 요리, 마블링이 뛰어난 소고기 샤부샤부, 일본 정식, 장어덮밥까지, 음식의 수준은 고르게 높았다. 특히 귀국 날 점심으로 먹은 하마마츠의 장어덮밥은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나고야식과 하마마츠식 장어덮밥은 조리 방식이 다른데, 우리가 먹은 하마마츠식은 장어를 한 번 데쳐 양념을 바른 뒤 구워내어 부드럽고 담백했다. 내 입맛에는 이 방식이 더 잘 맞았다.


날씨도 대체로 좋았다. 나흘 중 사흘은 맑았고, 하루는 흐렸지만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단풍길을 걷기에는 오히려 더없이 좋았다. 기온 역시 걷기에 알맞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후지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25개 구성 자산 가운데 야마나카호, 모토스호, 시라이토 폭포, 아오키가하라 숲, 후지산 오합목, 오시노핫카이, 미호노마츠바라 등 7곳을 방문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이번 여정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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