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목 <식물원> 서문
안녕하세요 여러분. 책으로 읽는 따뜻한 위로 한 잔. 김머핀의 북테라피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사실 북테라피 주제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인스타그램으로 요새 어떤 고민이 있으신지 의견을 받아봤는데, 어떤 분이 “무기력증 때문에 고민이에요. 습한 여름처럼 마음이 축축 처지는 느낌?”이라고 남겨주셨어요. 무기력이라는 게 한 번 빠지면 참 빠져나오기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무기력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튜브 채널에서 구어체로 된 영상도 보실 수 있어요.
무기력증, 아무것도 하기 싫은 기분은 나도 여러 번 겪었던 터라, 고민을 남겨주신 분께 너무 공감이 됐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결하려고 할 때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나의 무기력감이 무엇에서 오는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무기력감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3가지, 우울, 후회 또는 불안 그리고 번아웃으로 나누었다.
대표적이자 가장 강력한 원인은 우울이다. 우울감이 심해지거나 우울증이 찾아오면, 무기력도 하나의 증상으로 찾아온다. 우울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무기력감도 심해져서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하는 일상적인 행동들조차 너무 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이런 경우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전문 상담을 받거나 정신과에 방문해서 약물, 상담 치료 등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
다음 원인 역시 우울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데,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후회와 불안이 무기력을 불러오곤 했다. 후회는 과거, 불안은 미래와 관련이 있다. 살면서 자신이 한 일이나 내린 결정이 자신 또는 타인의 인생에 미치는 파장이 너무 크면, 후회가 시작되고 이 후회는 자책으로 발전하곤 한다. 이런 자책은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끼게 만들고, 새로운 선택이나 행동을 하는데 장애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무언가를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너무 크면 현재가 잠식당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 닥쳐올 미래가 너무 무섭고 가늠이 안 되어서 무기력해져 버린다. 마치 심해에 있는 느낌. 깊은 바다라서 물이 나를 내리누르는데,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숨 막히는,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도 없고 물의 압력이 너무 세서 손을 쉽게 내뻗지도 못하고 계속 가라앉는 기분이 엄습해온다.
이런 후회와 불안에서 오는 무기력은 사실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나씩 해나가는 것 말이다. 그런데 그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나 역시도 무기력을 떨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너무 조급해하지 않는 것. 무기력한 나도 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내가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것들,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확인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이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남들에게 피해나 주고, 똑바로 하는 것도 없고, 앞으로 나 같은 애가 뭘 할 수 있을까” 등의 자기 학대를 하지 않고, 자신과 화해하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용기가 생겼을 때 미루지 않고 한 발짝씩 나아가 보는 것. 그런 것들이 해야 할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주의 사항은, “스스로에게 비겁해지지 않는 것”이다. 나도 “그래,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니까”하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뭔가 하기를 주저하고 숨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어렴풋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느끼지만 여러 가지 변명을 끌어다가 정당화시키던 시간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시간들은 나 스스로를 다독이고 치유하는 과정이었던 반면에, 어떤 시간들은 그저 도망치고 싶어서 나 스스로에게 비겁해지던 시간들도 있었다. 실수로 그치지 않고 그것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검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해지는 순간들, 그 시간이 나에게 합당한 시간인지 아니면 나에게 비겁한 시간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지금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얼마간의 멈춤인지, 아니면 행동인지 판단 내리는 것이 꼭 필요하다.
무기력의 세 번째 요인은 번아웃이다. 계속 열심히 달려와서 신체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내 안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려서 더 이상 뭘 할 힘이 나지 않는 상태이다. 앞서 후회와 불안이 과거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 경우는 “현재”가 문제인 경우이다. 현재의 나가 만족스럽지 않고, 학교나 직장이 그저 진절머리만 나고,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딘가 아픈 느낌이고, 예전에 좋았던 기억만 그리고, 지루하고, 밤이 되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시작되는 게 너무 싫고, 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끼는 일들을 전문가들이 ‘번아웃, 즉 소진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이런 번아웃의 경우는 사실 자신이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만큼 열심히 달려왔기에 남은 에너지가 없고, 에너지가 “없으니까” 그런 자신이 초라해지고, 뭘 하기가 싫고, 할 엄두가 안 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는 정말 충전이 필요하다. 정말로 정신적인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니까. 그런데 아이폰은 8핀, 갤럭시는 c 타입 충전 단자를 쓰는 것처럼 자신에게 필요한 충전 프로세스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친밀한 누군가에게 감정을 토로하고, 위로를 받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현재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 다른 누구는 책이나 영화에 집중해서 다른 생각을 버리고 나를 돌아보는 과정을 겪으면서 힘을 얻기도 한다.
멍 때리면서 자연 속을 산책하기 같은 경우는 모든 전문가가 입을 모아 추천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멍때리는 건 정말 잡생각 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멍때리는 과정이 뇌를 쉬게 하는 과정에서 중요하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햇살을 받으면서 멍 때리며 걷는 것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뇌에서 일상을 살아나갈 에너지를 충전해나간다.
그리고 또 하나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방법 중에 눈에 띈 것은 ‘내 삶을 객관화해 보는 것’이다. 나를 주인공이 아닌 관객이 되게 한 다음에 인생을 재검토해보는 과정이다. 이 내용을 보자마자 독문학 시간에 배웠던 문학의 기법 중에 하나인 ‘낯설게 하기(독:Verfremdungseffekt)’가 떠올랐다.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법이다.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사고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과 사고로 대상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낯설게” 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 스스로 당연하게 생각했던 “장녀, 장남, 나쁜 딸, 집안일도 직장 일도 육아까지 해내야 하는 슈퍼 맘, 아부 못 하는 회사원, 집안일만 하는 주부, 돈만 벌어다 주는 가장, 미래가 안 보이는 한심한 취준생”과 같은 내가 정의 내린 나의 모습이 아니라, 이름, 나이, 성별, 직업, 장점, 단점, 성격, 친구, 인생을 살면서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것들, 해낸 것들, 다른 사람에게 들었던 칭찬,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하고, 또 불행한지 객관적인 지표를 세워보는 것이다. 종이에 적어봐도 좋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정말 그런지, 어떻게 그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지 죽 적어보면 현재의 나가 정리되면서 미래의 나도 그릴 수 있게 된다.
사람은 물리적으로는 딱 한 번 태어나지만, 우리의 인생 중에 우리는 여러 번 다시 태어난다. 자아는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같지 않다. 적어도 어제의 나보다 하루라는 시간을 더 가진 변하는 존재, 그것이 오늘의 나이다. 나의 외부, 내부에서 어떤 큰 변화가 찾아올 때, 혹은 아무 변화가 없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내가 태어나곤 한다. 무기력은 어제의 지친 나가 다시 어머니의 태 속으로 돌아가는 회고의 그리고 재성장의 시간이 아닐까. 그 무기력 속에서, 그러니까 그 자라는 과정 안에서 하나의 고통을 딛고 우리는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오늘 무기력한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싶다.
유진목 시집 『식물원』 ‘서문’에 나오는 시인데, 이슬아 작가님의 책에서도 나와서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실 것 같다.
그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다
한 번은 이제 태어나나 보다 하면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다가
생각한 대로 잘 되지 않았다
한번은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이리 도망치고 저리 도망치다가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구나 했다
지난번에 태어났을 때는 불편한 게 너무 많았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죠
그래도 어떤 건 옛날이 그리워요
- 유진목 시집 『식물원』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