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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머핀 Aug 12. 2022

아무튼 밥

05. Das Bier Theory


05. Das Bier Theory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술은 무엇일까? 와인? 탁주? 정답은 바로 맥주다. 기원전 4천 년경 수메르인들이 적은 맥주의 여신 닌카시(Ninkasi)를 찬양하는 시의 한 부분에서 맥주의 제조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맥주의 여신이라니, 디오니소스처럼 술 전부를 아우르는 신도 아니고 와인의 신도 아닌 맥주의 신이라니. 왜인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맥주의 탄생과 그 당시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며 맥주의 신이 나올 법도 하다. 당시에는 깨끗한 식수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물을 더 안전하게 마시기 위해 이런저런 처리 과정을 발전시켰고, 그 안에서 맥주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양조 과정을 거쳐 끓이고 발효된 음료 즉 맥주가 더러운 물보다 사람들이 마시기에 훨씬 안전하고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다. 맥주가 생겨난 다른 도시에서도 대부분 그 탄생 배경은 비슷하다. 물은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맥주에는 물의 역사가, 곧 생존의 역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주 잘 뒷받침해주는 이론이 바로 Das Bier 이론이다. 


 독일어 명사는 성(性)이 있다. 고양이는 여자, 개는 남자, 칼은 중성. 이렇게 모든 명사를 외울 때는 성을(사실은 복수형도) 같이 외워야 하는데 이것 때문에 독일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꽤나 골머리를 앓곤 한다. 물론 일정 부분 규칙도 좀 있으나 그 규칙이 들어맞는 것 반, 아닌 것 반 정도라 덮어 놓고 외워야 하는 것들도 많다. 그중에 우리가 마시는 음료는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는데, 커피나 차, 술처럼 전통적으로 남자들이 먼저 즐기던 사치재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은 다 남성이고, 그 외의 음료는 모두 여성이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히 대부분의 생물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은 중성이다. 그런데 딱 하나, 이 법칙을 깨는 음료가 하나 있으니 바로 맥주다. 모든 술이 모두 남성인 가운데 오로지 맥주만 중성이다. 여기서 Das Bier 이론이 나온다. 모든 술은 남성이다. 물은 중성이다. 맥주는 중성이다. 따라서 맥주는 물이다. 이 이론에서 여러분은 독일인이 맥주를 대하는 태도를 읽어내면 된다. 그렇다. 독일인에게 맥주는 물인 것이다. 이쯤 되면 눈치채신 분도 있으시겠지만, Das Bier 이론은 독문과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우스)개소리*이다. 아니,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이건 우리 학교 독문과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쩌면 진짜 이런 이론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궁금하다고 논물을 원어로 찾아보는 열정적인 학부생이 아니었으므로 진실은 나보다 더 똑똑한 박사님들이 알려주실 거다.

*표준어는 우스갯소리이다.

 

 비록 그 근원은 모르나 나는 이 (우스)개소리*에 큰 감명을 받아 아주 굳건하게 이 이론을 믿었다. 그리고 믿음에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법. 독일에서 나는 아주 열심히 이 이론을 실천해 맥주를 물처럼 마셔보자! 하며 장 보러 갈 때마다 맥주를 열심히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늘 새로운 맥주를 사는 게 큰 과제이자 기쁨이었다. 그냥 취향이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맥주들이 있을 뿐, 독일 맥주는 기본적으로 아무리 싼 맥주여도 최소한의 맛은 보장해준다. 수백 종이 넘는 맥주들 앞에 서서 무슨 맥주를 살까 고민하는 즐거움이란. 당연하지만 캔맥주보다는 병맥주가 더 맛있어서 같이 살았던 언니와 장을 보고 맥주를 한 병씩 사이좋게 달랑달랑 손에 들고 오는 길이 참 설렜다. 물론 한 번에 맥주를 궤짝으로 사가는 게르만족들을 보면서 부럽긴 했지만. 알디(유럽의 저렴한 슈퍼마켓 체인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음료 마트에서 호프집에서나 보던 24개들이 맥주 컨테이너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가던 젊은이들을 부럽게 쳐다보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지. 우리도 차만 있었으면 한 번에 많이 샀을 거라며 둘이 같이 아쉬워하곤 했다. 




  독일 맥주는 대부분 맥아(호프)를 넣어 발효한 호프 맥주이다. 북유럽에서 처음 맥주에 호프를 넣어 발효했다고 하는데 호프 발효의 대중화를 이룬 나라가 바로 독일이다. 그러나 영국의 농부들은 이런 호프 발효를 마뜩잖아했다고 한다. 아마 ‘뭐, 뭘 넣어? 그런 건 맥주가 아니야’라는 전통에 관한 자부심이었으리라. 아메리카노를 쳐다보는 이탈리아인들의 눈길 정도의 마음 아닐까 추측해본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영국에서는 호프를 넣지 않은 에일 맥주가 전통적인 강자다.  그러나 나는 에일, IPA 계열 맥주들 특유의 향을 싫어해서 영국에서도 버드와이저를 마셨던 사람이라 독일 맥주가 훨씬 취향이다. 내가 독일에서 내 취향이라고 생각한 것이 3가지 있는데, 맥주, 소시지, 빵이 그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 3개 말고는 전부 취향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맥주에 관해서는 벨기에 아일랜드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이 자기들 맥주가 최고라고 싸우곤 하지만, 그래도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1등 맥주국은 독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필스너(알고 보면 체코가 기원)나 크리스털 비어를 좋아한다. 향이 너무 진하거나 한 가지 맛이 너무 튀는 맥주를 싫어하고 가볍고 향이 은은한 청량한 타입의 맥주를 좋아하는 취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맥주 중에 단연 최고인 생맥주로 마신다면 취향이 아닌 맥주 종류여도 한 잔 정도는 충분히 마셔줄 수 있다. 독일 펍에서 생맥주를 처음 먹던 날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그리 길지 않았던 내 인생에서 먹어본 맥주 중에 최고의 맛이어서 마시자마자 진짜 심봉사 눈 뜨듯 눈이 커졌다. 맥주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찌나 신났던지 친구들에게 냅킨으로 장미와 거북이를 접어주는 쇼를 펼쳤고, 어쩌다 보니 그 테이블에 앉아 있던 10명 모두에게 냅킨 장미와 냅킨 거북이를 선물하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냥 옆에 앉은 내 친구에게만 주려고 했는데… 왜 그런 때만 갑자기 말 거는 거야 이 독일인들아)  



 사실 나는 20대 초에 독일에 가기 전 한국에서 먹어본 맥주라고는 카스나 하이트가 다였다. 그마저도 딱히 맛있다는 느낌은 못 받아서 별로 술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학교생활에서도 어울려서 술 마시러 다니는 걸 크게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서 제대로 술의 맛을 느껴 본 것이 독일에서 마신 맥주가 최초였다. 그렇게 독일 맥주는 훌륭한 마중물이 되어 내 음주 역사의 포문을 열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셔보는 술은 단연 맥주가 아닐까? 맥주는 흔하고, 싸고, 종류도 많고, 무난해서 진입장벽이 낮으니까. 물론 나의 첫 음주는 사고에 해당하는 케이스라 내 첫술은 소주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황당한 그 사건은 바야흐로 내가 7살, 바로 위에 친언니가 9살인 시절이었다. 어디였는지는 모르는데 차를 타고 꽤 오래 걸려 친척 결혼식에 갔다. 꽤 시골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웨딩홀에 식당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친척들끼리 한 테이블에 앉아서 갈비탕을 먹었고, 엄마 아빠는 다른 친척분들과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언니와 나는 물을 마시고 싶었는데, 마침 테이블에 있던 물이 다 떨어졌었다. 그래서 직원 아주머니께 물을 부탁드렸고 1.5리터짜리 생수병을 받았다. 9살 언니가 언니답게 종이컵에 물을 따라 주었고, 사이 좋게 한 잔씩 마셨다. 그런데 언니가 조금 마시다가 "엄마 물이 이상해~"를 외쳤고 엄마는 언니의 말에 물을 살피시더니 외치셨다. 

"이거 소주잖아?" 


  아마도 주방에서 요리용으로 쓰려고 생수병에 소주를 채워놨던 것 같은데 착각해서 물인 줄 알고 주신 것 같았다. (멀쩡한 소주병이 있는데 왜 생수병에 넣으신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버릇이 있어서 종이컵에 가득 들었던 물을 한 번에 2/3는 마셔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물일 거라고 생각해서 중간에 숨도 쉬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이었고 엄마의 말의 잔을 입에서 떼고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자 입에 온통 쓴 소독약 맛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속이 불타는 느낌이 들어 화장실로 뛰어가서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다. 그 후 엄마는 마신 소주에 열 배는 될 것 같은 양의 물을 계속 먹이셨고 화장실만 죽어라 갔다. 언니는 다행히 몇 모금 마시고 바로 이상한 걸 눈치채서 (물론 같이 토하기는 했지만) 별 탈이 없었는데, 나는 체구도 더 작고 당시 20kg도 되지 않았는데(오해 마세요, 원래 입이 짧아 밥을 잘 안 먹었어요. 지금은…….) 당시 소주라면 20도가 넘는 빨간 뚜껑 진로였을 터, 그걸 종이컵으로 한 컵을 다 들이켰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그 후로 나는 뭐든 원샷하는 버릇을 고쳐 첫입을 들이키고 한 번 코로 숨 쉬는 버릇을 들였다. 옛날 궁궐에 살았으면 원샷 때리다 엄청 쉽게 독살당했을 거다.  여튼 그렇게 안 좋은 기억으로 시작한 사이라 그런지 나는 유독 소주와 궁합이 좋지 않다. 조금 먹든 많이 먹든 상관없이 다음날 머리가 아프다. 솔직히 맛도 알코올 맛만 나서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소맥이라면 또 모를까. 그렇다. 이 고약한 소주에도 맥주가 붙으면 부드럽고 순한 맛으로 변모한다. 맥주란 이렇게 대단한 힘을 지닌 술인 것이다. 레모네이드도, 위스키도 맥주에만 타면 더 맛있어진다. 


 이제는 수입 맥주가 4-5캔에 만원이 된 지도 오래되었지만, 내가 독일에서 막 돌아왔을 때만 해도 수입 맥주는 비싸서 지갑을 부여잡고 독일 맥주를 샀다. 그러나 수출용은 살균 처리를 하기 때문에 독일에서 먹던 그 맛이랑은 달라서 참 슬퍼하곤 했다. 그래서 독일 생맥주가 있다는 이태원 호프집에 가서 500mL 한 잔에 거의 만 원 돈을 내고 마시기도 했다.  왜 맥주가 그렇게 좋냐고 하면 글쎄… 맥주야말로 밥 같은 술이라서가 아닐까. 맥주는 어느 나라에서나 서민적이고 친숙한 술이다. 어느 나라에 가도 도시든 저 시골이든 와인바는 없어도 맥줏집은 하나 있게 마련이다. 소주처럼 독하지도, 같은 탄산이 있어도 샴페인처럼 요란하지도 않다. 생각해보면 인생에서 요란하게 축하할 일이나 슬픈 일은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는다. "와, 너무 축하할 일이다. 샴페인 따자!"는 날이 세상을 살면서 며칠이나 되며, 이별을 아무리 밥 먹듯이 해도 끽해야 일 년에 서너 번 아닐까? (물론 세상에 상식을 뛰어넘는 사람은 많지만 어쨌든 암묵적 사회 통념상 그 이상은 고려하지 않겠다) 여튼 이별의 아픔을 소주로 삼켜봐야 속만 망치기 일쑤다.  그에 반해 맥주는 별일이 없어도 가볍게 마실 수 있는, 혼자 마셔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술이다. "집에서 혼자 소주 한 병 했다." 하면 대번에 "무슨 일 있어?"라는 질문이 날아들지만, "맥주 한 캔 했어." 하면, "시원하겠다"는 대답이 날아드는 것만 봐도 극명하지 않은가. 그저 평범한 날에 친한 사람과 두런두런 앉아 이야기할 때, 무더운 여름날 집에 들어와 맥주를 냉동고에 넣어 놓은 뒤 씻고 나와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입이 주는 시원함은 엄청난 사치는 아니어도 누리기 행복한 적당한 호사이다. (여기저기 소주 파의 원성이 들려오는 것 같지만, 일단 무시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맥주가 배불러서 싫다고 하는데, 아니 여러분. 술을 배부를 때까지 마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제일 싼 소주로도 배부르게 마시려면 몇 병을 들이부어야 하는 줄 아십니까? 안주 조금 집어 먹으면서 한두 병 털어 넣으면 금방 배부르다니 가성비가 얼마나 좋습니까? 배불러서 많이 못 마시니 취해서 추태 부릴 염려도 없고 얼마나 바람직합니까? 맥주 먹고도 추태 부리는 놈들은 그냥 뭘 먹어도 추태를 부릴 놈들입니다. 과도한 음주의 폐해는 말해봐야 입만 아픈데, 맥주는 배가 불러서 아 더 못 마시겠다 하고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절제의 술이니 이 얼마나 건강한 술이란 말입니까!


  나는 술을 잘 마시는 것은 많이 마시는 게 아니라 적당한 곳에서 절제할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맥주는 완벽하다. 소주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 사람은 봤어도 맥주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 어린이에게 보리차로 착각하고 맥주를 가져다주어도 받아 마신 어린이는 토하러 화장실로 뛰어가지 않아도 된다. 사고가 아니라 우스운 헤프닝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다니, 얼마나 자비로운 술인가!  또 구수하고 씁쓸한 맛, 청량감 넘치는 탄산의 느낌, 따를 때 생기는 부드러운 거품까지. 세상에, 거품마저 즐길 수 있다니! 맥주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시는 사람이 적당하고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도록 저 자신을 내어주는 술이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맥주를 마시기에 부적합한 계절은 없다. 봄에는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돗자리 깔아 놓고 한 캔 하면 얼마나 좋은가. 여름은 당연히 두말하면 잔소리인 맥주의 계절이고, 가을은 단풍나무 구경하면서 제철 음식 옆에 끼고 맥주 한잔하면 또 어떻게 맛이 없겠는가. 겨울이라 춥다고? 어차피 다들 뜨신 방에 난방 틀고 들어앉아 있으면서 뭐가 춥다고 약한 소리들을 하시나. 뜨끈한 바닥에 앉아 팔팔 끓는 국물 요리 먹어서 열이 오를 때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셔보라. “겨울에 맥주는 좀 춥지”라는 소리가 나오나. 오늘 무슨 일이 있었든 없었든, 지금이 무슨 계절이든 맥주를 마실 때는 굳이 이유가 필요 없다. 딱 한 가지 집에 맥주가 없는데 사러 나가기 귀찮다는 이유 빼고는. 그러니 미리미리 냉장고에 맥주를 항시 채워 놓아야 한다. 우리의 하루에 맥주가 없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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