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Kitsch: 한국의 미학, 욕망, 그리고 정체성 ⑤
작년 한 해, 약 6개월 동안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모든 SNS를 중단했었다.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디지털 디톡스’였지만,
실은 너무 많은 정보와 감정들로부터의 도피였다.
유튜브와 인스타 속 사람들의 삶은 화려하고 행복해 보였고, 내 일상은 느리고 지루했다.
독일의 느긋한 속도와 스마트폰 속 빠른 세상의 간극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그 피로감 속에서,
나는 사람들을 현실에서 직접 만나고, 인터넷 세상 속 간접적인 소통은 피하기를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스마트폰 속 사진첩이 비어갔다.
더 이상 저장공간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
남들에게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어요”를 증명할 사진이 사라지고,
그저 내 하루를 담은 사실적인 이미지들만 남았다.
조금은 못생기게 나와도 괜찮은 현실적인 사진들.
다시 SNS를 깔았을 때,
허무하고 당연하게도, 그 안의 세상은 여전했다.
우리는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어놓지 못한다.
화면을 터치하고 스크롤하며, 타인의 삶을 관찰한다.
브이로그를 보고,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훔쳐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와 남을 비교한다.
요즘은 어딜 가든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카페를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을 만한, 소위 말하는 분위기 좋은 카페인지 확인한다.
음료를 주문하기도 전에 조명을 확인하고, 구도를 잡고, 미소를 만든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셔터가 눌리고, 그 순간 우리는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를 남긴다.
그 이미지는 ‘기억’이 아니라 ‘나의 버전’을 기록한다.
사진은 이제 ‘기억의 기록’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 되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보다, 어떤 장면 속에 들어갔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장소를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사진이 그 장소를 대신해 우리를 기억하게 한다.
서울에서 우리는 그런 공간들을 자주 발견한다.
특히 서울 한복판,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곳들에서 말이다.
왜인지 나에게 인사동은 그런 풍경의 축약처럼 느껴진다.
전통과 현대, 진정성과 연출이 뒤섞인 거리.
한때 화가와 서예가들이 모이던 거리에, 지금은 한복 대여점과 포토 프레임이 즐비하다.
조명은 전통등 모양을 하고, 그 앞엔 늘 누군가가 서 있다.
그곳의 전통은 이제 이야기보다 배경의 패턴으로 남는다.
전통을 배경으로 세워진 인사동의 포토존은,
어쩌면 ‘과거의 감정’을 장식으로 재현하려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키치적 욕망'의 또 다른 얼굴이다.
현실의 복잡함을 단순한 감정으로 바꾸는 가장 쉬운 장치 —
그것이 바로 사진이 아닐까.
사진은 그 욕망의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한 장의 이미지로 ‘좋았던 시간’과 ‘괜찮은 나’를 동시에 증명한다.
그 단순화가 꼭 거짓은 아닐 것이다.
빛이 좋고, 구도가 예쁘면 그 순간의 나도 조금은 예뻐진다.
한 장의 사진은 여전히 ‘나도 거기에 있었다’는 작은 증거를 남긴다.
그건 존재의 확인이자, 감정의 현대적인 공유 방식이다.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
즉 습관화된 행동의 틀은 이제 카메라 앱 안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같은 각도와 같은 표정을 반복한다.
그렇게 반복된 감정은 결국 공간의 형태를 바꾼다.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할 때, 공간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재배치된다.
공간은 점점 감정을 담는 ‘표면’으로 변한다.
카페나 전시장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아니라, ‘보이는 감정’을 연출하는 무대가 되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 사회가
‘보이는 방식’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사진 속 웃음은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그 웃음을 비춘 조명은 꺼지지 않는다.
우리는 카페, 전시장, 심야의 거리에서도 비슷한 톤의 조명을 만난다.
모두 ‘좋은 표정’을 찍기 위해 설계된 빛들이다.
조명은 감정의 건축이다.
그 아래에서 우리는 표정을 지어낸다.
우리는 그 빛 아래에서 비슷한 얼굴을 짓는다.
서로의 행복을 확인하며, 동시에 그 행복의 형식을 복제한다.
나는 요즘, 인스타그램 속 사진보다 조명에 관심이 간다.
누가 우리를 이렇게 비추고 있는지, 그리고 그 빛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 빛의 구조 속에서, 한국식 키치의 현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