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한국적’이란 것은 무엇인가요?

Korean Kitsch: 한국의 미학, 욕망, 그리고 정체성 ⑦

by 김무늬


특별 강연으로 한 오스트리아인 교수가 한국의 공공공간과 건축문화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 강연은 한 한국인 큐레이터가 기획한 ‘한국 현대 미술’ 세미나의 일부였다.
이 세미나는 학생들이 ‘비서양권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자신의 문화적 배경을 다시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쉬운 주제는 아니었다.
한국 내부에서도 ‘한국적’이라는 말의 기준이 불분명한데,
해외에서, 그것도 외국인의 시선으로 이를 논의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오스트리아인 교수는 한국의 건축문화를 일본과 비교하며,
공공공간의 발전이 여전히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전통적인 개념을 유지한 특수 공간들이나, 한국만의 건축문화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 말은 ‘예의 바른 비판’처럼 들렸지만, 나는 불편했다.
동아시아의 건축 혹은 예술문화를 논할 때마다 늘 일본은 찬사, 중국은 비판,

그리고 한국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 그 익숙한 구조 속에서
또 한 번 한국이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학과의 유일한 동아시아 학생으로서,
그 장면은 제국주의의 잔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했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세미나의 한국인 큐레이터조차도
그 ‘한국적’이라는 말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전후부터 현대까지 한국 현대미술의 작가 명단을 나열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미학이나 문화적 배경을 말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건 누군가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미학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 ‘다름’의 결을 설명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국적’이라 부르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때부터 나는 이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한국적인 게 뭘까?”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다.


한복의 주름일까, 한옥의 곡선일까,
아니면 밥상 위 반찬의 가짓수일까.
생각해보면, 그 모든 장면은 진짜 같기도,
조금은 연출된 듯하기도 하다.


서울의 골목을 걷다 보면
한옥 지붕 아래 카페 간판이 달려 있고,
안에서는 라떼 머신이 돌아간다.
전통의 선이 남아 있지만, 그 위로 네온빛이 얹혀 있다.
그 모순적인 풍경 속에서, 우리는 ‘한국적’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전통에서 오는가, 아니면 우리가 전통이라고 믿는 감정에서 오는가?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은 말했다.
“정체성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한국적’이라는 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말하는 ‘한국적’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시대의 감정이 덧칠된 구성물에 가깝다.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전통의 재연출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적’이란, 본질이 아니라 감정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미학은 어떤 고정된 미의 기준보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방식—즉, 감정의 언어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 장면을 통해 한국적 감정의 얼굴을 따라가 보았다.
결혼식장의 위로, 인스타그램의 포토존,
‘귀여움’이라는 미학, 그리고 K-컬처의 수출된 진심까지.
그 모든 장면은 사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감정을 연출하고, 소비하고, 공유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흐름의 끝에서 다시 묻는다.
‘한국적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떤 언어로 표현되는가?




한국의 키치는 그 재연출의 언어다.
그것은 특정한 미학이 아니라, 감정의 방식이다.


낯설고 빠른 변화 속에서 ‘우리’를 확인하려는 시도,
사라져가는 것들 위에 감정의 색을 덧입히는 행위.


키치는 현실의 결핍을 덮는 장식이 아니라,
불안한 정체성을 붙잡기 위한 감정의 장치다.


우리는 그 감정을 통해 현실의 결핍을 잠시나마 메운다.
그것이 진짜든, 연출된 것이든,
그 감정 속에서만 우리는 ‘한국적’이라는 확신을 느낀다.


그래서 ‘한국적’이라는 것은 전통의 형태보다 감정의 질감에 가깝다.
그것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의 욕망이 만든 감정의 장면이다.


결국 ‘한국적’이라는 말은
전통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감정이 만들어낸 자기 확신의 표현이다.




한국의 키치는 바로 그 장면에서 태어난다.

진실보다 진실처럼 보이려는 욕망,
불완전한 현실을 덮어주는 감정의 미학.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 속에서,
한국적 감정의 솔직한 힘을 본다.


‘한국적’이라는 말에는 늘 어떤 안심의 감정이 따라붙는다.
복잡한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만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바로 한국적 키치의 정서다.


한국의 키치는 완벽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감정의 형식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묻고 싶다.
‘한국적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감정을 한국적이라 부르는가.’


한국의 키치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전통의 표면에서 태어나
현대의 감정 속으로 흘러든 언어.
한옥의 그림자, 카페의 간판,
전통무늬가 새겨진 텀블러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한국적’이라는 감정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소비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를 확인하고,
자신을 다시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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