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화 <도쿄타워>는 어머니를 소재로 모성애를 그린 영화다. 그런 만큼 감동과 눈물을 선사한다. 그러나 마냥 이 영화가 좋지만은 않다. 불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엄마로 살아온 경험치 때문일까. 아니면 갱년기에 날뛰는 호르몬 작용일까. 그것도 아니면 둘의 합에서 나오는 시너지 효과일까.
그가 만약 딸이었다면
나의 어머니도 마사야의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 배경에는 한량처럼 산 아버지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마사야의 아버지와 아주 많이 닮았다. 자식들의 교육과 생계로부터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몫까지 감당하느라 고생 고생 말이 아니었다.
이런 어머니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군것질거리가 없는 시골에서 간혹 맛있는 거라도 생기면, 어머니 입에 넣어드리곤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도, 나의 욕구보다 어머니의 형편을 살폈더랬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었다.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도 과외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마사야처럼 먹고 마시고 노느라 어머니가 보내준 돈을 탕진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쿄타워>에서 마사야가 딸이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갔을 것이다. 적어도 마사야처럼 제멋대로 방탕하게 살지는 않았겠지. 왜냐하면 딸들은 그렇게 키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딸은 아들보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더 많다.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
나의 딸은 너무 짧은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되고, 밤늦게 돌아다녀도 안된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통금 10시. 반면 아들은 무엇을 입든지 몇 시까지 나댕기든지 별 상관하지 않는다. 언젠가 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남동생들과 비교해 차별받은 적이 있는지. 딸은 조목조목 다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고 한다. 남동생들에게는 엄마가 달걀을 까주고, 자기에게는 안 까주었다는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별게 아닌 게 습관이 되고 인생이 된다. 이렇게 키워진 아들들은 좀 더 자유분방한 사람이 된다. 누군가에게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반면 딸들은 자기의 욕구보다 다른 사람의 요구에 민감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맞추는 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가 되어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62쪽
자신을 파괴하는 생물학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여자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을 파괴하는' 문화적 유전자가 심겨진다. 자식과 남편을 위한 존재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야 훌륭한 어머니로 칭송받는다. 마사야의 어머니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감동과 눈물을 선사하듯.
깊이 내상을 입은 어머니
에이코는 아들 마사야가 4,5살 무렵 술주정뱅이에 바람둥이 남편을 떠난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남편과 헤어진 지 30년 정도 흘렀을 때다. 에이코는 암 진단을 받는다.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항암치료를 기다리고 있다.
이때 아들에게서 남편이 병문안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에이코는 자신의 절박한 상황도 잊어버린 채, 남편 맞을 준비에 분주하다. 미용사인 아들 친구에게 머리카락을 다듬고, 립스틱으로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목에는 스카프를 두른다. 그리고 침대에서 무릎을 꿇고 남편을 맞는다.
병실에 두 사람만 남겨졌을 때, 남편은 뜬금없이 발모제 덕분에 머리카락이 나왔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 거기에 에이코는 맞장구를 칠 뿐이다. 남편을 원망하는 말도 하지 않는다. 혼자 아들을 키워낸 공치사도 하지 않는다. 항암제 치료를 앞두고 자기가 얼마나 두려운지 입도 뻥끗 않는다. 오히려 남편의 병문안이 얼마나 황송한 지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하다.
두 사람은 매점에서 무언가를 사고 있다.
"뭘 그렇게 많이 사요."
"당신만 먹나, 먹을 사람 많잖아."
"그래도 미안하게(すみません)."
"이것도 사."
"이리 주세요(すみません)."
"자!"
"에구 됐다니깐요. 자꾸 미안하게(すみません)."
"이것도, 이것도."
"고만 사요(すみません)."
에이코는 남편 앞에서 할 줄 아는 말이 'すみません(스미마셍)' 뿐인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은 고맙다는 표현을 할 때도 '스미마셍'이라는 말을 쓴다. 여기서 에이코의 '스미마셍'은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표현으로 들린다. 뭐가 그렇게 미안하고, 뭐가 그렇게 고마운 건지.
에이코는 남편의 행위에 대해 과도하게 만족한다. 그 관심을 과대평가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편의 사랑이라고 가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 진실은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게 편하고 익숙하다. 그렇게 사는 법 외에 다르게 사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대는 달라지지 않았냐고. 과연 이런 부부의 모습이 지금은 사라진 구시대적 유물일까.
우리 부부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 주말에 남편이 화장실 청소를 하면 나는 반짝반짝 빛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야 다음에도 화장실 청소를 할테니까. 그가 무언가를 해주는 것을 사랑과 관심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관심이 거두어질까봐 전전긍긍했음에도, 잘 살고 있다고 착각했다.
어떤 점에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그 속에 흐르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내를 자신에게 의지하는 존재요,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요, 혹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진 킬본은 <부드럽게 여성을 죽이는 법>에서 인간이 대상화될 때, 그 자아상은 깊은 내상을 입는다고 말한다. 에이코가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녀의 자아상은 깊은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자기 목소리를 잃어버린 에이코, 그녀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