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생 Oct 07. 2023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켰을 때... 꿀꿀함과 편안함

빛과 어두움을 다 만나는 게 인생이다

하루 일과 중 내가 가장 즐기는 것을 꼽으라면 '나 홀로' 오전 산책이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이다. 마을 길을 지나 화야산 잣나무 숲에 이르러 한숨 돌리고, 산을 되짚어 내려와 다른 코스의 마을길을 따라 병원으로 돌아가.


봄부터 그 길을 걸으며 가장 놀라웠던 것은 시시때때로 끊임없이 피고 지는 들꽃이다. 이렇게나 많은 들꽃들이 각양각색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이제야 눈을 뜨나니! 그동안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았을꼬.


시간에 쫓기지도 누군가의 방해도 없이 느리게 걷는다.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바람과 햇빛에 몸을 맡긴 채. 모든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평화롭고 고요하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발걸음이 사뿐사뿐 가볍다. 사회적 책임과 의무와 역할에서 벗어나 암환자로 사는 지금 여기가 축복의 장이요, 나답게 꽃 피우는 순간일 수도.


빛과 어두움을 다 만나는 게 인생


며칠 전 대사방 처방을 위해 원장님을 만났다. 뭔가 긴장이 되었다. 대형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결과를 들으러 갈 때랑 비슷한 강도로. 나 나름대로 몸과 마음을 잘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원장님의 코멘트가 두려웠던 걸까. 선생님에게 성적표를 받을 때 드는 긴장감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맥박이 빠르다는 원장님의 말씀. 긴장이 많다고 하시며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30분간의 코칭과 같은 진료를 마치고 나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나는 저잣거리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며 재미있게 살 관상이라고. 귀티 나는 사람은 좁은 세계에서 산다며 나는 그런 관상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근데 나의 마음은 꿀꿀했다. 뭔가 숨기고 싶었던 것을 들킨 마음?! 겉모양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알고 보니 속은 여전히 '사람들 앞'에 긴장이 많은 나! 원장님이 호흡과 연결하며 이완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셨건만. 뭔가 낙제한 기분이 들었다.


그다음 날 이것을 이슈로 봄비님의 코칭을 받았다. 봄비님 왈,  


"인생에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해요. 어두움이 있기에 빛이 존재하고, 빛은 반드시 어두움을 동반하죠. 빛과 어두움을 다 만나는 게 인생이에요. 그럴 때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나다운 '나'로 살 있겠죠."


난 그동안 내 기준에서 빛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만 드러내는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어둡다고 여겼던 상황과 마음들은 만나지 않고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거다.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킬까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그럼 나는 어떤 삶을 빛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좇았던 걸까.


치유 한마당에서 포스트잇 5장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다섯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이미지를 써서 등에 붙이는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격려의 차원에서였다. 나의 등에는 네 장이 붙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듬직한, 상냥함, 예쁜 목소리, 차분한, 정확한, 신중한, 명민한. 대체로 내가 추구해 온 자아상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거룩한, 경건한, 정숙한, 성숙한, 완벽한, 우월한, 냉철한, 단단한, 딱 부러지는, 모범적인, 규율적인, 특별한... 말하자면 30년간 기독교 문화에 물든 나의 모습이다. 이것은 어른이 되어가며 장착한 삶의 무기이기도 하다.


평범해질 용기가 필요해


봄비님은 나를 처음 보았을 때 외모상으론 <달려라 하니>의 하니와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점점 철갑을 두른 모습으로 보였다고. 저 사람은 저것만 벗으면 병이 낫겠다 싶었단다. 봄비님의 나에 대한 첫인상과 원장님이 말씀하신 나의 관상이 겹쳐졌다.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재미있게 사는 사람=하니!? 귀티 나는 사람의 좁은 세계=철갑을 두른 삶!? 이렇게 도식으로 나타내니 분명 해지는 점이 있다. 심리적으로 자기만의 성을 구축한 채 방어시스템을 잘 갖추고 다른 사람의 접근을 불허했던 나의 삶! 관상과 상반되는 삶을 살았네.


그렇다면 저잣거리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 재미있게 사는 삶이란 어떤 거지? 명랑한, 쾌활한, 유쾌한, 장난스러운, 위트 있는, 실패하는, 실수하는, 나사 빠진, 바보스런, 허술한, 열등한, 물러터진, 평범한... 이런 덕목들을 나의 삶에 초대하면 될까. 책임과 의무와 역할에 찌들어 살았던 지난 30년, 마음속 깊이 가두어두었던 이런 모습이 부활한다면 삶이 유연해지고 재미있을까.


철옹성에서 나와 저잣거리로! 아들러 심리학의 '미움받을 용기'보다 '평범해질 용기'가 더 필요한 시점. 원장님의 진료가 한걸음이 된듯. 지금은 원장님이 조금 더 편안해졌다는.

작가의 이전글 암환우라면 알밤, 이렇게 드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