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눈에 띈 시구가 '목을 반만 달고 미친 년처럼'이다. 너무 처절하고 서늘하다. 여성들의 삶을 '목을 반만 달고 사는 미친 년'으로 묘사한 것일까? 그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우선, 시 속 화자의 고백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그녀는 어젯밤 흰 목도리를 두르고 죽으러 갔다. 목을 길게 빼고 엎드린다. 단두대인가 보다. 누군가가 선언한다. 죄 같은 건 없어도 그냥 넌 죽는다! 죄가 없는데도 죽어야 한다? 마녀 사냥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백년전쟁의 영웅 잔다르크도 죄가 없는 데도 마녀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지 않았던가. 14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중반에 걸쳐 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마녀라는 이름으로 처형당했다. 그중 대다수가 여성이었단다. <마녀의 망치>라는 지침서를 들여다보자. '여성들이 주로 마법을 사용한다. 왜냐하면 여성은 잘 속아 넘어가고,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다. 여성은 정욕에 취약하기 때문에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 이런 논리라면 여성들은 모두 잠재적인 마녀라는 이야기다. 벼락 맞을 소리!
마녀 사냥은 지금의 시대와는 상관없는 옛날이야기일까? 요즈음도 다수를 이룬 집단이 소수에 대한 혐오를 마녀사냥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럼 여성은 소수자인가?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데 말이다. 수적으로는 절대 남자들에 밀리지 않는다. 그러나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소수자의 삶을 산다. 여성 혐오라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여성 혐오'는 여성은 열등한 존재요, 유혹하는 존재로 위험한 존재라는 함의를 가진다. <마녀의 망치>랑 별반 다를 게 없네. 지금도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정치적 불평등 구조 속에서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된다. 단두대에서 잘린 목을 반만 달고 미친년 처럼 살아간다는 게, 이런 것 아닐까.
목덜미에 칼이 닿고, 그녀는 '왜 무죄일까' 의심한다. '절대 무죄가 아니야' 분노한다. 단두대에서 처형되는데 무죄라니 말이 되지 않는다. 반드시 죄목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여자로 태어난 것이 죄일까. 그녀는 항상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 수치심, 의심, 불안, 상실감, 두려움으로 살지 않았던가. 아니 그렇게 살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이게 죄인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죄인이 아니고, 죄가 없다니, 그런데 죽어야 한다니!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거기다 집행정지란다. '이런 법이 어딨어.' 잘리다 만 목을 반만 달고 미친 년처럼 따진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는다.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제멋대로 아닌가? 이것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을 대하는 남성들의 모습이다. 여성들의 생명권을 손에 쥐고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자기들의 이익에 부합해서 말이다. 그것이 법이고 기준이다. 여자들을 살려두는 이유는 그들의 왕국에 부역하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녀는 울부짖는다. 오, 절대로 무죄가 아냐! 죽음을 부르는 처절한 절규! 이젠 그들의 손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죽고 싶다는. 결국 <심판>의 저자 석영희는 그녀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르고 그 불꽃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땅에서 타오르지 못한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