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뻔해져버렸어
조금 호들갑을 떨자면, 가히 신드롬이다. 잔나비는 2016년, 기억하기도 어려운 긴 이름의 노래를 세상에 내놓더니 알음알음 입소문과 실력만으로 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나만 아는 밴드가 차트를 씹어먹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훨씬 더 빨랐을 수도 있었다. 3년에서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이유는 그들의 두 번째 앨범이 그만큼 늦게 나왔기 때문이니까.
많은 음악 페스티벌, 대학 축제, 단독 콘서트 등을 통해서 입지를 다진 잔나비는 그동안 공연에서 이미 선보였던 노래들을 포함해 12곡이 꽉꽉 담긴 정규 2집 앨범 [전설]을 발매했다. 비틀즈를 좋아하고 60-70년대 빈티지 사운드를 좋아하는 이들은 1집에 비해서 더 짙어진 세피아빛으로 돌아왔다. 노래 제목은 여전히 길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다.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발매한 지 일주일 여가 지났지만 타이틀곡은 여전히 차트 상위권에 자리하고 있고 수록곡 다수도 차트 100위 안에 자리잡고 있다. 백예린, 헤이즈, 장범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예능 출연 조차 없었던 로큰롤 밴드의 흥행은 무척 놀랍다. (그리고 이제 나혼자산다에 나온다고 한다.)
차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주위의 반응이다. 잔나비의 새 앨범이 발매된 이후, 내 주변 많은 이들의 카톡 프로필이 노란 배경의 파란 얼굴을 한 사내의 얼굴로 바뀌었다. 잔나비 2집 앨범 커버였다. 너도? 아니 너도? 주위에는 잔나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그 추세는 점점 커져간다. 그것도 20대 여성 중심으로. 나는 우리 아버지를 기준으로 아티스트의 유명세를 판단하는데, 아직 아버지는 잔나비를 모르시는 걸로 보아 잔나비가 전세대에 유명한 것 같지는 않다. 역시 예능프로그램 부재 탓이다.
팬들은 많은 포인트를 사랑한다. 잘 다듬지 않은 것만 같은 최정훈의 장발과 조금은 퀭한 눈, 그리고 모음을 다소 길게, 콧소리를 섞어 발음하는 그의 창법. 드러나는 것이 밴드의 프론트맨 최정훈이다보니 관심이 보컬 위주로 쏟아지는 것도 맞지만 팬들은 기타-베이스-드럼-키보드 모두 놓치지 않고 꼼꼼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르는 잔나비의 음악을 무엇보다도 아꼈다.
세피아 빛의 밴드. 잔나비는 올드팝을 좋아하고, 그 시절의 사운드를 좋아하며 이를 지향한다고 여러 번 밝혔다. 그래서인지 이번 앨범도 세피아로 가득하다. 일단 단체 프로필사진부터 그 분위기를 말해준다. 갈색 슈트, 필름 사진을 연상케하는 분위기, 정리하자면 세피아빛의 모든 것이다.
잔나비의 색깔이 세피아라면 잔나비의 시간은 밤이다. 1번 트랙 나의 기쁨 나의 노래에서는 “오늘도 그런 밤이었죠”하며 노래를 시작하고, 2번 트랙 ‘꿈과 힘과 책과 벽’에서는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걸 자고 나면 괜찮아질거야”하고 노래를 끝맺는다. 아득한 밤과 밤 사이에는 물론 ‘투게더!’처럼 신나는 순간도 있지만 대개는 아련하고 그리운 마음이다.
그리움. 잔나비의 노래를 들으면 그렇게 누가 그립다. 누가 그리운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다. 사람의 온기가 혹은 예전의 추억이 그립다. 그렇게 과거를 조작당한 사람처럼 멜랑콜리함에 빠져버리고 만다. 올드팝과 빈티지함에 대한 열정이 앨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에 청자 또한 그들의 정서에 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리움이라는 정서가, 잔나비에게는 다소 익숙하고 뻔한 정서가 되었다.
지금까지 잔나비가 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지, 그들의 음악이 얼마나 강력한지 말해놓고 왜 이제와서 뻔하다는 얘기를 하려느냐고 물을 수 있다. 물론, 일정한 정서를 한 앨범 안에 꾸준히 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티스트의 꾸준함이고 능력이다. 그러나 정규 앨범이 미뤄지던 3년 동안 오히려 잔나비는 이미 GOOD BOY TWIST나 She로 본인들의 장기가 올드팝 느낌의 발라드 혹은 로큰롤임을 강력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연히, 혹은 잔나비의 나비효과로(?) 세상은 뉴트로에 열광하게 되었다. 필름사진이 유행한다는 말은 벌써 몇 년 전 말이 되었고, 을지로의 간판 없는 가게에는 그 빈티지함에 사람들이 북적이며, 옛날 소품들의 힙함은 인스타 피드를 도배한다. 오죽하면 현대카드 라이브러리들의 공통적 테마도 “뉴레트로-오래된 미래”다. 레트로가 하나도 새롭지 않은 현재가 와버렸다.
모든 음악이 새로워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뻔한 음악이 반갑지는 않다. 이번 앨범에서는 몽키 호텔에서 느껴지던 재기발랄함이 줄고 세피아빛의 뉴트로만 남았다. ‘투게더!’에서 플루트와 시작했던 도입부는 새롭게 느껴졌지만 결국 다른 노래와 비슷한, 잔나비 특유의 복고풍 로큰롤로 끝나버렸다.
이젠 레트로가 신선하지 않다. 그리고 이건 잔나비의 탓은 아니다. 그러니 잔나비로서는, 그리고 잔나비 팬으로서는 억울한 말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음악을 잘하는 것도 사실이니까. 하지만 프로필사진의 노골적인 세피아 빛처럼 짐작 가능하다는, 익숙해서 조금 뻔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몽키 호텔의 낯섦을 기대했던 내게는 she와 good boy twist를 12곡으로 늘인 앨범이 나왔다고 느껴질 뿐이다.
방법은 두가지다. 레트로 열풍이 지나갈 때까지도 잔나비가 레트로를 좇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전자는 잔나비만의 브랜드 유지가 될 것이다. 앞서 ‘투게더!’의 결말을 잔나비 ‘특유’의 음악이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독자적인 세계를 확보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잔나비의 노래를 들으면 더 이중적인 생각이 든다. 좋은데, 뻔해. 뻔하긴 한데, 좋아.
그래서 나는 잔나비가 이런 이중적인 생각을 없애주었으면 한다. 몽키호텔로 맨 처음부터 증명했듯이 그들은 더 많은 걸, 더 다양한 걸 들려주고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도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은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