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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Oct 30. 2017

5. London, Mind the Gap

제인 오스틴과 고층 빌딩 사이에서 마주한 런던

    This station is 'Tower Hill'

    Mind the gap between the train and the platform.



@ London Eye, London


    영국은 처음이었다. 유럽 대륙에 온 것은 세 번째지만 섬이란 이유로 영국은 처음 가봤다. (물론 이제는 유로스타로 연결이 된다지만, 여전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해저 터널은 초등학교 때 그린 과학상상력그리기 속의 소재였다. 한 해는 우주, 한 해는 바닷속. 나는 얼마나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런던에 기대한 것은, 뭐 적당히. 왕가, 애프터눈 티,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유니언 잭 정도? 사실 이 도시에서 뭘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기대하며 갔던 것 같다. 레미제라블도 예매하고 런던 필하모닉도 예매했지만 막상 아는 것은 없었다. 부랴부랴 시험이 끝난 지 채 12시간도 되지 않아 마주한 런던은 나만큼이나 정신이 없었다. 사람은 미어터질 것처럼 많았고 영국식 영어는 대화 한 번 만에 '멋있어..!'에서 '뭐라고..?'로 바뀌었다. 내가 기대한 런던은.. 글쎄. 이런 건 아니었다. 이렇게 정신없고 시끄럽고 사람이 많아서 혼이 빠져나갈 것만 같은 그런.. 도시는 아니었다. 일주일 있어도 부족한 도시, 파리와 함께 손꼽는 여행지. 그리고 나를 시험에서 탈출시켜줄 나의 구원자. 이런 생각에 런던 여행을 기다렸다.


    하지만 마주한 런던의 이층, 빨간 버스는 사진과 같았고 - 오히려 신식으로 바뀌어서 로맨틱함은 떨어졌다. 관광객의 투정이다 - 튜브는 어떠한 환풍 시설도 없이 창문을 열고 지하를 달렸으며 퇴근 시간 center line을 타려면 정말 몸을 둥글게 말아서 벽에 기대 서야 했다. 애프터눈 티는 그저 그랬고, 맛있다는 레스토랑은 전부 햄버거였다. 별점이 4.3이어봤자, 햄버거. 소호 거리는 사람이 넘쳐나서 마치 금요일 저녁 할로윈의 이태원을 보는 듯했고, 날씨는 맑았지만 그래서 이상했다. 글루미한 브릿팝을 들을 수가 없었다.



    "MIND THE GAP." 

    튜브 언더그라운드(지하철)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다. 간격이 좁건 넓건 기본으로 설정되어있나 보다.


    런던 여행을 기억해보면 딱 이렇다. MIND THE GAP. 당신이 상상하는 런던과 실제의 런던을 주의하라. 사실 런던은 정말 대도시다.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대도시다. 어떻게 런던이 한가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뉴욕, 도쿄와 함께 세계의 3대 경제 중심지이고 세계 시간의 기준이며 한 때 대영제국의 찬란한 역사를 누린, EU에 속해 있을 때에도 고고히 파운드를 쓰며 화폐를 독립했던 나라의 수도인데. 덧붙여 수많은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을 보기 위해 각국의 사람들이 모이고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해 수천의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는 곳인데.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당연한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내게 런던은 너무 시끄러웠다.


    영어가 모든 곳에서 통하니 편하겠지 -라는 생각은, 말은 되지만 들리지는 않는 일이었다. Sorry?를 몇 번 말한 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발음은 쏘리? 보다는 써뤠이?에 가깝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무례하지도 눈에 띄게 친절하지도 않았다. 나는 수많은 관광객 중 한 명이었고, 공항 검색대 직원에게는 '돈은 있는지, 숙소는 잡았는지, 언제 나갈 건지' 수상한 승객 중 하나였다. one of them이었는지 그냥 the one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른 백인에게는 물어보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 모든 걸 차치하고 어떤 매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런던 만의 무언가가 있나? 런던은 정말 시끌벅적한 도시다. 다닌 어떤 도시보다도 서울과 비슷하다. 고층 빌딩도 많다. 대신 문화콘텐츠가 매우 강력한 도시. Southbank의 Royal Festival Hall, Theater, Poem Library를 비롯한 시설들이 부러웠고 웨스트엔드, 소호에 가득한 Theater들이 부러웠다. Kings Cross 9와 3/4 플랫폼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 선 사람들을 보며, 역시 한 건 하면 평생 벌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사람들을 런던으로 불러 모으는 건 도시 자체의 느낌이나 인상이라기보단 그 속의 콘텐츠들이 아닐까-하는 삐딱한 생각을 해보았다.


@ Primrose Hill, London
@ Royal Festival Hall,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 Tea and Tattle, London

    그렇다고 '런던 너무 별로야!'라고 가혹하게 말하기엔 많이 즐겼다. 레미제라블 뮤지컬에서는 세상 제일 안 좋은 자리에 앉아 넘버마다 눈물을 줄줄 흘렸고 해리 포터에서는 버터 맥주를 맛보고 그리핀도르 버전 1권을 샀다. 호그와트를 만든 이들의 정성에 감동하고 포트넘 앤 메이슨에서 차 향을 맡으며 기뻐했고, 서점에서 어렸을 때 읽은 동화책을 발견하고 엄마에게 보내기도 했다. (Oh no! We've got to go through it!)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역시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만난 런던 필하모닉의 쇼스타코비치 7번.. 이 공연 리뷰는 따로 쓰겠지만,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홀에서 만난 manpower의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최고였다. 프림로즈 힐에서 본 핑크빛 노을도 좋았고 클로티드 크림과 스콘도 좋았다. 그.. 그러고 보면 대개 좋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가족들과 싸운 게 제일 힘들었다. 다신 여행할 때 싸우지 말아야지)



    

    Gap. 내가 생각했던 런던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지 않았고 이렇게 도시도 아니었다.(여전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아마도 파리의 분위기를 생각하며 런던도 비슷할 거라 예상했던 것 같다. 전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그냥 그랬고, 굉장히 힘들었다. 아마 준비가 덜 되었는데 너무 급하게 여행을 떠난 게 아닌가 싶다. 그것도 'MUST DO LIST'가 많은 도시에.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들과 싸워서. 그게 진짜 힘들었던 이유.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서는 제인 오스틴을, 소호에서는 대도시를. 이렇게 모두 즐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의 옹졸한 마음 상태가 준비되지 않아서 즐기기 힘들었던 여행.

  

    여행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랬다. 이번 여행으로 깨달은 것은 세 가지다. 하나, 사람이 너무 많고 바쁜 곳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둘, 내가 사랑하는 멀리 떨어진 사람과 텍스트로 싸운다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힘든 일이라는 것. 셋, 여전히 책이 좋다는 것! (이번에는 노팅힐, 워터스톤스,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갔었다. 너무 좋았다. 이 리뷰도 곧.)

    


    다음에 영국에서는 꼭 근교에 가봐야지. 제인 오스틴의 Elizabeth와 Mr. Darcy가 뛰어나올 것 같은 곳으로 가야지. 사람이 너무 많지 않은 곳으로 가야지. 혹시 그때 다시 gap이 발생하더라도, 그때에는 Mind the Gap 하며 충분히 즐겨봐야지.



(투덜대며 시작한 글인데 역시 자기합리화로 끝난다. 사진이 예쁘니 괜찮아. 로열 블렌드가 맛있으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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