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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Jul 10. 2017

플랑크 시간, 떡갈나무가지,영원하지 못할 지금이지만.

할머니, 오래 있어 주세요

 초복이 돌아온다. 엄마는 결혼 이후 22년동안 한 해도 초복을 챙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결혼 직후부터 친할머니네 근처에 살았으니 복날에는 항상 할머니와 함께 삼계탕을 먹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날에는 삼계탕을 해다 드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초복이 돌아온다. 달력을 보던 엄마는 말했다.


"이게 내가 할머니 해드린 마지막 맛있는 음식이었던 것 같아."


 할머니는 지난 8월에 갑작스럽게 쓰러지셨다. 우주가 팽창한 플랑크 시간은 10의 마이너스 43제곱이라고 했다. 그 짧은 시간 한 우주가 팽창한 것처럼, 할머니를 스쳐간 병의 순간도 아마 그 정도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조금의 치매 증세와 함께 하셨던 이야기를 반복하시긴 하셨지만, 눈이 침침해져서 성경 읽기를 그만 두시고 몇십년을 개근하시던 새벽 기도도 가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정정하셨다. 구십이 넘은 연세에 우리 할머니만큼 정정하신 분 드물다며 항상 이야기하곤 했다.


 정성들여 베란다 화분을 가꾸시면 우리 집에서 죽어가던 식물들은 거짓말처럼 꽃을 피웠다. 다홍색의 난 꽃은 항상 그 곳에 있었고, 내가 어렸을 때는 방울토마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은 그 일상을 모두 앗아갔다. 그렇게 할머니는 8월부터 지금까지 누워계신다. 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을 지나 추웠던 겨울, 그리고 봄, 여름까지. 1년이 되어간다.


 할머니네에 다녀오면 쓸데없는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쓸데없는 감상이라고 함은 이런 것이다. 야윈 할머니의 팔목을 바라보는 것. 푹 꺼진 볼과 알 수 없이 멍이 들어버린 눈가를 바라보는 것. 앙상해져 뼈가 드러나고 퍼런 핏줄이 드러나는 발을 쳐다보는 것. 눈꼽이 껴서 잘 떠지지 않는 왼쪽 눈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메인 목을 큼큼, 헛기침으로 뚫는 것. 공연한 감상에 젖어 할머니의 지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텅 비어버린 거실을 보면 그런 생각에 젖고야 만다. 고모와 할머니, 그리고 우리 네 식구. 이렇게 6명이 북적이던 마루는 이제 비어있다. 나와 동생이 큰 탓에 상이 비좁다며 낑겨앉아 동생과 서로 밥상다리를 미루던 마루에는 한 사람도 없다.


병은 참 덧없는 일이다.

인생도 참 덧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치열히 팔십, 구십년을 살아왔지만 한 순간에 찾아온 벼락같은 그 순간은 뇌를 관통하여 제 기능을 앗아갔다. 한 순간에 말이 어눌해지고 호흡이 어려워진다. 제대로 걷지 못하고 삼키지 못하게 된다. 딱 그 순간. 찰나의 순간을 전후하여 할머니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러니 할머니를 바라볼때마다 서글퍼질수밖에 없다. 나를 보며 짓는 웃음은 예전과 같지만 누워있는 몸은 그렇지 않다. 정정하게 앉아 티비 자막을 소리내어 읽으시던 할머니는 가래 기침을 뱉을 힘이 모자라 끓는 소리로 자식들의 마음을 앓게할 뿐이다.


멋쟁이처럼 옷을 챙겨입고 아파트 주위를 돌며 흙과 나무와 대화했던 할머니는 바뀌지 않는 병원복을 입고 희게 세어버린 머리를 어쩌지 못한 채 짧게 자른 머리로 누워 호흡할 뿐이다. 할머니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맞추고 크게 소리내어 이야기를 하는 것, 최대한 예쁜 표정을 짓는 것. 유독 뜨겁던 온기가 남아있는 할머니의 오른손을 꽉 쥐며 인사하는 것.

 여전히 할머니는 내게 예쁘다고 말씀하신다. 서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면 금세 옆에 앉으라 말하신다. 컨디션 좋으실 땐, 남자도 조심하라고 하신다. 젊어서는 많이 놀아야 한다고도. 조금이나마 대화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어렸을 때 어디선가 작은 떡갈나무 가지를 주워다가 아파트 화단에 열심히 묻어준 적이 있었다. 이 작은 가지도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할머니는 이 나무가지도 자랄 수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가 없을 때에도 나보다 더 열심히 그 가지를 들여다보셨다. 옆에는 깻잎도 자랐다. 하지만 작은 씨앗으로 시작한 깻잎이 싱싱하게 자랄 동안 앙상한 가지는 내내 위태로워보였다. 어떤 양분도 빨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꽤 버텼다. 죽지 않고 살았고, 실같은 뿌리도 나지 않았지만 끝에 달린 나뭇잎은 초록빛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그 가지는 살아있었어야 한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떡갈나무 가지 생각이 난다.



아니다. 공연한 상상으로 지금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 아쉬워하지 말자. 언젠가 생각할 지금을 아쉬워말자. 나는 할머니의 자랑이고 예쁨이다. 그 누구보다도 나를 향해 예쁘다고 수차례 말해주었던 사람이다. 괜한 감상을 보이지 말자. 지금 할머니가 함께 있음에 감사해야지. 영원하지 못할 이 순간을 간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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