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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비 Oct 15. 2023

불이야

김구림_음과 양

김구림 <음과 양 91-L13 > 1991,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낚시대, 양동이, 213*335cm


김구림 <음과 양 91-L13 > 1991,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낚시대, 양동이, 213*335cm


갑작스러운 구조조정이었다지만 예견했던 사람 같았다. 30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데, 그토록 덤덤할 수 있다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요즘 그는 자꾸 집을 나간다. 생전 안 가던 낚시를 하러 간다. 낚시대와 양동이를 들고 컴컴한 새벽에 나가버리는 날이 너무 많다. 그 날도 그랬다. 새벽 낚시 간다고 황급히 나가버린 날, 나는 빈 집에서 아침 빨래를 널고 있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211동 우리집 앞 동이었다. 이상하다. 무슨 연기일까. 연기가 점점 회색빛으로 짙어지더니 붉은 불길이 보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주저 앉았다. 불이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돌려보니 통화 중, 가슴이 벌렁벌렁 쿵쾅쿵쾅 가만 있을 수 없다. 눈 앞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무섭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예의 차분한 남편, 그도 떤다. "일단 집에서 나와. 근처 까페라도 가 있으면 어때. 지금 갈께." 심란한 마음으로 집 밖으로 나가니 놀이터에 웅성웅성 사람들이 나와 있다. 요란한 싸이렌 소리가 들리고, 소방차가 온다. 응급차, 경찰차도 도착한 것 같다. 아수라장이다. 차마 보고 서 있을 수가 없다. 단지에서 나왔다. 제발 제발 살아 있기를  중얼중얼 걷다가, 그가 말했던 까페가 보인다. 들어가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남편이 들어온다. 얼마나 반가운지 하마터면 와락 껴안을 뻔 했다. "그 집 사람들 괜찮대. 다행히 빨리 빠져나왔대. 오다가 관리사무소장님 만났어. 천만다행이야."  땀이 난 그의 이마가 유난히 창백해보인다. 낚시하러 간다고 새벽에 나가버린 그가 참 미웠다. 두 시간 만에 다시 만난 그, 몹시 반갑다. 그들이 불길에서 살아 나왔다는 소식까지 전해주는 그에게 고맙다. 살아 있어서. 달려와줘서. 아주 오랜만이다. 아내와 남편, 서로 마주 앉았다. 그들 앞에 놓인 코코아 두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뜨끈하게 피어오른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 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은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32쪽 김선경 엮음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메이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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