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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니모 Jan 05. 2022

 주절주절

하루하루

#브런치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었다.

회사에 도착해 평소보다 가동되지 않는 뇌를 보며 변명들이 자연스레 마음속에 나열되어 어딘가에라도 변명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변호하고 싶어 짧게나마 비공개 메모장인 나의 트위터에 토막글들을 우후죽순 올렸다.

하루 동안에 적게는 3개.

평소라면 한 달에 두어 개 올라가는 게 다였는데, 이 정도면 내 내면의 소리를 집중해서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맞춤

맞춰가는 방법이 꽤나 재밌는 일이란 걸 이제야 조금씩 느끼고 있다.

어렸을 적 치기로는 그저 맞추는 게 참는 거라고 생각했고 참는 것을 못하기도 하고 싫어하던 나에겐 불편한 일이었다.

요즘은 참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커버할 수 있어서 봐주는 느낌이다.

참거나 봐주거나. 봐주는 게 맞추는 건가? 맞춘다는 느낌은 둘 다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무튼 내가 맞춰가는 방법은 일단 봐주는건데, 그 봐주는 게 꽤나 재밌는 일이다.

봐준다는 표현보다는 양보한다는 표현이 맞춰간다에 더 적합할 것 같기도 하지만, 아직은 내공이 부족한지 양보보다는 그냥 봐주는 느낌.

양보는 참는 느낌이랑 더 가깝기도 한 것 같고… 봐주는 건 말 그대로 그냥 봐주는 느낌이라 나는 후자가 더 좋다.


#궤도

2021년과 2022년 사이.

제일 오랫동안 풀지 못한 과제를 들춰봤다.

언제나 ‘정상궤도’에 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불안한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왔었는데.

한편으로는 그럴 바엔 ‘궤도 이탈’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궤도 이탈이 뭔데?라고 한다면 그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그 방향을 알아 내지 못했다.

아무리 내가 소수적인 방향으로 나간다 한들 그 소수만의 궤도라는 것이 존재하니 그 또한 궤도가 되어 버린다.

길을 걸어가는 리듬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조금 떨어져보면 그저 한 길로 보일 것이다.

누군가 걸어간 발자국이 길로 되듯이. 궤도란 도는 순간 이미 궤적이 되어 길이 만들어져 버린다.

소수가 아닌 혼자의 길이란, 이탈되어 보이는 듯한 그 길은 존재할까?


#중독

장르 소설에 중독되어버렸다. 근 6개월 바짝 인가?

현실 도피성으로 아이돌의 이야기에 푹 빠지거나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현타가 빨리 와서 곧 헤어 나오곤 했다.

(보통은 ‘와 진짜 열심히 산다’라는 동기부여 자극을 받고선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 자극을 받기 위해 내가 아이돌에 집중하기도 하나 싶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을 핑계로 공부 삼아 본다던 이야기들이 결국 밤새워 읽게 되는 중독자가 되었다.

심한 날엔 2시간을 자고 출근하기도 하고 평균 4시간의 수면시간을 갖는 것 같다.

잠들기 싫을 만큼 재밌어진 나의 하루의 8할은 이 소설들 덕분이다. 새로운 세계에 빠져 잊어버리는 현실감은 꽤나 짜릿하다.

더 심각한 것은 안경이 끼고 싶어 태양을 말똥말똥 쳐다보던 어릴 때도 전혀 떨어지지 않던 시력이

밤새워 보는 핸드폰 속 활자에 뚝- 떨어져 버렸다.

난생처음 느낀 시력저하는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고장난 렌즈를 낀 낯선 느낌이라 병원까지 다녀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밤새워 핸드폰 속 활자에 집중한다.

책을 보는 시간이라며 억지로 시간표에 시간을 만들어놓고도 안 보던 책을, 이제는 잠을 줄여가며 없던 시간을 만들어 내며 보고 있다.

 덕분에 나는 근 2년만에 처음으로 아무런 N 잡을 시도하지 않는 게으른 독서쟁이가 되어가고 있다.

‘하얀 늑대들’이라는 판타지 소설에 처음 빠졌을 때 태어나 처음으로 밥을 먹는 시간도 달갑지 않았었다.

그저 주인공이 헤쳐나가는 그 세계만이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내내 방에서 누워 책만 봤다.

그리고 지금. 방학도 없는 직장인이 소설의 세계에 점점 갇혀간다.

적당한 현실과의 밸런스는 삶의 활력이 되는데 중독이 강하게 되어 요즘은 밸런스 붕괴가 되어가고 있다.

오늘도 또 열심히 읽어야지.


#소설

읽는 것에 열중해서 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포인트들이 들어있는 소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소설들도 있다.

그런 포인트를 찾을 수 없는 날엔 그냥 내가 이야기를 만들자 싶기도 해서 소설을 썼다.

꽤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다는 나의 열망처럼 나름 플롯을 만들고 쓱쓱 마흔 페이지까지 정도 쓰고 어느 순간 멈췄다.

어느 순간 꾸역꾸역 이야기를 억지로 채웠다. 왜 억지로가 되었는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름 오랫동안 생각했던 이야기이고 사건들을 한차례 난도질해서 재조합을 할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하지만 어제 그 소설의 끈을 놓았다.

평소 모든 일에서 항상 내가 중요하게 말하던 ‘핵심’, 즉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였다라? 라고…

‘스토리’를 놓친 것이 그 이유다.

어제 그것을 알았고 다시 시도하기 위해 미련 없이 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브런치에 낭만보다는 중2병에 가깝던 나의 주저리들이 조금 줄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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