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생각난 그, 썸탄 썰 (상)

결혼이 연애의 실패라면 이별은 연애의..

by 김호정

그러니까 2008년은 내 인생에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해이다.


연초에는 소개팅을 해서 만난 그 남자에게 마음쓰고 신경쓰고 영적인 촉이라도 끌어들이고 싶은 그런 복잡한 날들이 있었고, 여름에는 동생과 15박17일의 유럽여행을 다녀오면서 본격적으로 서양미술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연말즈음엔 논문을 준비하느라 진짜 너어어어무 힘들었었다. 그 시간동안 그 썸남은 계속 걸쳐져 있었다.


누군가 그랬다. 20대 후반이 되면 공부를 더 할까, 결혼을 할까, 승진이나 이직을 통해 연봉의 발전을 이룰까 등의 선택지를 고민하게 되는 시점이 온다고.

나에게 20대 후반은 결혼은 아니었고, 공부와 취업이었다. 하지만 결혼이 아니라고 연애도 아닌 건 아니니까.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 나랑 같은 나이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두 사람모두 넉살도 좋고 두루두루 편한 성격이라 셋이서도 자주 만났을 만큼 친하게 지냈다.

내 친구를 경은, 친구의 남자친구를 재석이라고 하자. 둘 다 같이 있으면 너무나 재미있고 신나는 사람들이다. 알바시간이 끝나갈 때 즈음 남자친구가 늘 데리러 왔고, 적당히 눈치봐서 같이 저녁을 먹기도 했고 토요일에 만나서 놀기도 했다.


어느 토요일 아침부터 문자도 아닌 전화가 왔다.

"야, 일어났어?"

"니 전화때메 일어났다. 왜?"

"우리 삼겹살 먹으러 갈건데 같이 갈래?"

"뭐야, 지금 열시야."

"11시쯤 식당 문 열겠지. 화장하고 준비하는 거 한 시간 정도면 되지? 11시에 느네 집으로 데리러갈께. 오빠 교회차 있어."

"아오. 알았어."


외로운 싱글을 위해 토요일에 놀아주는 거 너무 고마운데 아침부터 삼겹살을 먹겠다니. 사실 나도 아침부터 삼겹살 먹는 사람이긴 하다. 삼겹살은 반찬일 뿐 메인은 아니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런 상황이..넘 웃기잖아.


11시가 되어 친구는 둘은 나를 데리러왔고 같이 저렴한 삼겹살 집으로 갔다. 아침부터 삼겹살 먹으러 식당에 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맛있게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너 오후에 다른 일 있어?"

"있겠냐? 왜?"

"오빠 교회 요즘 바쁘거든. 같이 가서 너도 좀 도와줘."

"뭘 도와 주면 되는데?"

"주보 만들어야 돼. 타자칠 줄 알지? 그거 프린트 해. 프린트 할 줄 알지? 프린트 나오면 예쁘게 접고. 알았지?"

"그런 걸 전도사가 해야 돼? 학생회 같은 거 없어?"

"그런 거 없어. 작은데는 다 그냥 도와서 하는거야."

둘이 막 웃으면서 말하는데 이게 웃긴 일인가 싶지만 나도 뭐 딱히 할 일도 없고, 알았다 했다. 대부분 대형 교회만 다녀서 작은 교회는 어찌 돌아가나 궁금하기도 했고.


고기를 먹고 간 재석오빠의 교회는 상가 2층에 있는 교회였다. 한 100명 정도 모인다고 했다. 다락처럼 있는 작은 공간으로 데리고 가더니 쪽지를 주면서 쪽지대로 주보를 만들란다. 헐, 진짜였어.


경은이는 옆 컴퓨터에서 악보를 편집하고, 재석오빠는 찬양팀 연습을 하는건지 성가대 연습을 하는 건지 아이들 데리고 예배실에서 여러가지를 했다. 그리고 누군가 다락방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보를 만들던 중이기도 했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해서 굳이 돌아볼 필요까진 없겠지 생각하는 동안 그는 경은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어 누가 계셨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것(악보편집) 좀 도와달라고 해서 오늘 같이 왔어요. 얘는 제 친군데 그냥..."

말끝을 흐리니 그냥 뭐 약간 고개를 돌려 까딱하며 인사했다. '아녀세요' 느낌으로. 난 진짜 '그냥' 온거니까.


다들 예상하셨겠다시피 나만 그냥이고 그들에겐 그냥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 주에 영화볼래?"

"요즘 재밌는거 해?"

"<무방비도시> 보고싶데. 오빠가 손예진 좋아해."

"퐈하하하하하하. 그래, 보자. 난 한국영화 좋아해."

"걔도 부르려고. 괜찮지?"

"걔가 누구야?(알면서)"

"동건이. 오빠네 교회에서 봤잖아. 걔랑 소개팅 한 번 해."

나는 오는 남자 안막았고 가는 남자는 막았다. 주말이었는지 평일이었는지 기억은 안나는데 아무튼 영화를 같이 봤다. 넷이 쪼르르 앉아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게, 영화 장면중에 김명민이 겉옷 안쪽에서 총을 꺼내듯이 손을 넣었다가는 가운데손가락을 들고 빼는 장면이 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날만큼 그게 너어어무 웃겼었다. 내가 한번 터지만 잘 그치지 못해서 정말 영화 내내 웃고 막 나와서도 갑자기 생각나면 웃고 막 그랬던 기억이다.


지금도 너무 웃겨서 글이 진도가 안나감. 영화내용은 1도 기억안나고 이 장면만 명장면ㅋ


영화를 보고 같이 저녁을 먹고 둘은 가고 동건이랑 나만 남았다. 뭐 무슨 말이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 당시만 해도 상대가 너무 나이가 많거나 진상이 아니면 별로 낯도 안가리고 말도 잘했었고 잘 웃고 그랬다. 잘 놀다가 번호를 주고받고 헤어졌고(그냥 재석오빠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밤에 문자가 왔다. 그냥 의례적인 문자였다. 잘 들어갔냐, 재밌었다. 또 뵈요.. 이런 식.


밤에 싸이월드에 들어가보니 동건이는 일촌신청도 하고 방명록도 남겼다.

"미니홈피 너무 재미있네요. 밝은 분이셔서 참 좋아요."


(싸이월드 얘기나온김에^^)

https://brunch.co.kr/brunchbook/cyward


얘 벌써 나 좋아하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석오빠에게 듣기로는 1살 연상의 여인과 3년 정도 만나다가 헤어졌는데, 헤어진 상처가 엄청 컸나보다고 했다. 가끔 담임목사님 내외와(재석오빠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 아들이었음)식사할 일이 있을 때면 여자친구 있어서 좋겠다, 조심스럽게 잘 해주면서 잘 만나라. 우리 동건이는 그렇게 헤어지고 폐인이 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괜찮아보이지만 저래서 여자를 만날까 싶고...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고 했다.


한 두번 정도 전 여친에 대한 이야길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헤어짐을 고하더라. 3년을 만났는데. 데리러 가고 데려다 주고 했던 모든 일들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무서워. 이러면서.


스포일을 하자면,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되어 헤어짐을 고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동건이었다. 그녀에 대한 복수인지 그냥 내가 싫어진 건지 헷갈렸지만. 모든 이별은 슬프다, 아프고, 괴롭다.


그 와의 만남이 늘 괴로웠던 것은 아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