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생각난 그, 썸탄 썰(중)
불안한 것은 미래만이 아니야.
나는 딱히 이상형이 규정되어 있다기 보다는 어떤 사람이 다가오느냐에 따라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너무 싫어하기도 하고 그랬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나는 좀 사피오섹슈얼 (Sapiosexual)이다. 그니까 똑똑하고 지적인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처음에 다같이 만나고 나서 재석오빠는 동건이 어땠냐고 물어보면서 동건에 대한 썰을 풀어놓았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은 어디, 누나와 동생은 어떻고, 아버지의 전직 등에 대해... 화려했다. 마음에 들었다.
첫 날 둘이 남아서 대화할 때, 처음이니까 낯설고 어색한 건 있었지만 뭐랄까 편하고 좋은 느낌은 있었다. 말이 많거나 리액션이 크진 않았지만 툭툭 재미있는 말을 던지고 씨익 웃는 모습도 좀 괜찮아보였달까. 키가 나보다 겨우 조금 큰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사실 가족이 다 고만고만 도토리키재기라고 했다. 작은 집인가보다.
한 서너 달을 드문드문 만났던 것 같다. 발렌타인데이에도 만나자고 하고 화이트데이에도 만나자고 하고 그의 생일에도 자기의 생일이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하고 내가 시험기간이었던 기간엔 그도 도서관으로 와서 공부를 했다.
재석경은커플과 함께 식사를 하던 날 둘이 물었다. 아마 그 둘의 최대 관심사는 우리 둘이었을 것이다.
"동건이 계속 만나?"
"응, 만나자고 하면 만나지."
"찬양팀에 소문났어."
"뭐라고?"
"애들이 막 연습끝나고 그 여자 만나요? 예뻐요? 좋아요? 하고 묻고 막 동건이 흥분하고. 하하하하. 걔 원래 안그런 애거든. 그냥 딱딱 할 말만 하는데 요즘 좀 웃겨."
"그렇군."
"사귀는거 아니야?"
"그러자고 말한적은 없어."
"좀 고민이 되긴 하겠지. 근데 부모님한테도 말했나봐."
"뭐? 진짜?"
"어제 새벽기도 끝나고 나가는데 사모님이 좋은 아가씨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
"그래? 뭐야.. 담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네."
"어흐. 적극적인 여자."
그는 멀쩡한 스펙을 내팽개치고 신학대학원에 가겠단다. 아 정말 뜯어 말리고 싶었지만 특유의 뚝심은 상당히 굳어 보였다. 과외알바를 하면서 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만나자고 하는지, 나는 왜 만나고 있는지 뻔히 알지만 관계를 규정하기는 조심스러웠다.
나도 그때는 내 용돈 수준정도 밖에 벌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시간이 가면 달라지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얼마나 노력하며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논문이 끝날 지, 나는 어떤 곳에서 돈을 버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 얼마나 벌 수 있을지 막막했다.
아빠의 퇴직도 생각보다 빨랐기 때문에 내가 집안에 도움은 못됐지만 마음의 부담만은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그 시간을 통과해보니 별것 아니었는데, 온통 '무사졸업과 취업'이라는 이슈에만 머물렀던 때는 여유 혹은 괜찮은 미래를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미래도 불안하지만 현재 역시 불안했다.
동건의 아버지가 금융권에 계시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목회의 길을 가신거라 어머니의 고생이 컸고, 그래도 믿을 것(?)은 장남인 동건의 출세인데, 이 멀쩡했던 놈 마저 그 길을 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가끔 우신다고도 했고 그럴 땐 좀 흔들리기도 하지만 흔들릴 수 없다고 했다. 신념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다. 나도 그 신념이 이해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가 좋기도 했다.
인간적인 매력도 느끼면서 말도 통한다는 느낌. 계속 보니 외모도 괜찮아보이고, 키는 아쉽지만 키높이신발이 있잖아 싶고. 그리고 이건 좀 신비의 영역이긴 한데 그를 만날 때 내가 느꼈던 편안함.. 종교 용어로 말하면 평안함이랄까, 영혼의 안정감이랄까 그런 것이 있었다.
내가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느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같은 종교를 가진 남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던 감정이다. 그런 영감이랄까 뭐 그런 것은 부부나 연인사이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을 믿어도 헤어지고 안믿어도 잘 산다. 뭐 이게 귀신뭐시기같은 소리일지 모르나 나는 그런 정서가 느껴지는 것이 좋았고 나의 연애사건을 두고 굳이 기도까진 하지 않았지만 뭐랄까, 글과 말로 표현하기는 좀 낯선, 그에게서 오는 어떤 아우라가 있었다.
연초에 만났던 그를 여름이 올 것 같은 봄까지 만나고 있었다. 그가 수련회에 갔을 땐 풍경과 셀카를 찍은 사진을 보냈고, 시험 기간엔 자기도 아직 안 자고 있다며 새벽 2시에도 문자를 보냈고, 내가 미니홈피에 업로드를 하면 댓글 대신 문자로 좋았겠다, 부럽다, 다음엔 나랑.. 뭐 이런 식으로 보냈다. 그런 식으로, 그때는 썸탄다는 말이 없어서 그냥 애프터가 지속되고 있는 그런 뭐 그런 상태.
남자친구가 있냐고 하면 있다고 말은 못하겠는데 다른 소개팅은 나가기가 좀 그런 상태.
의사소통은 적극적으로 하자는 나의 좌우명에 따라 어느 날 나는 물어보았다.
"나를 왜 만나요?"(우린 계속 존대말을 했다. 쓸데없이 고상하기만)
"아... 드디어 그날이 왔나요?"
"진작 했어야 하는 얘기 아니에요? 벌써 몇 달이죠?"(글로 써서 그렇지 당시의 분위기는 가벼웠다. 웃으면서 얘기하는 중이다)
"그렇죠. 미안해요."
"뭐가요?"
"남자답지 못한거."
"알고 있네요?"
"네. 저 주제파악 잘합니다. 공대출신이지만."
"농담 그만하고요."
"아, 그게. 음. 오늘 수요일인데 수요예배 빠지고 나온거에요. 그러니까 아버지도 인정해 주는거죠. 수요예배 빠진다고 안혼나고."
"내 덕에 땡땡이쳐서 좋겠네요."
"아니, 그러니까..내가 좀 고민이 많이 되고, 호정씨도 느끼겠지만......근데 지금 내가 뭐 아무것도 아니고....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참... 호정씨가 밝아서 참 좋아요."
"나 안 밝아요. 어두워요. 다크야 다크."
"긍까, 이런 리액션 너무 좋다고."
"누가 좋다고?"
"........"
"그럼 그만 만나요. 뭘 질질 끌어."
나도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원래 용기있는 편이긴 했다. '진지한게 만나자', '좋아한다' 이런 말을 꽤나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만 만나잔 말은 100%진심이 아니었지만 그 찰나에 나오고 만 말이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저 그만 만나자는 말도 약간 웃으면서 말했다. 가볍게. 그 뉘앙스를 전할 수 없어서 아쉽다. 그때 그가 대답했다.
"그럴 순 없어요."
"왜요?"
"호정씨가 소중하니까."
"알았어요. 여기까지 접수."
가벼운, 웃을 수 있는 분위기이긴 했지만 이 다음 말이 무슨 말이 되든 듣기가 두려울 것 같았다. 소중하니까 진지하게 만나자는 말도, 소중하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다는 말도.
이 날 이후로 한 번 더 만났고, 그냥 종전과 같은 감정의 수준으로 만났다. 솔직히 그냥 이런 기대감이 있었다.
'우리의 지금 모습이 어떻든 결국 우린 결혼하게 될 거야.'
뜬금없는 믿음이긴 한데, 왠지 그럴 것 같은 묘한 믿음에 관계를 더 진전시키고 싶은 조급함이나 후퇴하면 어떡하나 싶은 두려움이 없었다. 그날 헤어지면서
"호정씨, 괜찮아요?"
"네, 뭐. 네."
"다행이에요."
"네. 그냥 편하게 삽시다."
"고마워요."
이렇게 나는 털털한, 편안한, 고마운 존재로서 그의 옆에 롱런하며 결국 우린 결혼하게 될테니 정말 편하게 마음 먹었다.
그렇게 편하게 마음먹은건 나 뿐이었다.
그는 아니었다.
그는 잠적했다.
동굴을 팠다.
파고 들어가서 안 나왔다.
한동안.
이래서 썸이다.
썸은 사랑이 아니다.
썸은 쿨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