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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Mar 25. 2023

퇴사하였다, 인사도 식사도 없이.

쉬는 것도 안쉬는 것도 아닌

2022년11월 말일로 퇴사했다.

2012년 1월에 입사했다. 만 10년만이다.


인사도 식사도 없이 퇴사했다.

퇴직금도 없다.

프리랜서의 퇴사는 그런 것이었다.


퇴사하던 날 남편이 사온 꽃다발 � 이런 센스가 있는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일하는 여자 좋아하는 사람인데ㅋㅋ
절친의 퇴사선물, 눈물나게 고마웠당ㅜㅜ


생각보다 일터에 쌓아놓은 내 짐이 많아서

2주쯤 전부터 짐들을 집으로 조금씩 옮겨놨다. 다행히 출근 마지막날엔 특별히 챙겨야 할 짐들이 많진 않았다.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던 내 사진과 문서들을 다 삭제하고 휴지통까지 비웠고, 내가 마무리해야 할 서류들을 정리하고 프린트까지 해서 담당직원에게 제출했다.


인수인계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정해진 폼이 있는게 아니라 내가 알아서 만들어서 작성해야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었다. 시간이 지체되니 다음주쯤 한 번 더 와서 자료를 마무리해야겠다, 생각했다.


10년을 다닌 직장이고, 이 직장에 다니며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재임신 재출산 등을 해왔기 때문에(프리랜서라지만 사실상 알바인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출산 후 복귀를 약속해주는건, 게다가 두번씩이나, 파격적인 대우였고 지금까지도 전무후무하다) 정도 많이 들었고 미련도 남아 다시 와서 말끔히 정리해야지 했다.


하 지 만


세 달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 다시 가진 않았다. 미비한 서류를 보충하라고 연락온 것도 없었고, 내 일이 굳이 인수인계자료까지 필요한 건 아닌 직무였나보다. 다행이다.




12월, 출근이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솔직히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일상이 편해진 건 아니었더.


12월16일부터는 혼자 가는 결혼10주년기념여행이 예정되어 있고 

12월28일부터는 세부한달살기가 예정되어있다.


여행을 위해 준비해야할 것들이 솔찬히 있었다.


혼자 가는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지는 일본인데 일본은 아직 3차 백신접종을 해야 일본입국이 좀 편했기 때문에 3차접종을 했다. 아이들과는 안전한 세부한달살기를 위해 보건소에 가서 장티푸스예방주사를 맞았고, 현지 입국을 위한 서류를 알아놓고 떼놓았다.

겨울나라로의 여행과 여름나라로의 여행을 위해

각 나라에서 필요할 물품들도 사러다녔다.


나 혼자 가는 패키지여행 사전모임

친정엄마에게 아이들 봐주시길 부탁드리며 아이들 스케쥴 브리핑

한달살기에 같이 가는 친구들과 사전모임

아이들 학교의 녹색부

학교에 체험신청서 제출


아이들 학교의 겨울방학은 1월초이고 중간에 개학과 봄방학 없이 바로 3월에 새학년으로 진급한다.

체험보고서를 언제 제출하러 가면 좋을지 선생님과 어색한 통화로 날짜를 잡고, 아이들이 다니던 학원에도 한달 간 빠질 것을 말씀드렸다.


이런 상황을 살고 있는 나는 마음이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내가 해왔던 일상의 루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고 앞으로는 벗어난다기 보다는 새로운 루틴이 만들어질텐데, 새로 만들어가야 할 루틴을 정할 수 없는 것이 애매했다. 12월엔 인생의 이벤트때문에 임시로 해야할 일이 많은 거라 발이 현실에서 5cm정도는 떠 있는 상태로, 나아갈 곳만 있고 돌아갈 곳은 딱히 정해지지 않은 여행자같았달까.


나의 MBTI는 슈퍼파워J이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 그 미래가 멀든 가깝든 간에, 때문에 느끼는 불안도가 큰 편인데 퇴사하며 사라진 직장생활의 스트레스가 있던 자리에 이 불안이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출근은 하지 않지만 출근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잘 시간이 다가오는 밤은 반가웠고, 노동을 요구하는 아침은 부담스러웠다.


  달라진 것은 직장다닐 때는 매일 느끼는 스트레스의 크기가 다소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퇴사후엔 스트레스대신 내가 느끼는 불안의 크기가 조금씩 커지는 거였다. 커지는 불안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 덕분이었다.


일상의 판을 흔드는 이벤트는 본연의 나와 직면하는 일이기도 했다. 본연의 나는 반갑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으며 대체적으로는 익숙했지만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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