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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호정 Mar 22. 2023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마침내.

생각보다 큰 엄마의 자리

기대하고 고대하던 전업주부가 되었다. 마침내.

퇴사의 표면적인 이유가 되어준 두 여행을 마쳤고, 남은 겨울방학동안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다채롭고 고되게 보냈다.


새학년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들의 요구에 따라 방과후도 원하는 만큼 신청해주었다. 학원보다 훨씬 저렴하니 감사하다.


그래도 기존에 다니고 있던 학원시간과 적당히 조화롭게 시간을 배치하는 것이 엄마의 할 일이었고, 새학기 준비물들을 꼼꼼까진 아니어도 빠지는 것 없이 챙겨주는 것이 엄마의 일이었다.


아이들의 취향 200%반영된 컬러ㅋㅋ 초딩부터 블랙으로 갈거냐규


3월 둘째주까지는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정해진 시간표에 맞게 학교와 학원, 학원과 집을 잘 오갈지. 한창 노는 것에 빠진 아이들이 스케쥴을 망각하고 운동장에서 놀고있지나 않을지.


다행히 풀파워J인 나에게서 나온 아이들이기에

적당한 J로 계획대로 잘 움직여주었다.

새학기의 시험대같았던 둘째주까지가 지나고 셋째주.

아이들도 나도 적응기를 완료한 기분이다.


출근하지 않는다고 막 여유롭기만 한건 아니었다.

가족들은 분명히 집에서 두끼만 먹고

나는 적당히 요기정도만 하며 완전한 세끼를 먹진 않는데 나는 하루에 4번이상 설거지를 하는 기분이고

하루는 속옷, 하루는 겉옷을 빠는 세탁시스템을 운영중인데 어느 날은 속옷과 겉옷 빨래를 각각 했음에도 그 다음 날 또 빨래를 해야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하루에 한끼는 학교와 직장에서 먹고 오는데도

방학때보다 쌀이 더 급격히 줄어드는건 기분탓인가.


봄이 왔다는 신호인가.

버려야 할 것은 물론 버리고 싶은 것도 수두룩하다. 옷 만이 아니다. 책도 장난감도 부엌의 세간들도 수명을 다 한 것들이 눈에 띈다.


화장실은 이리 빨리 더러워지는 공간이었나.

가스렌지 주변은 늘 전쟁터에 기름터.

우리집은 먼지가 잘 쌓이는 집인가.

개켜야 할 빨래는 많지, 빨래를 자주 하니까.

건조기가 필요한게 아니라 빨래 개켜주는 로봇이 필요하네.


아직은 목적을 정하진 못했다는게 함정




내가 출근해있는 동안엔 친정엄마가 아이들을 봐주셨는데, 엄마가 해주신 일이 아이들 봐주신 것만이 아니었구나. 생각보다 엄마는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픈 배를 채워주는 것은 기본중에 기본이었고, 무엇보다 치우는 일이 중요했는데

"치운다"라는 개념이 이렇게 확장적인 개념인지 몰랐다.

아이들이 노느라 어지럽힌 거실과 방 만이 아니라

생존을 돕는 부엌과 화장실까지.

정리만 하는게 아니라 쓸고 닦고 광내고,

가끔씩은 구조도 바꿔주는게 "치운다"는 것이었다.


니네를 치우고 싶구나.

차라리 나를 치워주렴.


내가 그나마 워킹맘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확장적 개념의 "치운다"를 맡아서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걸 내가 다 해내려니 24시간이 부족한 기분인데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니 동기부여가 덜 되지만, (가사노동의 경제적 보상에 대해선 차차 얘기해보겠다.)나는 돈벌이보다는 이런 걸 하겠다고 자처하고 퇴사한 것이니

멘탈을 새롭게 하며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려고 노력해본다. 노력하다보면 새로 태어나는 것도 습관이 되겠지.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나는 카페에 가거나 미술관을 다닐 수 있겠지, 싶었는데 가족들이 길어야 반나절 집에 머물며 남겨놓은 흔적들을 치우려면 내 속도로는 적어도 1시간 이상을 빨빨거리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하루의 휴일도 내어주지 않은채로.




고학년으로 접어든 첫째를 위해서는

매일매일 문제집 풀기를 독려하고

아이의 속도대로 채점도 해놓아야 한다.

빨리 많이 풀길 바랐지만 많이 풀면 많이 푸는대로 많이 틀리고

꼼꼼하게 천천히 풀라고 하면 그래도 틀린다.

이 악물고 인내를 수련한다.

니 공부는 내 공부가 아니다.


전업맘이 힘드냐 워킹맘이 힘드냐

이런 밸런스게임은 이젠 무용한 것 같다

둘 다 힘드니까.

어느 쪽이 그나마 본인이 버틸만 한가, 에 맞춰

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너무나 바래왔던 퇴사였기 때문에 퇴사 후 뭘 할거야, 라는 계획은 없었다. 일단은 집안에 머물고 싶었고 아무생각 없고 싶었다.

아무생각 없기 딱 좋다. 집안일은 너무 바쁘다.

그래서 더 아무생각 없는 것 같다.

일단은 아무생각없이 오늘의 할 일을 한다.


마침내 전업주부가 되었으니

전업주부의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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