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적 책 읽기의 원인과 결과

읽다 보니 집착하게 되었지만 안 읽을 자유도 있다

by 김호정


2012년에 결혼하고 2013년 12월 말에 첫 아이를 낳고 겨울 내내 몸조리 겸 신생아 키우기에 모드로 들어갔다.


나는 최종학력 석사인 프리랜서로서 주 4일을 빡빡하게 일하거나 주 5일을 느슨하게 일하면서 여행을 다니고 가방을 사며 살았다. 활동적으로 살았다는 얘기다. 그러다 결혼이라는 연애의 실패를 겪었지만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신혼 생활을 보내다가 임신을 했고 출산에 이르렀다. 원했던 아이이고, 나름 노력도 해서 낳은 아이인데 이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이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인지 나는 1년간 우울감에 잠겨 있었다.


결혼할 때 돈이 없어서 텔레비전을 못샀다. 텔레비전은 지금도 없다. 하루 종일 울어대는 아이와 지내야 하고, 아이와 지내는 동안 나는 의태어 의성어를 쓰지 않고도 비유와 은유를 섞어 표준어로 완벽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석사 출신의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오기 전까진 모국어를 마음껏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는 괴로움이 너무 컸다. 울어대는 아이와 지내며 내가 어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책 읽기였다.


내 몸은 과하리만치 건강한데 딱 한 군데 약한 곳이 손목이어서 휴대폰을 오래 들고 있지 못했다. 보통 수유하면서 폰 보고 있었다던데, 출산 후 손목 발목 관절들이 다 제정신이 아닐 때라서 나는 폰 대신 책을 펴놓고 읽었다. 어찌어찌 책은 읽어지더라.




중 고등학교 때는 나름 문학소녀였으나 대학에 가면서 과제를 위한 독서 외에는 잘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책을 다시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밌고 신나는 거다. 책 읽는 시간은 내가 어른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고, 무학의 여자여도 할 수 있는 것들 투성이인 집안일과 아이 뒤치다꺼리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하루에 서너 번씩 아이가 응가를 할 때면 정말 내가 똥 기저귀나 갈아주려고 대학원 나왔나 싶어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첫째를 낳은 이후로 지금까지 매년 40-50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다. 내가 대학원 나온 어른이야!라는 몸부림이기도 했고, 똥기저귀나 갈아주려고 니 새끼 낳아준 게 아니야!라는 방향을 알 수 없는 외침이기도 했다. 조금씩 집착적으로 변해 갔던 독서 욕구는 배움의 욕구에까지 이르렀고, 그래서 매주 문학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 '배움'이라는 게 공짜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도 장장 12년씩이나. 그땐 그게 중헌지 모르고.

처음엔, 그때는 뭐하다가 이제 와서 먼 길을 돈까지 내가며 다니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은 '하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는 책을 읽으면 무언가를 느껴야 하고, 그 느껴야 하는 것은 외워야 하는 것이고, 그것들로 시험을 보기도 했다.


지금은 책을 읽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돈을 내고 강의를 다니지만 출석체크를 전혀 하지 않고 안 온다고 혼나지 않는다. 배워도 되지만 배우지 않아도 될 자유가 있고, 가르쳐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자유도 있다. 그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발언권도 충분히 주어지고 그 생각이 틀렸다거나 위험한 생각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구자인 강사에게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가 된다며 고마워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참 많은 것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책을 읽은 것이지만 내 마음과 머리엔 지식이 생겼고, 나의 생각의 반경이 달라졌으며 생각의 속도도 달라졌다(고 느낀다, 나는).


나 스스로를 어느 부분에선 결여 혹은 결핍된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 부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끌어다 채우려고 했던 늘 부족했던 나의 자아에 대해, 지금도 부족한 건 마찬가지지만 내 결여와 결핍을 온전히 나의 관심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덕에 하나님과의 거리는 생겼지만 그 거리만큼 나와 내 안의 내밀한 사귐을 누린다. 그리고 깨닫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낸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최대치의 일, 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최대치의 일 또한 예수에게는 일부의 일일 수도 있다는 것.


거리가 멀건 가깝건 하나님은 하나님인 채로 나의 삶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신앙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그 오해를 풀어가는 과정이 교회 생활이나 성경으로만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 역시 그 안에서 그들하고만 있기를 원할까 싶다. 원할 수도 있겠지. 나는 하나님을 다 모르니까.

어쩔 수 없이 신앙생활은, 오해를 푸는 과정은, 내 가치관과 내 지적 한계 안에서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다소 시니컬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적 한계를 넓히는 노력으로서 독서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책 읽기를 시작한 이유는 내가 어른임을 나 홀로라도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는데, 몇 년이 쌓인 책 읽기와 배움은 나에게 무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해 주었고 내 삶보다 더 길게 지속될 세상을 더 알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다면, 설령 놓친다고 해도 나는 내 인생을 더욱 사랑하며 깊이 있게 인생의 즐거움을 향유할 것이다.


결국 읽기의 즐거움은 쓰기로 열매 맺는 거라던데.

그러란 법은 없지만 읽기의 끝은 쓰기라고 하더라고.


언젠가, 써놔도 될 만큼의 인생의 순간들이 쌓이면,

초판 찍을 돈을 모으면,

이 꿈이 식어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러나 아직은 더더 읽어야 할 것이다.


검색만 있고 사색은 없는 시대

속독만 있고 탐독은 없는 시대


바쁘고 괴로운 시절일수록 나를 위하고 위로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이 책 읽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에게라도 책은(음란 불온서적이 아닌 이상) 최소 휴식 이상의 선물임을 믿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깨닫지 않고 느끼지 않아도 되는 놀라운 자유도 아울러 누릴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하고만 싶은 열정을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