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멋있더라

'나의 첫사랑 이야기' 공모전 탈락작

by 김호정

탈락해서 여기에 올립니다ㅋ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아이와 같은 반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과학에도 재능을 보였다. 착하고 리더십도 있는 아이. 그런 애들은 반장이 아닐 리 없고, 반장이라서 그런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너도 장착하고 있는 너무 괜찮은 이 아이를 6학년이 되어 같은 반에서 또 만났다. 사실 같은 학교를 6년 다니다 보면 전학을 가지 않는 한 같은 반에서 또 만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지만 6학년이 되어 만나다니 좀 특별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학기에 딱 한 번만 자리를 바꾸는 기회를 주셨었다. 6학년 2학기 자리 바꾸던 날. 지금도 기억한다, 그날을. 남자애들이 먼저 키대로 서서 자리를 확정했고, 여자애들은 복도에 키대로 서서 새로운 자리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힐끗 보니 그 아이는 3 분단 5번째 줄에 앉아있었다.

‘민욱이(가명)는 3 분단 5번째 줄에 앉아있구나. 나도 저기 앉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서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호정이는 3 분단 5번째!”


와우! 그야말로 대박사건! 뛰는 심장은 통제불능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그때의 쿵 했던 기분을.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분단의 5번째 줄에 앉는 여자아이들이 다 자리를 잡은 후에 나도 내 자리를 찾아갔다. 3 분단 5번째 줄이 내 자리인 것이 맞았다.


민욱이는 모든 것에 열심이었고, 성실했고, 착했고, 위트도 있었다. 자신은 카이스트에 가고 싶다고 했고, 유전공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6학년에게 유전공학은 너무 신기한 나라의 말이었다. 더 멋져 보였다. 나는 웬만해선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잘 가지 않고, 점심시간에도 나가 놀지 않고 내 자리, 그러니까 민욱이 옆 자리를 사수했다. 정 할 게 없으면 엎드려 잘 지언정 민욱이 옆을 잘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2학기를 보내고 우리는 시간의 약속에 따라 졸업을 했고, 민욱이는 그 동네의 남중에, 나는 여중에 입학했다. 그때는 휴대폰이 전무했고,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방법은 손편지 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소를 몰라 보내지 못했다.


2000년에 들어 ‘아이러브스쿨’이라는 사이트가 대히트를 했다. 나도 소문에 힘입어 가입을 했더니 이미 6학년 우리 반의 게시판이 만들어져 있었다. 역시 민욱이. 그럴 줄 알았어. 13살에도 반장인 민욱이는 20살이 되어도 반장이구나. 20살엔 내가 재수생이라 나가지 못했고 21살이 되어 처음 갔는데, 친구들은 다들 제법 멋진 모습이었고, 민욱이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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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민욱이, 민욱이는 서울대생이 되었다고 했다. 키는 6학년 때랑 비슷한 것 같았지만. 연말이라고 연말 모임을 만들고,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모임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여전히 반장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마음 때문인지 커서도 다른 친구들 대하듯 마냥 편하진 않았던 기억이다. 어쩌다 자리가 가까워져 오면,

“역시 내 짝꿍, 역시 반장이야. 넌 여전하구나.”라고 말했고, 민욱이도 “내 성격인가 봐.”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21살, 22살까지는 재밌게 만나다가 남자아이들이 군대에 가고, 어린 시절의 향수를 타고 몇몇 아이들이 사귀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헤어지기도 하면서 만남은 뜸해지게 되었다.


‘나의 첫사랑 이야기’ 수필 공모에 원고를 낼 생각으로 민욱이를 떠올리다가 페이스북에서 민욱이를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졌다. 내가 아는 교회 오빠와 이미 페(이스북)친(구)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친구 신청을 하기는 좀 그렇고, 민욱이의 근황 정도를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학위도 받아 왔나 보다. 방금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니 공학자가 되어 인터뷰를 한 기사도 있다. 6학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는 얼굴이다. 다만 뱃살이 좀 생겼구나. 공부를 많이 한 탓이겠지.

민욱이는 내가 첫사랑을 기억할 때 떠올리고 싶은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갖췄다. 나는 지적인 남자에게 매력을 느꼈기에 지적인 외모, 지적인 스펙,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상상하고 그렸던 모습 그 이상이다. 민욱이는 민욱이의 개인적인 성공 혹은 성취로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겠지만 민욱이의 성공과 성취 덕에 내 마음이 풍요롭다. 나에게 여전한 첫사랑의 환상으로 멋지게 살아줘서 말이다.


이 글로 상을 받으면 그때는 민욱이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해야겠다. 니 덕에 내가 성공했다고, 널 좋아한 덕에, 네가 내 첫사랑이 되어준 덕에 생각보다 큰 영광을 누렸다고.

상상만 해도 떨려온다. 너무 좋다. 이 파일을 내리면 민욱이의 사진이 있는 기사가 다시 한 번 내 눈에 보일 것이다. 내 눈엔 다 아줌마들인데, “똑같다, 야~”라고 인사하던 엄마와 엄마의 친구들이 생각난다. 민욱이도 똑같다. 6학년 때, 발표를 하거나 학급회의를 진행하던 그 모습 그 느낌 그대로다.


고맙다. 인생의 정오를 지나고 있는 지금, 남은 시간들 모두가 민욱이의 편에 서 있기를 응원한다.





공모전 하루 전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민욱이를 포털에 검색했다가 보았던 기사 때문에 잔뜩 고취되어 퇴근하기 전에 한 30분만에 쓴 글인데, 그래놓고 너무 만족스러워했던. 혼자만 너무 만족스러웠습니다.


*사진은 한국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