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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Jan 25. 2017

[내일을 위한 시간] 선택해야 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 : 정의와 소리로 본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낮잠 자는 모습이 보인다. 벨 소리가 들리지만 여자는 받지 않는다. 다시 한번 들려오는 두 번째 벨 소리에 여자가 일어난다. 여자는 전화를 받으면서 주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녀는 오븐앞으로 가서 파이를 꺼내며 통화를 계속 한다. 파이를 자르려고 하던 가운데 아무 말 없이 칼을 다시 내려놓는다. 그녀가 듣는 통화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정적이 흐르고 새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고개를 떨군다.  전화를 끊고 나서 여자가 처음 하는 말은 


울지마 

카메라가 흔들거린다. 

칸 영화제 최고의 상인 황금종려상을 2번이나 수상한 다르덴 형제의 최신작 <내일을 위한 시간>의 첫 신(scene)은 위와 같이 무미건조하다. 

다르덴 감독은 바로 이러한 무미건조한 카메라 기법으로 전(全) 작품들을 찍어낸다. 흔들거리는 카메라 기법, 즉 핸드헬드 방식은 관객들에게 자유분방한 시선을 제공하고 현장감과 즉흥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기법을 통해 다르덴 형제는 감독의 호흡을 관객의 호흡과 일치시킨다. 동일한 촬영기법을 꾸준히 사용하는 다르덴 형제의 진득한 고집은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대상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대상은 사회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하층민들이다. 

처음 장면에 나왔던 여자는 주인공인 산드라(마리오 꼬띠아르)이다. 그녀가 첫 신에서 무너진 것은 복직을 둘러싼 투표의 결과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동료들이 그녀의 복직과 보너스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보너스를 택한 것이다. 하지만 "울지마"라고 한 그 때, 다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투표가 공정하지 않아서 재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주말 2틀동안 16명의 동료를 찾아가 보너스를 포기하고 그녀의 복직에 찬성해달라고 설득해야 한다. 


다르덴 형제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서민의 삶을 끝자락까지 밀어낸다는 것이다. 1999년 작품 <로제타>의 주인공 로제타, 2005년 작품 <더차일드>의 주인공 브루노 역시 삶의 끝자락, 혹은 하층민의 상황에서 더욱더 상황이 안좋아지게 된 주인공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은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주인공들의 삶을 '돈' 때문에 일어나는 일련의 범죄들로 철저히 무너트린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무너지는 삶에서 희망을 이야기 한다. 다만 이번 영화가 그 전 영화들에 비해서 다른점은 희망의 범위다. 다르덴 형제의 바로 전작품인 2011년 <자전거를 탄 소년>에서는 주인공인 꼬마 시릴이 동네 건달의 영향으로 신문배달부와 그 아들의 머리를 야구방망이로 쳐서 강도질을 한다. 그 이후 신문배달부는 꼬마를 잡았지만, 혼을 내주기는 커녕 꼬마를 용서한다. 바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용서함으로써 사람의 현재, 혹은 미래를 치유하는 구성이다. 바로 이러한 치유의 구성은 다르덴 형제 영화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는 그 희망의 범위가 집단 대 개인으로 확장된다. 재투표를 위해 한 사람씩 찾아가던 주인공 산드라는 결국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조금씩 치유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치유되는 것은 그녀의 자주적인 선택 때문이다. 



신은 언제나 하나의 결과가 나오면 곧바로 다른 하나의 선택을 준비한다. 산드라의 복직 투표가 끝난 후 사장은 산드라에게 복직을 제안한다. 일하고 있는 계약직 중 1명을 내보내고 들어오라는 게 그의 조건이다. 선택권이 주인공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선택권은 관객에게도 묻는다. 


당신은 과연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주인공은 복직을 포기한다. 

누군가는 이해를 못할 수도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감독은 마지막에 나오는 주인공의 미소로 화답한다.



삶과 사회를 바꾸는 선택은 바로 우리들이 직접 해야한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내가 손해를 감수를 해야한다. 과연 정의로운 선택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에게 합당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정의라고 말한 반면 

 <정의론>의 존 롤스는  '정당화 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두 대가들의 논쟁이 주인공인 산드라가 그녀의 직장동료들과 나눈 대화와 닮아있는 것은 현실과 어느 한 정의가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의견의 팽팽한 대립처럼 극 중 득표수 역시 정확히 절반이 인 것은 여전히 '정의'라는 것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만 감독은 갈림길에 있어서 주인공 산드라의 행동으로 어느 한쪽에 나지막히 손을 들어주었고, 감독은 관객들의 호흡을 넘어 행동까지도 훔친다. 



마지막으로 음악을 대하는 산드라의 태도에 주목하자. 영화에서의 음악사용을 자제해 온 다르덴 형제는 이번 영화에서 음악을 단 두 번 사용한다. 그 중 한 번은 동료들을 만나러 가는 차 안에서 흘러나온다. 남편은 심란한 산드라를 위해서 음악을 끄려고 하는데, 그녀는 오히려 남편을 제지하고 음악의 소리를 키운다. 

 주인공의 삶이 이제는 타인이 아닌 그녀 스스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변화할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조종하는 삶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사회이든, 개인이든. 문제는 영화에서처럼 내가 하고 있는 결정이 누군가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칠 결정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 결정은 분명 나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결정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거장 감독이 제시하는 묵직한 메세지는 그러한 선택에 있어서 분명히 참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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