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라이트의 스포일러와 작가의 편애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 너무 좋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는 너무 좋다. 한 아이의 성장담을 이토록 매혹적으로 때깔 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인 베리 젠킨스의 힘이다. (물론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다. ) 베리 젠킨스는 마이애미 리버티 시티에서 1979년에 태어났다. (극 중 배경도 이와 같다.) 그는 12살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마약중독인 어머니와도 떨어져 살았다. 홀로 된 베리제킨스를 돌봐준 것은 같은 아파트 동네에 살고 있던 아주머니였다. (로맹 가리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 나오는 로자 아줌마와 같은 사람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는 2008년, 그의 나이 30살 (만 28세)에 데뷔한다. 멜랑콜리의 묘약(원제 : Medicine for Melancholy )이라는 영화로 데뷔하였는데, 이 영화는 첫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뉴욕타임스의 연말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뽑혔다. (이때 같이 뽑혔던 영화가 '아바타'와 '허트 로커'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고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HBO의 “The Leftovers” 의 작가로 일하게 된다. 첫 영화로부터 8년 후 자기가 살던 동네에 살던 극작가 Tarell Alvin McCraney 으로부터 아직 출판되지 않은 “In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를 보게 되고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금의 “Moonlight” 가 나오게 되었다.
총 3막 ( i. Little ii. Chiron iii. Black)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라이트는 빗소리로 시작한다. (심지어 구성되어 있는 번호 조차 1,2,3 이 아닌 i, ii, iii이다. 난 이런 조그마한 디테일에 감동하곤 한다. ) 그리고 Boris Gardiner 의"Every Nigger Is a Star”. 이 들려온다. 파란색 자동차를 타고 오는 후안. 그는 마약 딜러다. 첫 화면은 마약을 사려는 노인과 직원, 후안을 차례로 아웃사이드 워킹( 이 영화에서는 두 번 쓰인다. ) 으로 잡아낸다. 후안의 뒷모습으로 시작하는 화면은 차례로 그의 얼굴과 말투를 훑으며 후안의 존재감을 묵직하게 각인시킨다. 자신의 구역을 확인한 후안은 차로 돌아가려고 도로를 건넌다. 그 때 아이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다음 화면은 파란색 가방을 멘 주인공 (샤이론)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영상이 나온다. 샤이론은 어떤 창고 같은 곳에 숨는다. 샤이론은 문을 닫고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을 창문을 통해 보며 안심한다.
창문은 흔히 밖을 내다보는 용도로 쓰인다. 샤이론이 보는 창문 밖 풍경은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혹은 세상)이며, 오히려 샤이론은 창문이 나무판자로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 때 나무판자를 뜯고 창문을 통해 창고로 들어온 사람이 후안이다. 후안이 들어오는 느낌은 무지막지하면서도 엉뚱하며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흡사 누군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느낌과 같다. 그런 후안을 보는 샤이론은 무서우면서 흥미롭게 후안을 쳐다본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문으로 같이 나가자고 제안한다. 샤이론은 파란색 가방을 메고 파란색 후안의 차에 올라탄다. 후안의 차 대시보드에는 조그마한 왕관이 있고, 운전석 위에는 노래 CD가 잘 정돈되어 있다. 후안은 샤이론을 자신의 집에 데려간다. 후안의 여자 친구 테레사는 샤이론에게 밥도 주고, 친절하게 이야기를 건다. 그런 후안에게 샤이론은 집에 가기 싫다고 하고, 샤이론은 결국 후안의 집에서 자게 된다. 자는 동안의 파란 달빛 화면이 샤이론을 감싼다. 아침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된 후안과 샤이론.
그의 엄마 폴라는 묻는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Who is you?)
후안은 말한다.
“Nobody”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라이트의 시작은 Little이다. 리틀은 친구들이 주인공 샤이론을 부르는 별명이다. 샤이론은 친구들에게는 괴롭힘을 당하고, 엄마는 마약을 한다. 유일한 장난감이었던 TV가 없어진 날은 오랫동안 목욕을 했다. 샤이론의 어렸을 적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두 사람이다. 앞에서 말했던 후안과 엄마 폴라다. 아버지가 없던 샤이론은 후안을 아버지처럼 따른다. Nobody라고 했던 후안은 Little으로 불리는 샤이론에게 Little Man.이라고 부른다.
어느 날 후안은 샤이론에게 수영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카메라 앵글이 매우 흥미롭다. 화면은 물속을 잡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 밖을 잡는 것도 아니다. 단지 수영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보는 물의 위치. 딱 그 정도에 물의 공포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믿음을 통해 물에 대한 공포감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가르킨다. 후안의 가르침을 받은 샤이론은 이내 자신의 힘으로 수영을 한다.
이 시간으로 둘의 관계는 재 정립된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자신의 어렸을 적 만났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샤이론의 인생을 관통할 메시지를 던진다.
“달빛 속에서는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언젠가 무엇이 될지 너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아무에게도 맡기지 마. "
(Can’t let nobody make that decision for you)
후안과 샤이론은 아무런 관계(Nobody)도 아니다. 우연하게 만난 인연으로 서로를 알게 됐고 그렇게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소중한 모든 사람들은 우연으로 시작되어 인연으로 발현된다. 이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우리 모두가 사람들 개개인과 관계 맺는 것과 같다. 다만 그 장소와 위치가 다를 뿐이다.
후안은 두 가지 메시지를 통하여 흑인이며 성소수자로 살아갈 샤이론에게 인간으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대사는 들리지 않는다.
후안과 달리 어렸을 적 그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 사람은 엄마 폴라다. (후안은 블루 엄마는 레드의 이미지로 차용된다.) 후안과 싸우고 돌아온 엄마는 샤이론에게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표정, 제스처 등을 보며 유추할 뿐이다. 우리는 그 무음 장면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말이나 소리를 대입하여 느끼게 된다. 무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잔인함은 그러한 고통을 겪었던 사람의 고통에 비례하여 극대화된다. 샤이론은 그런 엄마에게 대들지 않는다. 유일한 안식처인 후안의 집으로 갈 뿐이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앉는 법을 가리킨다. “문을 보고 앉아야 해. 그래야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볼 수 있어"
ii. Chiron
샤이론은 고등학생이 된다. 여전히 엄마는 마약을 하고, 친구들은 그를 괴롭힌다. 수업시간에도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샤이론을 괴롭힌다. 방과 후에도 갈 곳이 없는 샤이론은 문이 양쪽으로 나있는 곳의 중앙에 가만히 서있다. 감독은 샤이론의 마음을 대변하는 장치로 곳곳에 문에 대한 이미지를 넣어 영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샤이론의 유일한 친구는 케빈이다. 어렸을 적 “너도 강한 것을 남들에게 보여줘야 해.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너가 강한 것을 알 수 있어”라고 말했던 케빈은 샤이론을 ‘블랙’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어느날 샤이론은 엄마로 인해 집에서 잘수 없게 되자 후안의 집으로 간다.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는 엄마 폴라가 보여주지 못한 사랑을 샤이론에게 베풀어준다. “고개 숙이지 마 , 규칙 알잖아. 여기는 사랑과 자부심 밖에 없어”
제 2 막인 샤이론 편에서는 후안이 죽은 것으로 암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레사’라는 이름을 가진 후안의 여자 친구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샤이론을 꾸준히 돌봐준다. 과묵한 샤이론의 미소가 처음으로 보이는 지점이다. 샤이론의 미소는 사랑이다. 그런 샤이론의 미소가 극대화되어 정점이었던 순간은 바로 케빈과의 접촉 이후이다. 마음 둘 곳이 없어서 해변가로 갔던 샤이론은 그곳에서 케빈과 성적인 접촉을 하게 된다. 샤이론은 접촉 이후 케빈을 더욱더 특별하게 여기고, 이러한 관계는 ‘손’이라는 메타포를 통하여 표현된다. 이때의 손은 사랑의 손이다. 성적인 손이며, 두 사람을 연결하는 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손을 통하여 샤이론은 무너진다.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의 강요로 인하여 케빈은 관계를 맺었던 손을 통하여 샤이론을 폭행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폭력. 바로 그 부분에서 두 번째 무음이 나온다.
“나는 너무 많이 울어서 언젠가 내가 눈물이 될 것 같아” 샤이론은 너무나도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다만 관객들은 샤이론의 눈물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샤이론은 폭행 이후 상담을 해주는 선생님 앞에서 오열한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처음으로 그의 눈물과 마주한다. 자신을 지탱하던 두 개의 축 중에 하나 남은 케빈이 없어짐에 따른 큰 상실감 때문이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그가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보인다. 혹은 그가 수영을 가르켜주었던 후안을 생각하며 삶을 이겨내기 위한 의식처럼 보인다. 그는 이후 파란색 옷을 입고, 케빈에게 폭력을 명령했던 친구를 폭행한다. 그는 경찰에게 인계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케빈을 본다.
iii. Black
작고, 깡말랐던 리틀, 샤이론의 시간을 지나 샤이론은 이제 블랙으로 불린다. 항상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했던 샤이론은 이제 누군가를 쉽게 위협할 수 있는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고, 그때마다 운동을 하거나 물속으로 들어가며 생활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2통의 전화가 온다.
바로 무음의 트라우마를 남긴 엄마와 케빈으로 부터이다. 이때부터 감독은 샤이론의 트라우마를 차례로 봉합하기 시작한다. 물론 결론적으로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케빈이다. 그는 손님이 가게에서 튼 음악을 듣고 나서 샤이론이 생각 나 연락을 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통화의 끝맺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샤이론의 혼란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넘어간다. 그는 행동한다. 우선 요양원에서 마약중독을 치료받고 있는 엄마를 만난다. 엄마는 마약 딜러를 하고 있는 샤이론을 훈계하고, 엄마의 마약중독으로 고통받았던 샤이론은 오히려 엄마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이내 엄마의 사과와 사랑한다는 소리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첫 번째 트라우마가 봉합된다.
두 번째 트라우마를 봉합하는 과정은 바로 식당 신이다. 나는 이 식당 신이 가장 자연스러우며 시적이라고 생각한다. 정적과 대사의 템포를 통해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든 감독은 바로 이 식당 신에서 그 리듬을 극대화한다.
샤이론은 케빈을 만나러 식당으로 향한다. 우리는 케빈이 어떤 음악을 통하여 그에게 전화했는지 궁금하다. 그 궁금증은 계속 마음 한편에 남아 내가 아는 음악 중에 있지 않을지 생각하게 된다. 샤이론은 식당에 들어가기 전 케빈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련의 행동들을 하고, 관객들 역시 동시에 초조해진다. 이내 식당 종소리와 함께 샤이론은 식당으로 들어가고 재밌게도 화면은 곧바로 케빈을 잡지 않는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화면 곳곳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며 케빈을 찾는다. 우리는 샤이론의 감정선과 더불어 카메라 화면에 흡착되어 집중한다. 그 때 케빈이 주문을 받으러 오고, 점차 다가오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심장은 고동친다. 바로 그때 케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케빈과 샤이론은 오래된 친구처럼, 지나간 연인처럼 대화를 한다. 케빈은 샤이론에게 자신이 말했던 노래를 틀어준다. 그 노래는 babara lewis 의 “Hello Stranger”. 샤이론은 케빈이 만든 스페셜 음식을 먹기 위하여 익숙한 듯이 문을 보며 앉는다. 이 때 샤이론은 문을 지긋히 응시한다. 이제는 익숙하게 문을 보며 앉는 자신을 보며 분명 후안을 생각했을 것이다.
케빈은 자신의 스페셜 음식을 먹고 있는 샤이론에게 짤막한 대화를 통해 깊은 물속에 있던 진짜 샤이론을 물밖로 끌어올린다. 재밌게도 케빈과 샤이론의 대화는 한 번에 이어지는 법이 없다. 대화 중간중간에 손님들로 인해서 계속적으로 흐름이 끊긴다. 그 멈춤으로 인하여 케빈의 질문에 대해서 관객들 각자 생각의 시간을 갖게 된다. 감독은 관객들의 시선을 흡착시키는 동시에 생각이나 감정의 동조화 현상까지 이끌어 낸다.
식당에서의 짤막한 대화가 끝나고, 케빈과 샤이론은 식당을 나선다. 샤이론 차 안에 있던 왕관이 자연스럽게 후안 차 안에 있던 왕관과 오버랩된다. 샤이론은 케빈 집으로 가게 되고, 파란색 옷으로 갈아입은 케빈은, 샤이론에게 묻는다.
샤이론 너는 누구니?
케빈의 물음에 샤이론은 다시 한번 과거를 업고 현재에 마주한다. 동시에 관객은 샤이론이 경험했던 가족, 친구, 성, 직업, 학교 등 보통사람의 반경 내에 벌어지는 모든 접점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화학작용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물론 관객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잊고 있던 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사람은 항상 어느곳에서든 누구와든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사람이 될수도 있고, 사회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사회와 사람에 맞추느라 쉽게 스스로를 지운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마주하려 했던 리틀, 샤이론, 블랙의 노력(후안에게 엄마에 대한 것을 물어 볼 때, 폭행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과 복수를 하는 장면, 엄마와 케빈을 만나러 가는 장면) 은 우리가 지웠던 우리 자신을 찾게 도와주며, 관객들 개개인에게 각기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하여 나 스스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마지막 '리틀의 바닷가 장면'은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사색의 시간이다.
퀴어요소가 있는 영화는 그 요소로 인해서 예술성이 올라가고 대중성은 반감되는 경향이 있다. 라라랜드에서 만약 두 주인공이 남녀가 아닌, 남남, 녀녀 커플이였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세바스찬과 미아에게 그토록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최근 주변에서 '캐롤'을 재밌게 보고, '아가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들이 '그녀들의 사랑이야기'를 대하는 태도로서 '그들의 사랑이야기'도 보았으면 한다.
더군다나 흑인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은, 심지어 샤이론이 처한 환경 (마약중독자 편모가정, 마약거리가 가까운 동네)에서 보통으로 살아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샤이론은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어렸을 적 후안을 만났을 때의 어린 리틀 그대로다. 당신의 영혼도 그대로 일 것이다. 다만 그 주위환경이 바꼈을 뿐이다. 이 영화는 한 영혼의 순수성을 회귀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순수성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단순히 흑인, 퀴어코드로 인해서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 또한 오스카상을 받았다고 무조건 좋은 영화라고 결론지을 수 없다. 이 영화는 이 세상에서 맺는 관계들마다 실패하고 회복을 통해 나아가는 과정, 그것을 보여 주며 영화적 아름다움을 꾹꾹 눌러쓰며 담은 부분이 많다. 나는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한다. 정말이지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