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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Jun 29. 2022

[헤어질 결심] 에 대한 짧은 단상

[헤어질 결심] 에 대한 짧은 단상

* 영화를 아직 한번밖에 안보고 나서 쓴 부족하고 짧은 단상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오신 분들은 이 단상을 좋아하게 되실 겁니다. 영화를 보고 흩어지는 기억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붙잡아놓은 짧은 메모이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안보신 분들은 뒤로가기 해주세요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잠'과 '청록색'은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그리고 저 손에 대한 디테일.  포스터도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영화에서 탁월했던  혹은 탁월한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점은, (총알 소리로 시작되는) 오프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되는 시점이었습니다


푸르른 새벽 산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켠 플래시의 불빛이 이리저리 노 다니고, 죽은 시체로 바뀝니다. 그 이후로 장해준(박해일)은 쉬운 길을 내버려두고 굳이 동료 형사 한 명을 등에 엎고 올라갑니다. 아마도 정상이 진실, 혹은 비밀이라고 한다면 그 짐을 지는 사람은 아마 장해준(박해일)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기묘하고도 힘듭니다. 그리고 동료 형사와 그는 계속해서 죽은 피해자가 찍은 유튜브 영상을 봅니다. 동료 형사는 그 영상을 수십 번도 본 것처럼 아주 익숙하게 켭니다. 그것은 아마 장해준(박해일)도 비슷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벽에 사진을 걸어두고 틈날 때마다 보는 강박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그 피해자가 돼보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이룩한 이 사람의 자부심이자 진실을 뚫고 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현장에 가서도 그 사건이 일어나는 사진을 보고 나서 그것을 그대로 행합니다. 아마도 사진에 집착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으로 하여금 그대로 행할 수 있도록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은 어떤 명령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송서래(탕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장해준(박해일)이 내심 사진을 선택하길 바라는 듯 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관심 가는 상대에게 일부러 혹은 억지로라도 같은 점을 찾는 것 같은 것 같은 그런 행위를요. 아마 장해준(박해일)은 약간은 노골적으로 송서래(탕웨이)를 맘에 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관객인 우리들도 느껴지도록 말이죠. 그것은 이 영화의 중심은 사랑 혹은 합일의 영화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프닝이 끝나고 첫 번째 시퀀스부터 동작하는 그 카메라 워크에 사람들은 피의자가 피해자가 되고, 혹은 쫓는 경찰이 그 사건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고, 피해자가 피의자가 되고, 이러한 너와 내가 되는 결론, 그러니깐 무지막지하게 하나의 합일을 향한 암시로 나아갑니다. 그 뒤는 비싼 초밥을 같이 먹는 행위나, 같은 칫솔과 치약을 닦는 행위는 그러한 관문을 여는 행위로 치환되고요. 특히나 눈물약은 계속해서 적절한 긴장감이 시작되기 전에 나오면서 보는 것에 대한 감각을 관객으로 하여금 다시금 상기시키게 합니다.


이 영화는 사랑을 육체적 합일이 아닌 관계적 합일, 그것을 떠나 정신적 합일로 나아가는 듯합니다. 완전한 합일은 무엇일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육체적 합일은 가장 강렬하지만 일시적이며 한순간 그 합일이 끝나면 완전에서 벗어나서 완벽한 타인을 자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관계적 합일은 헤어짐이 있습니다. 특히나 아내와 같이 있는 장해준(박해일)을 보고 그 한계성은 극대화됩니다.  송서래(탕웨이)는 그 한계성을 자각합니다. 그리고 이 관계성합일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 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그 관계적 합일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물론 마지막 자살은 결국 장해준(박해일)이 영원히 자신을 찾도록, 혹은 영원히 그리워하도록 만들어 이 사람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그 상태로 영원히 합일되는 것을 유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계속되는 화면의 중첩되는 촬영으로 극대화 시킵니다. 같은 불빛과 같은 눈, 같은 색감 등을 오묘하게 병치시킴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어떠한 시각적 재미와 동시에 어느 하나 주인공의 무게를 둘 수 없게 만듭니다. 특히나 이러한 병치의 절정의 장면 중 하나는 장해준(박해일)이 자기 부인과 섹스를 하는 과정입니다. 이 시퀀스로 인해, 이제 장해준(박해일)은 이 사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 혹은 송서래(탕웨이)에게 온통 정신이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 역시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리를 쫓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특히나 심리적 요소는 말의 중첩, 혹은 상대가 했던 말을 자신이 함으로서 좀 더 진하게 다가옵니다.  ‘마침내’라는 대사는 장해준(박해일)이 제일 처음 묘하게 느꼈던 말인데 그 말을 자신이 함으로서 완전히 이 둘의 관계는 피의자와 형사의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평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문자를 밤에 보낼 때는 관계가 역전하죠. 그런데 그 이후에 다시 이 영화는 송서래(탕웨이) 대신 간병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로 인해 어떠한 국면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의심으로 비틀어버립니다. 그동안 이룩했던 어떠한 관계적 합일이 이 하나의 순간으로 역전됩니다.


이러한 의심은 장해준(박해일)의 확인으로 확신으로 바뀌고 장해준(박해일)은 말그대로 ‘붕괴’됩니다. 장해준(박해일)의 처절한 고백을 특히나 이 붕괴라는 의미를 송서래(탕웨이)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확실한 사랑일 것입니다. 남자의 여유로움, 혹은 신사적인 그 태도는 자부심에서 나왔었는데, 송서래(탕웨이)를 사랑했기 때문에 장해준(박해일)은 그 자부심을 버리고 송서래(탕웨이)의 죄를 덮습니다. 자신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기둥인 자부심을 송서래(탕웨이)를 위해서 버리는 것을 보고 송서래(탕웨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진심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진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으로 바뀝니다.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게 하느냐 안 피우게 하느냐로도 그녀는 지나간 그의 사랑을 느낍니다. 이 때 담배적인 행위는 일종의 육체적 합일과 비슷합니다. 집 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 그러니깐 장해준(박해일)은 끊었던 담배를 그녀는 피도록 놔두는 그 행위. 그리고 심지어 끄지 않고 재를 손수 털어서 물려주는 그 행위. 그 행위에서 장해준(박해일)은 송서래(탕웨이)에게 행하는 마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송서래(탕웨이)는 장해준(박해일)이 헤어짐을 고할 때 , 그를 잡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것을 , 혹은 장해준(박해일)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는 것을 송서래(탕웨이)도 깨닫습니다.


여기서 장해준(박해일)은 하나의 단서만으로 그녀를 완벽히 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는 장해준(박해일)의 재연적인 신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그 송서래(탕웨이)가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만약 아녔다면요? 그러나 이미 장해준(박해일)은 확신합니다. (혹은 관객들은 이미 설득되버립니다. 그정도로 그의 확신은 강력합니다) 너무 강하게 확신한 나머지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도 않습니다. 송서래(탕웨이)는 포기합니다.  


장해준(박해일)도 포기합니다.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부심도 포기합니다. 혹은 사건의 실마리인 핸드폰을 그녀에게 주었을 때  "나는요 깨끗해요" 라고 했던 바로 그 자부심을 같이 주었을 것입니다. 송서래(탕웨이)는 직감적으로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의 헤어짐의 이유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붕괴라는 단어를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변주로서 그 파일을 저장하고 무한히 반복해서 듣습니다. 장해준(박해일)는 송서래(탕웨이)의 말을 따라 하기에 그칩니다. 그러나 송서래(탕웨이)는 더 나아갑니다. 붕괴라는 말을 사랑으로 정확히 알아듣고 그것을 정확히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던 것, 즉 미결 사건에 자신이 들어가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녀 스스로가 한없이 그리워하여 수없이 들은 그 사람의 음성파일처럼 그 사람 역시 수없이 자신의 파일을 들쳐보고 생각하길 바랬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의 강박증인 태도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그녀를 수없이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강박증 (책상 위 책의 정리 상태, 절에서 방석을 정리하는 태도)이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다음영화

이 영화는 자동차의 좌우 깜빡임의 소리뿐만 아니라 추락의 이미지, 손에 대한 강박, 시계(시점)에 대한 것,  안개와 미스터리한 음악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추리적 긴장도를 관계의 긴장도로 옮겨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리없이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러한 좋은 장치와 미장센에서 제가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미지는 송서래(탕웨이)의 집에 있는 벽지였습니다. 산과 바다, 무엇을 더 좋아하냐고 했을 때 송서래(탕웨이)도 장해준(박해일)도 바다를 좋아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벽지는 산인지, 바다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산과 같으며 바다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색인 (박찬욱 감독이 자주 쓰는 색감인) 청록색 역시 산이 녹색인지 바다가 청색이 합한 색감으로서 어느 하나 확실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은 무엇을 더 좋아하냐 에 따라서 바뀌는 신비한 제안을 합니다. 장해준(박해일)이 송서래(탕웨이)를 불쌍하게 볼 것이냐 공교롭게 볼 것이냐 인 경험과 마찬가지 인 셈이죠. 재밌는 것은 이 벽지의 이미지가 송서래(탕웨이) 의 핸드폰 케이스로도 이어집니다. 제가 봤을때는 처음에는 이 벽지의 이미지와 비슷했는데 두번째 남편과 만나고 나서는 케이스를 바꾼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재밌게도 송서래(탕웨이) 가 자신의 중국말을 번역해주는 음성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는 시점과 일치합니다.


추가로 여기서 잠에 관련된 장해준(박해일)의 재밌는 반응도 볼만 합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장해준(박해일)은 송서래(탕웨이)가 있으면, 잠을 잘 이룹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살인과 폭력이 있어야 편안해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송서래(탕웨이)와 같이 있으면서 이 장해준(박해일)은 편안함을 느끼고, 잠도 잘 잡니다. 장해준(박해일)은 직감적으로 이 송서래(탕웨이)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위험성이 장해준(박해일)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번째 만남에서 송서래(탕웨이)를 계속 의심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송서래(탕웨이)가 여전히 위험적인 요소로 존재하여, 그 장해준(박해일)에게 일종의 편안함을 선사해주길 바랬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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