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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늬 Aug 25. 2023

기억은 사람일까요

저는 축축한 양수 속에 있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뱃속에서 처음 나와 울었던 때와 제일 처음 호흡한 수술실의 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품 안에 안겼을 때의 포근함 역시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왜 저는 태어났을 때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유년시절 기억이 통째로 삭제된 것일까요. 분명 엄청나게 강렬한 기억일 텐데 말이죠. 이 기억 말고도 여러 가지 큰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 처음 걸었을 때의 기억, 제일 처음 밥알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을 때의 기억, 이 모든 기억들은 저에게 어떠한 트라우마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 성취감에 기억이었을 텐데 말이죠.  


저는 몇 가지 가정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사회적인 나이 동물적인 나이와 체감으로 느끼는 나이, 정신적으로 느끼는 나이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25살이라고 가정한다면, 아직 자신의 나이는 20살, 혹은 17살에 머물고 있다고 느끼는 감각입니다. 저는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물었고 대부분 다섯 살, 많게는 열 살 차이가 넘게 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미성숙하거나 하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자신이 느끼고 있는 자신의 나이였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생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의 차이를 느끼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의 답을 기억은 아닐까 라는 첫 번째 가정을 했습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만큼 정신적으로 줄어드는 것이죠. 왜냐하면 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일수록 더 낮은 정신적 나이를 갖고 있어서 신체적으로도 발현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두 번째는 내 안에 있던 어른이 죽고 지금의 지각이 재탄생한 것입니다. 만약, 지각의 나이가 신체의 나이와 별개로 나이가 든다면, 역시 신체적 나이가 1살이 먹을수록 지각의 나이는 2-3살 혹은 그 이상도 나이들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애어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불과 6,7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어른보다 성숙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어린아이들이 사실은 어른의 자각나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4살 때 즈음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고, 5살이 되면 거짓말이 능수능란해서 어린이집에서 권력(?)등을 갖기도 하며,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면 어려운 책을 읽기도 하는 아이들이 있거니와 인생을 달관한 것처럼 사는 아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가정이라고 생각해 보더라도 나의 잊힌 기억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살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분명 기억은 안 좋은 기억과 좋은 기억이 밀가루 반죽처럼 이리저리 섞여서 한 덩어리가 된 상태로 제가 가진 기억의 뿌리까지 뽑힐 정도로 치댈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억이라고 구성된다고 합니다. 기억은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일까요. 글일까요. 이미지일까요. 혹은 어떠한 질감 그 자체일까요. 동시에 기억으로 구성된다면 기억이 사라진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일까요. ‘나’라는 기억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기억은 공유됩니다. 제가 축축한 뱃속에 있을 때의 기억은 저는 하지 못하지만 저의 어머니는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걸었을 때 기억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저희 아버지는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기억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나만의 기억이 아닌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구성원전부는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사람은 다시 재구성됩니다. 사실 내가 죽고, 내 기억을 가진 사람이 죽고, 내 기록이 없어진다면 나는 세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사람은 어쩌면 이 세상이라는 곳에 내 유전자를 기억할 수 있도록 아이를 낳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자꾸만 남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남긴 것이 나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죽으면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기억 남길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컵라면을 남기고 어떤 이는 아이를 남기고 떠납니다. 저는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누구를 찾고 또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상징과 은유를 상상할 수도 없는 판결문을 쓰는 사람의 글 속에서 좋았던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징과 은유를 쓰는 부분들이었습니다. 저는 상징과 은유가 없는 메마른 문장 속에서 일종의 비인간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향하고 있는 부분들은 인간적인 부분도 있을 테지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상징과 은유는 어쩌면 인간다움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모든 글은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중 좋은 글은 자신만의 비유와 상징을 말하는 글은 아닐까요.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해석이며, 동시에 세상을 느끼는 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꾸만 좋은 것만 보고 싶습니다. 의사와 판사들이 대단하다고 느끼는 점들은 좋은 것보다는 안 좋은 것을 더 많이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들 너머에 있는 인간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을 사랑하여서 사람을 잘 만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자체로 멀찍이 그 사람을 생각하고 응원하는 것이 그 사람을 더 오래 사랑하는 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것을 귤나무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제가 키우던 귤나무가 점점 시들해졌는데요. 물도 잘 주고 햇볕도 잘 드는 곳에 두었는데도 계속 시들했습니다. 이파리도 하나둘 말라서 떨어지기 시작했고요. 영양소가 들어가 있는 물을 주어도 쉽사리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평소보다 오랫동안 여행을 가서 신경을 쓰지 못했었는데요. 돌아와서 보니 오히려 귤나무가 파릇파릇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새삼 사람과 사랑이라는 말이 참 많이도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사람의 모난 부분을 채워주는 것도 사랑이고, 사람의 모난 부분을 깎으면 사랑이 되니깐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엇보다 저라는 사람의 솟아있는 모난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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