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추앙받아 본 적 있나요?
드라마에서 시작된 '추앙'이라는 단어는 한동안 이슈가 되었었다. 여주인공은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 사람 자체만을 보지 않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다.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남주에게 자신을 ‘추앙’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 말속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나 자체만을 사랑해 줄 수 있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사랑에도 조건이 필요로 하고, 가진 게 없으면 깔보이기 십상이고, 누구에게나 그럴듯한 삶만이 인정되는 세상에 추앙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생소함 자체였다. 그럼 나는 어떤가? 추앙을 해 본 적 혹은 추앙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딸은 기분이 좋은 날이면
잠자기 전에 내 곁에 와서 이런저런 알랑방구를 불사 않는다. 연신 내 뒤 목덜미에 코를 갖다 박고서는 엄마냄새 좋아를 연발하며 킁킁 거린다
‘엄마 냄새는 포근포근해. 화목한 집의 집냄새가 나’
그 냄새가 어떤 냄새인지 알 수 없으나, 표현만큼이나 내 마음도 폭신폭신해진다.
아마 세상의 모든 엄마냄새는 다 좋을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엄마에게서 나는 냄새는 걱정도 아픔도 외로움도 다 씻겨주는 만병통치약이었으니까.
나는 내 아이들에게 세상 전부인 때가 있었다. 아이는 엄마인 나를 믿고 따르고 내가 없으면 한 시도 설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나조차도 미약한 존재였음에도 내가 그런 미약한 존재를 이만큼 키워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난걸까. 아이들은 내가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엄마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추앙해 주었다. 때로는 나의 불완전함에 떨고 있을 때 ‘엄마’라고 불릴 때마다 엄마 자격이 있나라는 의심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런 추앙이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추앙덕분에 나는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왔다. 당연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가 언제냐고 물어올 때 나는 서슴없이 아이들이 어릴 때라고 답한다. 아이들이 내게 보여주었던 그 추앙의 힘이 나를 그런 만족감에 들게 한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는 그런 존재다.
존재자체만으로 사랑스러운 존재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이 낳는 일이 왜 두렵냐고 물었다. ‘아이가 내 말 안 듣고 비뚤어진 아이로 자라면 어떻게요. 저도 자식이지만 정말 부모마음대로 안되는게 자식이잖아요.’ 귀여운 20대 후반의 한 친구의 말이다.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는 청년들을 여럿 만났었다. 다들 비슷한 이유들로 아이는 꺼리는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본질육아를 강조하는 지나영 교수의 말에 따르면 먼저 어떤 아이로 키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길 권한다고 했다. 온전히 사랑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누구라도 충분히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라고 했다.
아이를 낳아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느껴볼 수 없는 감정들은 수천수만 가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중심축에 추앙이 있었고 추앙을 받음으로서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했고 더 충만해 질 수 있었다. 두려움과 부담감을 내려놓고 온전히 사랑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분명 세상 모든 부모는 아이들을 잘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을 거치고 나니 아이는 지금처럼 혼자서 뭐든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번갯불에 콩 볶는 시간보다는, 쏜 화살 보다는 조금 더디게 지나가지만 어쨌든 순식간에 자랐다.
이제 가끔은 내가 딸의 냄새를 향해 덤빈다
딸에게서는 투명한 냄새가 난다, 투명하다고 해서 무취가 아니다. 맑은 냄새, 신선한 산소 같은 냄새가 난다.
그런 산소 같은 아이들을 낳아 기른다는 건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산소를 불어 넣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