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소한 부모역할 9 >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귀에 어어폰을 꽂지 않았다. 24개월 전후로 보이는 꼬마아이는 아빠 품에 댕그랑 안기고 엄마는 뒤따르고, 이렇게 한 가족이 함께 탔다. 엄마 등에 조가비딱지처럼 붙어 있는 어린이집 가방으로 보아 아이의 귀가시간을 함께하는 것으로 보였다.
곧 엄마가 아기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함께 우리 00이 데리러 가서 좋아요?”
그 작은 입으로
“네”
라고 답했다. 칙칙폭폭을 연신 읊조리며 온몸으로 기분 좋음을 표현했다.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에도 부부는 깔깔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흘깃거리는 나에게까지 행복을 전염시켜 주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시간이 잠깐 흘렀다. 엄마는 또 아기에게 물었다.
“우리 00이 씩씩하게 청진기 여기 대고 또 입도 크게 아~ 할 수 있지요?”
순간 아이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통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속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이니 지금 이순간은 너무 좋다 라는 그런 몸짓이었다. 이내 일가족은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 병원 행이겠구나 나는 생각했다. 아이는 어른들의 제지에 꼼짝 못하고 눈물과 울음으로 세상에 대한 배신을 하소연할 뿐이겠지. 세상에 믿을者 하나 없다는 걸 알아가겠지. 나도 모르게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이 방면이라면 나 역시 전과자였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두 달 전 쯤 딸이 남친이 생겼다고 했다. 드디어 대학생이 되더니 모태솔로를 탈피하나보다며 나는 내 일처럼 기뻤다.
대학생 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연애와 알바라고 했었다. 자신의 전공과 관련한 알바는 토요일 발레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중에는 레스토랑에서 하는 알바를 구했다.
“어떤 사람이야?”
들떠서 되묻는 내 말에 딸은 주저주저 했다. 잠시 후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다시 말을 시도했다.
“주방 셰프 오빠”
하마터면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지를 뻔했지만, 동그래진 눈으로만 응대를 했다. 순간 남편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딸에 대한 아빠의 사랑에는 아직 충격을 흡수할 만한 장치가 없다. 장착될 기회가 없었다. 첫 연애인데 풋풋하고 순수한 또래와의 연애를 했으면 했다.
젊은 애들 연애인데 큰 의미 부여할 것도, 그리 놀랄 일도 아니라며 나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걱정은 되었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최대한 이성적이고 교양 있는 엄마인 척 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긴 이야기를 하다보면 속마음이 들킬까봐 단지 예쁜 연애하기를 바란다며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속에 있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딸이 늦게 귀가를 하거나 평소라면 넘기고 지나갔을 일들에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날이 섰다. 어느 날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딸이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괜찮다고 다 말하라고 해 놓고선 꼭 이런다니까. 말한 내가 바보지 바보야.”
뜨끔했다. 나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보는 것이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나이가 많아서, 직업이 별로여서, 온갖 구실로 못마땅함을 표현하고 있다. 다 이해하는 척,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척 했지만 실천은 꽝인 나를 보고 있자니 낯 뜨겁기까지 했다.
법륜 스님의 말씀이 떠 오른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대단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면서 아싸리 못마땅한 건 못마땅하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덜 비겁하다. 그렇게 딸은 또 한 번 엄마로부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버스에서 본 꼬마아이에게 만약 엄마가 아침에 등원할 때 오늘 끝나고 병원을 갈 것이라는 얘기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이는 씩씩하게 병원 행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아빠가 나란히 자신을 데리러 온 것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의젓하게 마음의 준비를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따끔한 주사에도 그저 눈물 한 방울로 퉁치고 말았을지 모를 일이다.
대학생인 딸에게도 평소에 나의 솔직한 마음을 내 보였더라면 어땠을까. 딸이 엄마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그 상황이 덜 황당무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당히 둘러대는 방식을 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배신감은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는 일종의 후려치기 상처다. 예상 못했던 주먹이 훅 하고 날아 들어갔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너를 위한 일’이라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본성으로 배신감을 던져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일상에서 내가 얼마나 자주 이러한 비겁한 방식으로 문제 해결을 하려 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좀 부끄러웠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은 끝도 없이 나를 성숙시키는 일이다. 세상 어떤 개체가 나를 이렇게 돌아보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역시나 자식 말고는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