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배우던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할 때

<소소한 부모역할 1>

by 삼분카레

음악을 가까이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삶이 얼마나 더 충만할까라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아들은 사춘기와 힘든 과정들을 거쳐 오면서 음악에서 많은 위안을 얻어 왔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살게 되어 마땅히 사춘기의 현란함을 풀어놓을 기회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음악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말에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KAIST의 오케스트라는 규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상당한 수준을 자랑한다. 아들은 정기공연 참석을 두어 번 하더니 이번에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피아노가 주를 이루는 브람스의 피아노 콰트로 곡으로 친구들과 연인을 초대해 즐길 줄 아는 청년들이다. 많은 양의 공부를 소화해 내는 것도 힘들어 집에 오는 횟수도 줄어드는데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하고 서로 호흡을 맞췄다는 것이 대견했다.

초등학교 때 학교 오케스트라단이 있어 악기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한때 1인 1악기라는 교육 방침아래 누구든 악기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았다. 하지만 악기도 언어처럼 장기간동안 매일의 꾸준한 연습 없이는 지속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중간 중간 포기의 위기는 막을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굵직한 난간에 부딪힐 때가 많다. 특히나 꾸준히 배우던 것을 그만두고 싶어 할 때 난감하기 이를 때 없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투정도 여러 번이면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유가 단지 지겨움 때문이라면 그리고 더 이상 아이를 구슬릴 방법도 남아있지 않다면 더욱 막막하다. 올바르게 상황판단을 해서 적절한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부모로서 제일 부담되는 일이다. 아이존중이라는 요즘 교육의 본질에 맞서 나약한 아이로 키우는 건 아닌가하는 행동요령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은 증폭된다.


아이도 나도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지 않다. 사실 해결의 열쇠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마리라도 찾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중에 나는 선생님의 도움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언제나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해주셨다.

아이가 배우던 것을 그만 두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흥미가 없어서, 선생님이 무서워서, 지겨워서, 하기 싫어서, 소질이 없어서 등

성인들조차도 영어든 운동이든 꾸준히 하는 일들에 어려움을 겪는다. 성인이라고 해서 아이들보다 특별히 의지가 굳건하다든지 역량을 더 갖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늘 옆에서 지지해주고 지속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어릴수록 배움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더 쉽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과 내통(?)을 하는 방법을 자주 택했다. 내통이라는 말에 약간의 구린내가 나는 것 같지만, 선생님과 부모가 교류하는 것을 가끔은 아이 모르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차원에서 내통이라는 말을 썼다. 아이의 상태와 특징들을 선생님께 이야기하면 도움을 주지 않을 선생님은 한분도 안 계실 것이다. 오히려 부모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할테니 선생님은 신경 꺼주세요 라는 태도가 문제가 되지, 내가 겪은 선생님들은 자신이 도울 일에 기꺼움을 즐기셨다.

부모이지만 우리는 완전하지 않는 존재인건 아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부모가 책임지고 완벽하게 소화해 내기는 힘들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많은 사람이 함께 동참해야 옳다. 그래야 나의 편협된 사고와 판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그만두고자 하는 요인을 부모가 잘 살펴서 선생님과 상담을 하면 십중팔구 해결의 실마리가 잡힌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선생님의 칭찬이나 친절도에 따라 어제 하기 싫던 것을 오늘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게 된다. 때로는 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넓은 아량을 지니기도 하고, 중도포기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한다.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하는데 설마 아이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 못하겠는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또한 내가 아이 훈육에 어려움을 토로하게 되면 선생님은 도리어 부모를 위로하기도 한다. 많은 선생님들이 자신의 교육 방식이 최선이며 도리어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나무랄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선생님을 탓하는 내용으로 상담을 한 것이 아님에도 선생님은 자신의 방식을 한 번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학생의 유치한 걸음걸이에 맞도록 자기를 낮춰서 그 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고매하면서도 매우 강력한 정신’이라며 몽테뉴 <에세>에서도 선생님은 이러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니 선생님과 상담을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가시밭길을 지나 아들은 이제 본인 스스로가 좋아 선택할 만큼 평탄한 길로 들어선 것 같다.

중학교에서 오케스트라 활동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어졌다. 학교 행사 때 국민의례 반주를 하고 정기연주회를 하는 등의 활동을 하더니, 고등학교에서도 역시 악기를 배웠다는 이유로 동아리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차츰 그런 과정을 지나면서 아들은 연주를 즐기는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온전히 자발성에 맡겨진 일이 되었음에도 역시나 오케동아리를 선택했다. 이제는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즐기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일부분이 된 것 같다.

“첼로 그만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그때 그만 두었더라면 어땠을 것 같아? 아들” 아들은 어린 시절의 생각들이 어렴풋이 나는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 말속에 ‘포기하지 않고 잘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라는 말이 부차하게 덧붙여 있지 않아도 내겐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 혼자의 힘이 아니었단다 아들, 그러니 언제나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략했다. 이미 아는 듯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