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소한 부모역할 4 >
기적이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일컫는다. 그러니 나와는 거리가 아주 멀고 흔하지 않음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소소한 작은 기적들은 늘 나의 삶에 불쑥불쑥 일어나곤 했었다. 내 생의 가장 첫 기적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초등학생이었다.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시장에 가자고 했다. 시장은 동네를 벗어나 30분정도를 걸어가야 할뿐 아니라, 리어카를 끄는 모습으로 행여 학교친구들을 만나게 될까봐 그 일은 죽기보다 싫었다. 죽기를 시도하지 않은 일 빼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밑도 끝도 없는 기도뿐이었다. 그런데 동네를 막 벗어나려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오빠가 나타난 것이다. 신이 나의 기도를 듣고 오빠를 보내줬다는 생각에 나는 기도가 현실이 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면서 나는 염원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가 늘 행운아라는 생각을 마음에 새기며 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의 개연성은 별로 없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심지어 특정 신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나의 기적은 바로 딸에 관한 것이다. 딸이 예고를 다녔고 예고는 전공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입시에 대한 고민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하게 된다. 무조건 실기는 잘하고 볼일이고, 그에 교과 성적도 관리를 잘 해야지만이 원서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학교도 있다. 실기 성적은 입학 순이 곧 졸업 순이라 할 만큼 순위를 뒤집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마다 노력과 투자의 시간들이 크게 다르지 않고, 예고에 입학할 정도면 아이들 근성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실기수업은 학교에서 관리해 주는 스케줄대로 움직이면 되었고, 영어성적 관리를 위해 영어공부방을 다녔다. 실기 수업이 들쑥날쑥이라 영어 학원을 다닌다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실기로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최상위권 대학을 진학할 것이 아니면 학과성적 관리하는 시간에 실기성적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더 좋은 전략일 수도 있다. 어느 날 딸은 지친 나머지 영어 학원 다니기를 포기하고 싶다고 했다.
난감한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면 나는 시간을 갖고 생각하기에 돌입한다. 이것은 나의 주특기인데 그렇게 며칠간 생각을 하다보면 어렴풋하게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렇게 결정한 일은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의도가 순전히 대학입시만을 위했던 건 아니었다. 힘들다고 그만두면 그만 두지 못할 일이 없으며, 또한 한창 공부해야 하는 시기이므로 그 시기의 공부습관이 이후의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딸을 어르고 달래었다. 다행히 딸은 마지못해 동의를 했다. 그로인한 스트레스에 나는 기꺼이 인간샌드백이 되어주어야 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입시 요강이 발표될 때쯤 기적의 전조현상이 나타났다. 입시요강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야말로 내 딸을 뽑기 위해 최적화된 방향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참고로 우리는 총장이나 학교인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1차 서류심사에도 지원서를 낼 수 없을 줄 알았던 이대입시에 대한 희망의 빛이 보였다.
딸이 자신의 꿈을 위해 매진할 때 나는 『연금술사』를 우연히 다시 집어 들게 되었다. 책의 속지 한켠에 20년 전 친구가 내게 선물한 내용의 메모가 적혀있었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년 동안 많은 일들과 잦은 이사로 무수한 책들이 버려지는 순간에도 이 책은 줄곧 나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연금술사의 한 대목은 유독 나에게 와 꽂혔다. 이 역시 기적이 도달하는데 필요한 징검다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적어두었던 글에서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 간절한 기도 >
내 어릴 적
장독대 위 정안수 올리고
흰색저고리에 정갈하게 쪽 지으신 머리
'비나니아 비나이다'를 외시며
내 할머니는 그렇게
가족들의 무사안위를 기원 하셨더랬다
목욕재계 하고
부처님 앞에 엎조리며
밤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시는
내 엄마
고3딸을 둔 당신 딸의 걱정 어린 전화목소리 듣자마자
오직 외손녀만을 위한 관세음보살을 외시기로 하셨다
나는
남의 험담이나 사사로움을 삼가하고
평온한 마음과 가장 낮은 자세로 딸의 염원을 빌기로 한다
『연금술사』의 한 대목은 나에게 이렇게 와 꽂혔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나는 딸을 생각하며 낮게 읆조렸다
'온~ 우주가 너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돕고 있어. 불안해하지 않길... 노력해 온대로만 하길...'
실기와 교과 성적에 대한 환산방식에 변화가 생김으로서 딸보다 실기성적이 좋았던 3명이 이대원서를 낼 수가 없었고, 원서를 냈던 지원자 중에서도 딸은 세 번째 정도의 순위에 있었다. 하지만 타 학교 학생들과도 경쟁을 해서 합격정원13명 안에 드는 일은 결코 함부로 넘겨다볼 수 없는 벽이었다. 이대 지원조차도 힘들 줄 알았던 일이 1차 합격으로 이어지고 그 몇 달 동안은 그야말로 딸에게는 기량을 끌어 올리는 동력의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들도 딸에게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향상된 실력에 칭찬을 해 주셨다. 2차 실기시험 치르기 전날에는 딸에게서 후광이 비친다는 선생님의 기대 섞인 응원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딸은 그 시험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것 같다.
우리가 간절함을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동안, 기적도 그렇게 우리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왔던 것이다. 실기 순위를 거의 매 학기마다 한 단계씩 끌어올리는 노력, 영어를 포함한 교과공부를 포기하지 않은 노력, 간절함을 쉬이 놓아버리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보상은 기적같이 왔다. 그렇게 지원자 9명 중 딸만이 유일한 합격자가 되었다.
어쩌면 기적이라는 것이 늘 우리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의 간절함에 대한 기꺼움이 하나하나 이어지고 그에 답이라도 하듯 모든 만물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다 어느 모퉁이에서 짠! 하고 마주하게 되는 것, 그렇게 기적은 서서히 도달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이후의 내 삶에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하며 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