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많아서 예체능을 시킨 건 아니었다
< 소소한 부모역할 3 >
딸은 알바를 하는 곳에서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며 퉁퉁거렸다. “무용까지 할 정도면 너희 집 돈 많을텐데 왜 이런데서 알바를 하냐?”
딸이 이런 질문을 받는 동안, 나는 “돈이 많이 들겠네요?” 내지는 “아이가 예체능을 하면 엄마의 매니저역할이 필수라던데”라는 질문을 자주 받곤한다.
딸은 발레를 전공한다. 하지만 결코 돈이 많아서 시킨 건 아니었다. 대학을 가면서부터 딸은 주말에는 발레학원에서, 주중에는 레스토랑에서 알바를 하며 용돈을 벌어 쓴다.
물론 박세리, 김연아, 손흥민 선수들의 부모님들의 헌신이 매스컴에 이슈화 되면서 그것이 마치 법칙인양 그렇게 오인될 수도 있다. 예체능 쪽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들로 일반화 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꼭 그래야만 하는 공식 따위는 없다.
어릴 때 딸은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오빠가 태권도를 다닐 때 딸은 망사치마가 달린 옅은 핑크빛 레오타드를 입고 발레학원을 다녔다. 그맘때 여자아이들에게는 발레학원이 공주차림으로 운동하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4학년이 되면서 상황은 좀 달라졌다. 전공반으로 올라가느냐 그만두느냐의 귀로에 서게 되었다. 발레 학원 원장님은 아이가 신체조건이 좋으니까 전공반으로 한 번 시켜보자고 제안을 했지만, 누구에게나 하는 사탕발림소리로 가볍게 듣고 넘겼다. 남편과 나는 예체능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고, 그쪽 방면에는 극심한 문외한이었다.
우리는 고민 할 것도 없이 발레를 그만 두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아이는 발레를 계속 하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교묘하게 설득해 그만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돈이 많이 들어 우리 형편에는 시킬 수가 없다는 말을 아이에게 차마 할 순 없었다) 정작 그만두게 했지만 내 마음은 홀가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껏 아이가 어떤 것에도 발레만큼 호감을 보인 것도 없었고, 다른 재능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또한 소심한 성격임에도 발레에 가지는 의지력은 비교적 뚜렷했다. 엄마의 만류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며 체념하는 아이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다시 발레를 시켜보자고 결정하기까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얼마만큼 많은 돈이 들어야 하고 어떤 길로 갈 것이라는 것을 꼼꼼히 따져보지 않았다. 경제적 문제도 중요하지만 아이의 실망스런 낯빛을 구제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확신이 든 한 가지는 아이가 지구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았다. 오래 달리기 하는 모습, 친척들과 모여 놀 때 밤을 세워 노는데도 지치지 않는 모습, 아기였을 때부터 산을 오를 때 안아달라는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는 모습 등에서 아이의 기질을 알 수 있었다. 예체능을 하는데 필수요건이며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무식이 용감한 법이라고 아마 몰라서 선뜻 그런 선택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때는 한반도의 최남단이라 할 수 있는 전라도 끝자락에 살았었다. 엄마의 무관심 따위는 문제도 안 되었고 뭐든 발레 원장님이 알아서 해 주셨다. 그러다 운 좋게 중2때 아이아빠가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소개받은 학원근처로 전셋집을 구했고, 학교는 걸어서 20분, 학원은 걸어 10분 거리에 있었다. 낯선 서울생활 채 적응도 하기 전에 나도 교습소를 오픈하면서 아이는 전적으로 혼자 알아서 다녀야만 했다. 집과 학원과 학교를 차례로 찍고 다니며 분주하게 쫓아다녔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우리로써는 서울엄마들이 존재만으로도 우러러 보였다. 게다가 발레작품명, 학계 교수님, 업계 선생님, 발레단의 소속 발레리나, 발레리노, 심지어는 각 학교마다 실기성적이 좋은 아이들의 이름까지 죄다 꾀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들어도 그 작품이 그 작품 같고, 그 이름이 그 이름으로 들렸다. 생전 처음 콩쿨장을 따라 다녔고, 서울 엄마들이 어떻게 하나 작은 눈이 찢어져라 곁눈질을 해댔다. 엄마들은 최상의 조건에서 아이가 발레에 열중할 수 있도록 극우대를 하고, 꼼꼼하게 용품들을 챙기고, 모든 가능성에 귀를 열어두는 듯했다.
딸은 발레에 대해 무지했고, 엄마는 그것보다 더 무지했다. 미안했다. 노트에 써 가면서까지 외우려 해봐도 다음날이면 다시 제자리. 나는 내 일을 쳐내기도 바빴다. 아이의 뒷바라지를 다른 엄마들만큼 못해줘서 자괴감이 들었다. 헬리콥터 엄마(자녀 주위를 맴돌며 모든 것을 관여)의 부작용을 꼽아가며 그렇게라도 마음을 달래야만 했다.
딸은 꿋꿋하게 잘 견뎌냈다. 수업 내내 대기하고, 라이딩이며 발레에 관한 지식과 정보에 빠삭한 엄마를 둔 친구들이 부러웠을 것이다. 때론 툴툴거렸지만 자신이 현재 그 자리에서 발레를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부여 했다. 바닥이 매끈한 홀, 훌륭한 원장님, 실력 있는 학원생들 이런 곳에서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각자 그렇게 차츰 시간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적응해 나갔다. 나도 더 이상 가랑이 찢어질세라 서울엄마들 흉내 내는 일은 접었다. 사람마다 각자의 노선이 있는 것이다. 딸은 그런 엄마에게 별 기대 없이 나 그대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스스로 더 잘 챙기며 묵묵히 열심히 해 나갔다.
예고는 무난하게 입학했다. 여전히 나는 수도권 엄마들에게 기가 눌려 있었다. 나와의 괴리감이 엄청날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었다. 모두가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아이를 이런 학교에 보냈을 거라는 편견을 나조차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내가 발을 담궈 보기 전에는 상상만이 난무하듯이 막상 담그고 보면 금방 온도가 짐작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엄마들은 커피한잔 값에 벌벌 떨었다. 레슨비 계산에 천원이라도 오차가 생길까 계산기 두들기는 건 너나나나 마찬가지였다. 애들은 하나같이 에어팟을 끼지만 엄마들은 엉킨 이어폰 줄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쩌다가 가끔 돈이 어마하게 많은 엄마가 있다지만 내 주위에는 없었다.
예고에서는 학교에서 하는 수업과 방과 후 선생님들이 해 주는 수업 외에 외부서의 수업은 하지 못하게 했다. 다행이었다. 그래서 정작 예고를 다닐 때는 방과 후 수업료만 충당하면 됐었다. 콩쿨 때 의상은 대여를 해서 입거나 친구들끼리 빌려가며 입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체중이며 실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 주고 일반고 학생들 학원 갈 시간에 학교에서 실기수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내 삶과는 완전 동떨어진 세계 속에 들어갔지만 그곳도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 사는 곳이었고, 하나하나 밟고 지나왔더니 아이는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다. 그것도 기적 같은 입시과정(다음화 소개)을 거치며 지금은 지나온 날들의 무용담에 여유를 즐긴다.
무엇보다 ‘그렇다더라’에 솔깃해서 지레짐작으로 나를 제한하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간혹 ‘예외도 있다더라’에 그 예외가 내가 될 수 있음에도 그 예외로부터 절대 나는 예외일 수 없을 거라는 속단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갖가지 학원을 등록해야 성적을 올리는 친구가 있는 반면, 학교에서 교과공부에 충실해 성적을 잘 내는 친구가 있듯, 무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명선생님 쫓아 비싼 레슨비를 들여 수업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옛말이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돈이 아이 성적을 결론짓고, 아이 미래를 결정짓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과 헬리콥터식 지지가 언제까지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익히 보아왔던 학교성적, 좋은 학교 입학정도는 그 영향이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과정은 그 다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밥벌이를 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길에 수도 없이 바위덩어리들이 가로놓일 것이다. 그때마다 돌들을 치우고 비켜가기 위해 정작 무엇이 필요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능하다. 본인의 의지가 약해서, 혼자 결정을 못해서,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아가기를 포기한다면 아이는 그때 와서 누구를 원망하게 될까.
발레를 시키면서도 장래를 걱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돈벌이가 될까, 평생 체중관리 해야 하는 아픔과 몸이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부모로서는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다더라’의 일반화의 오류 안에 나를 가두기보다는 아이의 기질과 행복을 우선시 했다는 점에서 나 스스로에게 칭찬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발레리나로 명성을 떨치며 살기를 주문하지 않는다. 그 이후의 삶은 이제 오로지 자신에게 맡기려 한다. 아이가 혹독한 연습을 이겨냄으로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딛고 넘어설 수 있는 근성을 갖기를 희망했다. 다행히 어느 정도 단단해진 것 같다. 대학 들어가서는 크고 작은 무대를 네 번이나 섰다. 한 번도 서지 못한 친구에 비해 실력이 특출 나서가 아니다. 스스로 찾고 부지런히 관계를 맺고 무엇보다 자신이 즐기기 때문에 이뤄낼 수 있는 성과였다.
발레를 계속 시킬까 말까를 그렇게 고민하지 않았더라면 현재 이토록 자신감 있는 아이는 없었을 것이다.